34개월의 찬유
하원하고 병원 갈 채비를 한다고 집에 잠시 올라왔을 때 멘토스를 하나 주기로 했다. 멘토스는 특성상 색을 고를 수가 없지 않은가. 해봐야 양 끝의 두 가지 색깔 중에 고를 수 있을 뿐이지 모든 색깔 중에 원하는 걸 고를 수는 없다.
그런데 찬유가 자꾸 ‘하얀색’이 먹고 싶다고 하는 거다. 내가 알기로 하얀색은 없는데, 어제 먹었던 연한 노란색을 의미하는 것 같았다. 나는 안된다고 했다. 이건 색을 고를 수 없는 거야. 나오는 색을 먹어야 하는 거야. 엄마는 그걸 찾아서 따로 꺼내줄 수가 없어. 주황색 사탕이 나왔고, 아이는 큰소리로 울고 떼를 쓰기 시작했다.
나는 계속 설명했다. 이건 원하는 색을 고를 수가 없어. 그 색깔이 지금은 없어. 나온 걸 먹어야 하는 거야. 주황색을 먹기 싫으면 먹지 마. 그렇다고 다른 걸 줄 수는 없어.
병원으로 얼른 출발해야했기에 울고 발버둥치는 아이를 안고 차에 태웠다. 조금 더 울었지만, 아이는 생각보다 금방 진정한 뒤 주황색 멘토스를 입에 넣었다. 그제서야 나도 웃을 수 있었고, 신나게 아이와 창 밖으로 지나가는 레미콘과 유조차와 포크레인에 대해 이야기했다.
멘토스 한 줄을 다 꺼내서 아이에게 보여주고 고르라고 할까, 마음 속에서 수십 번 고민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나는 언제나 생각한다. 아이에게 한계를 인지하게 하는 것에 대하여. 엄마라고 모든 것을 들어줄 수는 없다는 것. 세상은 늘 주어지는 것 중에 최선을 선택하는 거라는 것. 안 되는 것을 되게 할 수는 없다는 것. 어릴 때 부터 그것을 인지하지 않는다면, 어릴 때 뭐든지 내가 원하는대로 세상이 돌아갔다면 어른이 된 후 세상이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너무 좌절하지 않겠는가. 작은 어려움에도 주저 앉지 않겠는가. 그래서 나는 아이가 어리더라도 꼭 알아야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한계’이다.
찬유가 지금보다 더 어릴 때, 집에 없는 것을 내놓으라고 하며 드러누워 울었던 적이 있다. 블루베리가 먹고 싶다고 하는데 블루베리가 집에 없었다. 지금은 집에 없어. 엄마가 다음에 사 놓을게. 엄마가 지금 주문하면, 블루베리가 차를 타고 찬유에게 올 거야. 엄마가 지금 주문 해 놓을게. 처음에는 이해하지 못했지만 그렇게 서너 번 이야기하니 아이는 이해했다. 블루베리가 먹고 싶은데 집에 없다고 말해주면 ‘블루베리가 찬유한테 빠방 타고 오고 있어?’ 하고 아이가 먼저 말했다.
원하는 것을 항상 당장 얻을 수 없을 수도 있다는 것. 때로는 기다려야만 얻을 수 있다는 것. 때로는 어떤 노력과 수고를 통해서만 얻을 수 있다는 것. 그것이 자기조절능력의 기초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오늘 아침, 등원하러 집을 나서는 길에 찬유는 멘토스(동그란 젤리)를 하나 먹고 싶다고 했다. 나는 어제 했던 말을 그대로 했다.
“동그란 젤리는, 색깔은 찬유가 원하지 않는 게 나와도 어쩔 수 없어. 색깔은 엄마가 골라줄 수 없어.”
“색깔은! 주황색 골라야 돼.”
“주황색 골라야 되는 게 아니구, 어떤 색이 나올지 엄마도 몰라.”
이렇게 말하고 꺼냈는데, 주황색이 나왔다. 아이가 말했다.
“주황색 나왔다! 오늘은 주황색 먹구, 오늘은 그르지 말자~”
오늘은 그르지 말자,는 건 어제 처럼 떼쓰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어제 찬유가 먹고 싶지 않다고 했던 색이었는데, 오늘은 받아들였다. 떼쓴다고 색이 변하지 않는다는 걸 아이는 인지하고 있었고, 어제처럼 떼쓰지 않겠다고 스스로 말했다.
태연한 척 했지만 속으로 너무나 감동스러워 눈물을 삼켰다. 부모로서 어떤 기준을 가지고 아이에게 말을 하고 훈육을 하는 건 나지만 언제나 그것을 받아들여주는 것은 아이의 몫이다. 이렇게 성숙하게 받아들여준 찬유가 정말 고마웠다.
2023.10.11
34개월의 찬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