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y 55] 조지아 바투미
바투미의 숙소는 내가 골랐다. 에어비앤비에서 예약했는데 딱 열 평 쯤 되어보이는, 우리가 분당에서 살던 작은 오피스텔 집 같은 느낌의 공간이었다.
사실 그는 나에게 호텔도 괜찮다고 했었다. 바투미는 바다가 있는 휴양도시라서 오랜만에 좋은 곳 가서 좀 쉬자고, 웃통 벗고 돌아다니는 아저씨들만 많은 호스텔에서 매번 재우는 것이 마음 아팠다면서, 이번에는 편하게 있을 수 있는 곳으로 골라보라 했었다.
이것저것 보다가 결국 내가 고른 곳은 아기자기한 느낌의 작은 아파트였다. 소파베드로 공간 활용을 하고 화이트와 원목의 조화로 인테리어를 한 이곳은 우리가 처음으로 함께 살던 공간을 떠올리게 했다. 작지만 조리 공간도 있고 싱크대도 있어 우리가 음식을 해먹기에도 편했다.
도착해서 보니 이 공간이 더욱 마음에 들었다. 발코니에 나가 왼쪽을 바라보면 조지아의 가장 서쪽 바다, 흑해의 가장 동쪽 바다의 수평선을 볼 수 있고, 오른쪽을 바라보면 이름 모를 산이 있다.
아침 7시에 눈이 떠졌다. 휴대폰에 온 브런치 알림을 확인했다. 어제 발행한 시베리아횡단열차 글에 엄마가 단 댓글을 읽고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나는 꼭 글에 대한 반응이 있을 때 그 글을 다시 처음부터 정독해보는 습관이 있다. 엄마의 댓글을 보고는 내 글을 다시 처음부터 읽어내려갔다. 그러다가 웬걸, 오타를 발견하고 말았다. 바로 수정 버튼을 눌러 바른 글자로 고쳐 넣었다.
화장실을 다녀와서 다시 누웠다. 일어나서 할 일을 좀 할까, 더 잘까 잠깐 고민했다. 살짝 머리가 찌뿌둥한 걸 보니 조금 더 자는 게 좋을 것 같았다.
다시 일어나니 그가 먼저 일어나 부스럭거리고 있었다. 시계를 보니 10시쯤이었다. 또 이렇게 늦게까지 잤네, 싶으면서도 이렇게 여유를 부려도 되는 것이 좋았다.
슬금슬금 일어나 그릇에 씨리얼을 붓고 우유를 따랐는데 우웩, 이건 우유가 아니었다. 묽기는 우유 같이 묽은데 맛이 시큼한 것을 보니 요거트인 것 같았다. 조지아어를 읽지 못하는 탓에 어제 마트에서 이상한 걸 집어온 모양이었다. 아무래도 이런 시큼한 액체에 씨리얼을 먹는 건 좀 아니었다. 재빠르게 씨리얼만 건져내 먹어버리고는 파스타를 해먹기로 했다.
언젠가부터 양파와 마늘을 손질하는 일은 남편의 일이 되었다. 그는 어디선가 양파를 손쉽게 다지는 법을 알아와서는 능숙하게 칼질을 했다. 팬에 기름을 두르고 다진 양파와 마늘을 볶은 뒤 토마토 소스를 넣고 계란을 두 개쯤 풀어 고소한 맛을 더하면 우리만의 완벽한 파스타 소스가 완성된다.
나는 면 삶기 담당이다. 끓는 물에 기름을 살짝 넣고 파스타 면을 딱딱하지도 않고 너무 풀어지지도 않게 삶은 후 물을 빼서 접시에 내려놓으면 그가 후라이팬을 들고 와서 정성껏 만든 토마토 소스를 그 위에 붓는다. 오늘은 특별히 그 위에 치즈를 얹어 전자레인지에 돌리기까지 했다.
나는 그에게 소스가 정말 맛있다며 극찬하고, 그는 아니라고, 면이 딱 알맞게 삶아져서 맛있는 거라고 말한다. 나는 에이, 그럴리가 있나, 소스가 맛있어야 파스타가 맛있는 거지, 하고 그는 다시, 면이 진짜 잘 삶아졌네, 한다.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웃는다.
다 먹고 설거지를 하고 식탁에 마주보고 앉아 노트북을 펼쳐 놓고 각자의 할 일을 했다. 글을 쓰고, 여행 정보를 찾았다. 이따 두세 시쯤 해가 가장 쨍쨍할 시간에는 해수욕을 하러 나가보기로 했고, 저녁에는 어제 마트에서 3,500원 정도에 사온 와인을 마시기로 했다.
갑자기 이 순간이 너무 과분하게 느껴졌다.
느지막이 일어나 집에 있는 재료로 밥을 해먹고, 남편과 식탁에 마주 앉아 일을 하고, 잠깐 쉬고 싶을 때에는 발코니에 나가 바다를 바라보고, 날이 더워지면 수영복을 입고 나가 해수욕을 하고, 해가 질 때쯤 해변가를 걸으면 가장 멋진 노을을 볼 수 있는 삶이라니!
이렇게 살 수도 있는 거였구나, 싶었다.
정말 이렇게 살고 싶다고 생각했다.
바닷가 바로 앞, 작지만 부족할 것이 없는 예쁘고 안락한 집에서 글을 쓰며 살고 싶다. 머릿 속이 복잡해지면 바닷소리와 함께 산책하며 생각을 비우고, 다시 힘을 얻어 책상 앞에 앉아 글을 쓰고 싶다. 배가 고파지면 집 앞 마트에 내려가 식재료를 사와서 남편과 함께 무엇이든지 요리해 먹고 싶다. 오늘은 이걸 해먹어봤으니 내일은 이걸 해볼래? 하며 서툰 솜씨로 배를 채우고 싶다. 잠이 오면 자고, 날이 밝으면 일어나 발코니에 나가 바다를 한 번 바라보며 하루를 시작하고 싶다. 커피포트에 물을 끓여 차를 한 잔 타고, 다시 해가 뜬 것을 기뻐하며 책상에 앉아 글을 쓰고 싶다.
2018.06.03.
세계여행 Day 5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