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y 57] 사이프러스 파포스 / 모자 이야기, 노을 해변
쿠타이시에서 비행기를 타고 사이프러스 라르나카 공항에 도착했다. 시내 버스를 타고 라르나카 해변 쪽으로 가서 간단히 점심을 먹고 파포스로 가는 인터시티 버스를 탔다. 라르나카에서 파포스까지는 약 세 시간 정도 걸렸다.
장장 세 시간을 달려 파포스에 내렸다. 버스 짐칸에 두었던 큰배낭들을 꺼내 메고 에어비앤비로 예약해둔 숙소를 향해 발걸음을 딛었다.
"아, 모자...!"
다섯 발자국쯤 걸었을 때, 그가 탄식 섞인 목소리로 외쳤다.
"모자를 위에서 안 꺼냈다..."
버스에 오른 직후, 그는 앞배낭을 선반 위에 올려놓겠다고 말했었다. 나는 분명 우리가 버스 안에서 잠들 것이기 때문에 앞배낭을 위에 올리지 말고 안고 있으라고 말했으나 그는 일단 올려놓았다가 잘 때 내려서 안고 자면 되지 않겠냐고 말했다. 그럼 올리는 김에 모자들도 올려놓으라고 말하며 그의 모자와 나의 모자를 겹쳐 그에게 건넸었다. 머지 않아 그는 눈을 좀 붙이기 위해 앞배낭을 내려서 다리 밑에 두었고, 그때부터는 줄곧 배낭이 그의 앞에 있었기에 우리는 선반 위에 우리의 물건이 - 모자가 - 남아있을 거라는 생각을 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의 잘못: 5분 만에 내려놓을 거였으면 그냥 처음부터 배낭 올리겠다는 생각 않고 다리 밑에 잘 내려놓고 있었으면 되었을 텐데 굳이 배낭을 올렸다.
나의 잘못: 모자들을 올려놓으라고 말하며 그에게 모자를 건넸다.
우리 둘의 잘못: 내릴 때 모자를 갖고 내리지 않고 있다는 사실 - 선반 위에 우리의 물건이 남아있다는 사실 - 을 인지하지 못했다.
그를 탓할 수도 없었고 나를 탓할 수도 없었다. 누구의 탓도 아니었지만 너무나 속상한 상황이었다. 그 모자는 우리에겐 너무나 소중하고 기쁜 감정이 담긴 모자이기 때문이다.
러시아에서 우리는 원래 쓰고다니던 모자를 쓸 수 없게 되었다. 그의 모자는 한 번 빨고 나니 색깔도 모양도 모두 뒤틀려 쓸 수 없게 되었고 나의 모자는 철사 부분을 하도 많이 구부렸다 폈다 하여 세 군데나 부러지고 말았다. 그러고 나니 챙의 모양이 잡히지 않아 착용하기에 매우 불편했다.
우리는 계속해서 쓸만한 모자를 찾아다녔다. 가는 곳마다 모자를 파는 곳이라면 전부 보고 다녔다. 어쩐 일인지 캡cap은 많아도 햇hat이 없었다. 우리가 찾는 것은 챙이 넓고 턱 끈이 있고 통풍이 잘 되는 햇이었는데 그런 햇을 찾기가 너무나 어려웠다.
그러던 중 조지아 트빌리시에 도착하자마자 숙소 바로 앞 시장에서 이 모자들을 발견한 것이었다. 딱 보기에도 우리가 찾던 디자인이었고, 써보았을 때에도 마음에 들었다. 이런 모자를 찾기가 너무 어려웠기에 가격이 어떻든 일단 사야겠다는 마음으로 가격을 물었다. 5라리 란다. 5라리면 얼마야, 2,000원 조금 넘는데....?! 헐 대박!!!
즉시 두 개를 샀다. 모자를 전문으로 파는 상점도 아니었기에 그의 것과 나의 것, 딱 두 개만 남아있던 것을 둘 다 업어온 것이었다.
쓰고 다니면서도 이 모자는 우리에게 최상의 만족감을 안겨주었다. 모자 윗부분이 망사로 되어있어 걸어다닐 때마다 바람이 송송 통했고, 햇빛으로부터 우리의 얼굴과 목 주변을 완벽하게 가려주었다. 한국에서 5만원에 육박한 값에 구매했던 첫 번째 모자보다 더욱 만족스러웠다.
그 모자를 잃어버린 거였다. 그것도 두 개 다.
'됐어, 처음부터 이 모자랑은 인연이 아니었던 거야.'라고 생각하려고 애썼지만 너무나 정이 갔던 모자라 쉽게 잊혀지지 않았다. 숙소를 찾아가는 발걸음이 무거웠다.
