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y 83] 부끄러운 마음을 고백하며
나는 왜, 그렇게 오랫동안, 이렇게 멀리 떠나오는 것을 바라고 꿈꿔왔을까.
아마 내가 그토록 원했던 것은 살아있다는 느낌이었을 것인데. 그리고 또한 자유였을 것인데.
내가 가진 많지 않은 돈으로 할 수 있는 한 최대한으로 자유로워 보는 것. 모든 가능한 순간들에 나를 던져놓는 것. 그 안에서도 나는 산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을 것인데. 나를 잘 살게 하겠다는 이유로 나를 옭아매는 세상적인 그 모든 기준들은 결국에는 나를 죽일 뿐, 나는 그 모든 것이 없이도 한 없는 자유 속에서도 존재하고 살아간다고, 그 사치스러운 행복까지도 느끼면서 나는 잘 살 수 있다는 것을 내 자신에게 증명하고 또 증명하는 것이었을 텐데.
나는 그것을 잊고 말았다.
내가 살아가면서 할 가장 현실적인 결정 중 하나일 결혼이라는 것을 하며, 그 안에서 만나는 모든 현실적인 순간들에 남들 보기 좋게 대처하며 일을 치뤄내느라 나를 잃어갔던 것일까. 체력적으로 많이 지쳐서 몸 편한 삶을 동경하게 된 것일까. 내가 가진 모든 것이 기적 같고 감사했던 이전과 달리 내가 가지지 못한 것이 더 크게 보여버린 못난 나를 마주했다. 한국에서 안정적이게 자리를 잡아 생활하고 있는 사람들을 부러워하는 내 자신을 마주했다. 현재의 나와 비교할 것은 오직 과거의 나 밖에 없었고, 학교 다닐 때에도 내 경쟁 상대는 오로지 지난 시험을 치른 나 자신 뿐이었던 내가, 어떤 이유에선지 달라져있었다. 날 향했던 시선이 남을 향해 있었다.
여행이 시작될 때에는 막연히 설렜다. 오랜 시간 꿈꾸었던 그 순간 안에 내가 있다는 것, 그것이 나를 움직이게 했다. 그 마음은 금방 무뎌져버렸다.
무거운 배낭을 메고 2~3일에 한 번씩 잘 곳을 찾아다녀야 하는 삶이 석 달 가까이 지속되고 있었다. 힘겹게 찾아서 들어가면 어디는 침구가 더럽고 어디는 와이파이가 잘 되지 않고 어디는 모기가 너무 많았다. 한 번은 같은 방의 사람들이 방 안에서 미친짓을 하는 바람에 한숨도 자지 못하고 새벽에 도망나와야 했다. 설사가 멈추지 않아 이십 분에 한 번씩 화장실을 가야하는 때에도 옆 침대에 덩치 큰 남자가 있어 남편에게 일층을 주고 나는 기어코 매번 사다리를 타고 이층침대를 오르내렸다. 숙소를 찾아 가는 길, 14키로의 배낭을 들쳐메고 최소 이십 분, 최대 한 시간까지도 걸어가며 나는 지나가는 차들을 보았다. 차를 타고 가면 훨씬 빠르고 편할텐데, 현재의 우리 능력으로도 작은 차 한 대 쯤 충분히 살 수 있었을텐데, 나는 왜 차를 사는 대신 이 고생길을 택했는가, 생각했다.
나는 힘들었다. 안락하고 안전한 집이 있는 사람들이, 어디든 편하게 갈 수 있는 자가용이 있는 사람들이, 사고 싶은 옷이 있으면 가방 무게가 느는 것을 고민하지 않고 살 수 있는 사람들이, 냉면과 떡볶이를 마음껏 먹을 수 있는 사람들이, 돈을 벌고 그 돈을 버는 족족 모을 수 있는 사람들이, 아니 열심히 모으지 않아도 그냥 넉넉해서 집도 차도 있고 호텔도 마음껏 갈 수 있는 사람들이 부러웠다. 몸이 힘들어서 마음이 힘들어진 건지, 마음이 힘들어서 몸이 더 힘든 것인지, 어쨌든 나는 힘든 시간을 보냈다.
바닥까지 못나진 나를 남편에게 드러냈다. 요즈음의 마음이 불편했던 부끄러운 나를 고백했다.
그는 외유내강의 성격이라 겉으로는 한없이 온유하고 모든 것을 수용하는 듯 보이지만 그의 내면은 그 무엇도 다치게 할 수 없고 무엇도 흔들지 못하는 강인함이 있다. 언제든지 내가 약해지는 순간이면 나는 늘 같은 모습으로 중심을 지키고 서 있는 그의 굳건함에 기댄다.