얼른 떨쳐버리자고 설득하던 그도 못내 아쉬워하며 "버스 종점이 여기서 그렇게 멀지 않은데 거기 가볼까? 2km 정도 떨어져있어." 했다. 솔깃했지만 회의적이었다. 일이 끝난 버스들이 종점 근처에 모여있는 경우도 있지만 다른 곳으로 이동해 있는 경우도 있고 그 버스가 종점에서 회차하여 다시 다른 방향으로 가고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숙소에 도착해 호스트 P와 인사를 나눔과 동시에 우리는 모자에서 버스를 두고 내린 이야기를 그에게 했다. 그는 아마 버스들이 종점에 모여있을 거라고 하며 원한다면 차로 그곳까지 같이 가봐줄 수 있다고 했다.
이건 정말이지 상상도 못했던 전개였다. P가 그곳까지 함께 가준다면 너무나 고마운 일이었다. 우리는 정말 고맙다고 말하고 그의 차에 올라 탔다.
종점에 도착하니 버스가 여러 대 정차되어 있었고 그 옆에는 사무실로 보이는 작은 컨테이너 건물이 있었는데 그곳에는 아무도 없는 것 같았다. 일곱 시가 넘어 사무실이 문을 닫은 것이다. 일단 전화번호라도 알아두었다가 내일 전화라도 해보려고 문 앞에 적혀있는 번호를 사진으로 찍었다.
아쉬운 마음으로 버스들을 둘러보는데 초록색 버스들 사이에 딱 한 대 있는 흰색 버스가 눈에 띄었다. 짐을 넣고 빼던 기억을 돌이켜보았을 때 우리 버스는 흰색이었다. 혹시나 저 차가 우리가 탔던 차인가 해서 버스 앞으로 가 보았다. 버스의 문이 닫겨있어서 들어가볼 수 없었고, 선반 위는 창문을 통해서 볼 수 없는 위치였다. 그렇게 버스 주변을 어슬렁거리고 있었는데 거짓말처럼 버스 안쪽 어두운 곳에서 기사님이 성큼성큼 걸어나오시는게 아닌가. P가 얼른 운전석 창문 쪽으로 가서 기사님께 우리의 사정을 설명했고, 그는 바로 문을 열어주었다. 기사님은 우리를 데리고 버스 안으로 들어가며 그의 오른손으로 앞좌석부터 뒷좌석까지의 선반을 모두 훑어주셨고, 버스 중간쯤 갔을 때 그의 손에 집혀 나온 것은 우리의 모자였다.
(우와아아ㅏ아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ㅇ악!!!!!!!!!!!!!!!!!! 모!!!!!!!!!!!!자!!!!!!!!!!!!!!!!!!!!!!!!!!!!)
기쁨에 날뛰며 괴성을 마구 지르고 싶은 욕망을 억누르고 최대한 사람 같은 목소리로 기사님에게, 그리고 P에게 감사를 전했다. 숙소로 돌아가는 차 안에서도 우리는 고맙다는 말을 쉬지 않았다. 그는 거듭 괜찮다고, 다행이라고 하며 모자가 정말 고급스럽고 좋아보인다고 말했다. 이 아이들이 고작 이천 원 밖에 하지 않는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숙소 돌아가는 길에 P가 물었다. 자신이 친구를 만나러 항구 쪽으로 나갈 건데 우리도 혹시 그쪽에 갈 거면 태워다 주겠단다. 그곳이 어디냐고 물으니 관광객들이 오면 주로 가는 메인 항구라고 한다. 사실 우리는 오늘 아침에 비행기도 타고 세 시간 짜리 버스까지 타고 이곳에 온 것이라 저녁에는 그냥 쉬려던 참이었다. 그런데 대중교통을 타고 가야하는 곳을 이 친구가 데려다준다고 하니 좋은 기회인 것 같기도 하여 가보겠다고 말했다.
집에 들어가 짐을 챙기고 기다리고 있으니 P의 친구가 차를 갖고 P를 데리러 왔다. 우리는 그 차에 함께 올라 항구로 향했다. P의 친구는 조금은 어눌한 영어 발음으로 우리의 여행에 대해 물었고, 세계여행 중이라는 이야기를 듣고는 정말 신기해하고 부러워했다.
항구에 거의 다 와서 P는 우리가 석양을 바라보며 걸을 수 있게 해주겠다며 번화가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세워주었다. 때마침 해는 예쁘게 기울고 있었고 우리는 예상치 못한 풍경을 마주했다.
지는 해가 만들어내는 특유의 고즈넉한 공기 속에서 사람들은 해수욕을 즐기고 있었다. 왼쪽에는 청명한 바다가 펼쳐졌고, 오른쪽에는 바다를 보며 음식과 술을 즐길 수 있는 공간에서 한가로운 저녁을 보내고 있는 이들과, 춤과 노래를 선보이는 직원들이 있었다. 선베드에 누워있는 사람들, 간편히 입고 조깅을 하는 사람들, 우리처럼 그저 풍경을 벗삼아 느린 걸음으로 산책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노을은 이 공간의 모든 것들을 붉고 노란 색채로 물들였고 그 빛을 받은 모든 것들은 더 따뜻해지고 온화해졌다.
우리는 파포스와 사랑에 빠졌다.
2018.06.05.
세계여행 Day 5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