그는 언제나처럼 한참을 별 말이 없이 내 말을 들어주었다. "그런 생각을 했었구나... 그렇지만 누군가는 우리의 삶을 못견디게 부러워할 걸." 정도가 그가 말한 것의 거의 전부였다. 그의 차분한 그 한 마디는 나의 어딘가를 퉁 하고 때렸다.
생각해보니 그랬다. 다른 누군가를 생각할 것도 없이 지금 나의 모습은 몇 년 전의 내가 참 부러워했을 삶이었다. 나는 내가 그토록 원했던 것을 가진 거였다.
어쩜 사람은 이렇게도 약한 존재일까. 가진 게 아무리 많아도 내가 가지지 못한 것이 보여 마음이 불편해지는 이 추함은 언제 다 극복해낼 수 있을까. 죽음의 문턱 앞에서 다시 삶이 허락되었던 경험들을 통해 내가 살아있으며 느끼는 모든 것들에 경이로워하던, 그때의 그 감정을 왜 나는 자꾸 잊는 것일까. 나는 왜 자꾸 내게 주어진 이 모든 축복된 순간들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교만을 저지르고 마는 것일까.
남편과 그 대화를 하고나서 나는 무언가 나를 어둡게 덮고 있던 것들이 한꺼풀씩 걷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지금의 있는 그대로를 느끼지 못하게 했던 그 모든 장치들이 하나씩 없어지는 듯 했다.
알바니아에 온 지금, 몸이 약해진 하루를 한 두 개쯤 더 겪고 난 후 나는 정신이 온전하게 맑아지고 있는 것을 느꼈다. 아침에 눈을 떠 하루를 시작할 수 있는 것, 내 팔다리가 아무 문제 없이 움직이는 것, 밥을 먹었는데 배가 아프지 않은 것이 벅찬 환희로 다가왔다. 오늘도 내 옆에 있는 이 사람이 못견디게 감사했고 그저 있어주는 것만으로 깨물어주고 싶을 만큼 사랑스러웠다. 내가 오늘 이 아름다운 곳에 있을 수 있다는 것, 이 아름다운 곳을 보고 듣고 느낄 수 있다는 것이 기적 같았다. 밉고 못난 생각을 했던 나를 인정하고 다시 거듭날 수 있게 해주신 이 기적도 눈물나게 감사했다.
왜 이 좋은 걸 못 봤을까, 못 느꼈을까. 나는 지금 잡은 이 마음을 정말 무슨 수를 써서라도 지켜내고 싶다고 생각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 좋은 거라, 내가 어디에 있든 어떤 상황에 있든 행복할 수 있는 프리패스 티켓 같은 거라, 절대 놓치고 싶지 않았다.
여행이 시작된지 80일이 넘은 지금에서야 나는 비로소 자유하다. 신이 주신 내 심장으로 신이 주신 이 세상에서 활기차게 살아 숨쉬며 존재하고 이 모든 아름다운 것들의 넘쳐 흐르는 아름다움을 온전히 느끼며 누리고 있다.
나는 약하기에 또 언제 탁해질지 모르지만 나를 만드신 그분은 세상에서 제일 강하기에 계속 기도하며 나아갈 것이다. 지금의 맑은 느낌을 간직하기 위해 기도할 것이다.
이 마음 그대로 여행을 마칠 수 있다면 더 바랄 것이 없다.
주님이 사랑으로 가꾸신 이 땅이 얼마나 아름다울까
내가 가보지 못한 곳에도 간절하게 사랑하시는 그분의 마음이 얼마나 묻어있을 것이며
그 모든 것들이 얼마나 눈물나도록 예쁠까
그 기대에 가득 찼던 2015년
내가 처음으로 세계여행을 꿈꿨던 그때의 그 마음,
3년을 지나오며 많은 일들을 겪어내느라 흐려지고 덮여졌던 그 마음이
감사하게도 다시 내 안에서 살아나고 있다.
"내가 그토록 원했던 것은 살아있다는 느낌이었을 것인데. 그리고 또한 자유였을 것인데.
한 없는 자유 속에서도 존재하고 살아간다고, 그 사치스러운 행복까지도 느끼면서 나는 잘 살 수 있다는 것을 내 자신에게 증명하고 또 증명하는 것이었을 텐데."
2018.07.01.
세계여행 Day 8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