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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ㅇㅈ Aug 14. 2019

<밀회> 안판석

Interview

Q 피아니스트 손열음 씨가 <밀회>에 대해 쓴 글은 보았나?

Ahn 손열음 칼럼을 예전부터 너무 좋아했다. 사실 손열음 씨의 말대로 선재가 ‘하늘에서 뚝 떨어진 천재’는 아니지 않은가. . ...... 천재에 관한 정의 중 ‘주저 없이 본질로 접근하는 재능’이라는 표현이 무척 합당하다고 생각하는데, 선재는 말을 할 때도 에두르는 법이 없다. 심지어 어떤 경우에는 ‘또라이’ 소리를 들을지언정.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그게 결국 자기 눈으로 세상을 보고 자기 머리로 생각을 하고 자기 입으로 자기 말을 한다는 거다. 그게 천재다. 거기에 상투성이 개입되면 천재가 아니다. 온전한 자기 자신이 천재가 될 수 있는 거다. 설혹 틀릴지 몰라도 지금은 자신을 믿는다는 것. 똑같은 사람 만 명 중 하나라면 그게 무슨 의미가 있겠나. 유일해야지. 인간이 유일하려면 줄넘기를 한 번에 백만 번씩 할 필요도 없고 그저 자기 자신이기만 하면 된다. 자기 자신으로서 진실되기만 하면 유일무이한 거다. 그게 천재다.


Q. 8회에서 마침내 선재와 혜원이 처음으로 육체관계를 가지는 장면의 독특한 연출은 화제가 되기도 했는데.

Ahn  그 장면이 참 좋았다. 원래 대본에는 어떻게 묘사되었냐면 ‘뜨거운 열기, 방안의 사물들도 슬쩍 눈감아주는 것 같다. 이하 오디오만, 비디오는 형용불가.’라고 돼 있었다. 사물들이 슬쩍 눈감아 주는 것 같다고 되어있는 걸, 나는 마치 디즈니 만화처럼 사물들이 의인화되어있는 모습으로 상상했다.  

... ..

사실 사랑하는 남녀가 처음으로 관계를 맺는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평소에는 화장실에서 볼일 보다가 누가 들어오기만 해도 흠칫하지 않나. 사귀는 사이라고 해서 늘 되는 것도 아니고, 알게 모르게 전 세계가 도와주는 교묘한 순간에 이루어진다. 사물들까지 도와줘야 가능한 거지. 그렇게 어려운 것이다.

... ... ....


애초에 이 작품을 할 수 없다고 한 이유는, 마흔 살 먹은 여자와 스무 살 먹은 남자가 진실된 사랑을 한다는 게 판타지스럽기 때문이었다. 이걸 납득시킬 자신이 없었다.  스토리 전개에 직접적인 도움이 되지 않는 리얼리티지만 시간을 들여서 보여줘야 할 장면들이 있다.


Q. 구체적으로 어떤 장면들일까?

Ahn  혜원과 선재가 처음 만났을 때. 서로가 서로를 알아보는 장면이다. 그 장면이 가장 중요하다고 봤다. 스무 살 먹은 남자가 마흔 살 먹은 여자를 힐끗힐끗 쳐다보는 게 자연스럽도록 연출하는 것.


Q. 그 장면에서 선재가 반하는 것은 단순히 혜원의 여성적인 매력 때문만이 아니라 그녀가 자신의 재능을 알아봐줬다는 인정욕구의 충족에서 비롯되었다는 점에서 설득력을 가지게 된 것도 같다.

Ahn 그렇다. 그 대목을 두고 정성주 선생과 이야기하다 그런 말을 한 적이 있다. 과거 시인이었던 영화감독 유하가 내 대학시절 친구다. 어느 날 수업시간에 나란히 앉아 있는데, 듣기 싫은 수업이다 보니 걔는 연습장에 그림을 그리고 있더라...... 그 시를 보고 유하에게 진지하게 얘길 해버렸다. 이러이러한 이유로 참 잘 쓴 시라고. 그러자 얼굴이 빨개지더니 중학교 때부터 시를 써왔다고 고백하면서 자기가 쓴 다른 시들을 보여줬다. 참 오묘한 순간이다. 우연히 시를 보고 내가 진지하게 평가를 해 준 순간 그의 내면에서 뭔가가 확 열려버린 거다. 그리고 그게 걔의 운명을 바꿨다.


Q 어쨌든 연주 장면 때문에 이전의 드라마들에 비해 작업시간은 몇 배가 들었을 것 같다.

Ahn  .... .... 작품이기 때문에 한 사람의 시선이 중요하고, 일관성이 중요하다.  .... 또한 모든 예술은 휴머니즘을 위해 존재하는 건데 현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인권이나 일상의 행복이 무시되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철저하게 쉴 시간을 주고, 잘 시간을 주고, 씻을 시간을 주고, 노닥거릴 시간을 주고. 그걸 지키는 게 첫 번째 목표다. 내가 잘 한 것은 그걸 지켰다는 거다. 그걸 자랑하고 싶다.

.

Q. 가능했던 이유가 무엇일까? 물리적으로 공이 많이 들 수밖에 없어 보이는 작품인데.

Ahn  아까 말했던 것들이다. 음악을 얼마만큼 써야 하는가라는 질문이 왔을 때, 확실하게 결정을 내리는 것. 2~30초라는 식이 아니고 22초. 틀릴 수도 있다. 하지만 한번 실수하면 그 감각이 몸에 새겨진다.


 Q. 그렇듯 정교한 예측치 또한 경험을 통해 이루어진 것일 텐데.

Ahn  27년을 했다. 조연출 첫날부터 쌓인 게 여기까지 온 거다. 만약 처음부터 “엑스트라는 2~30명 정도?” 이런 식으로 대충대충 판단해 왔다면 10년, 100년을 해도 늘지가 않았을 거다. 한번이라도 결과에 구체적으로 책임을 져 보면 그 다음부터 같은 실수는 없다.


출처 : 맥스무비

http://news.maxmovie.com/127961


http://news.maxmovie.com/127962

http://news.maxmovie.com/127963




 “테두리를 벗어나는 게 불안해서 옴짝달싹 못하고 있는 인간은 영원히 거기서 벗어날 수 없는 걸까요?” 불가능하지는 않겠지만 특별한 계기가 필요할 것 같다는 대답에,  “<밀회>는 한 마디로, 거기서 벗어나는 게 그만큼 어렵다는 이야기에요. 오혜원(김희애)이 나이 사십에, 내가 어디 서 있는지 내가 문제인지 사회가 문제인지 사회가 문제라면 나는 얼마나 공범 노릇을 했는지 깨닫게 되죠. 그걸 박차고 나가는 건 불가능에 가까워요. 하지만 그렇다 해서 그 채로 체념하고 산다는 건 얼마나 소름끼치도록 무서운 일인가, 그러니 보는 사람에게도 그걸 박차고 나가겠다는 희망 혹은 추동력을 심어주고 싶었어요. 오혜원에게는 이선재(유아인)가 바로 그 어마어마한 계기인 거죠.”

Q ‘고결한 사람’이라고 하셨는데, 함께 일하는 데 있어 능력만큼이나 성품도 중요하다고 생각하시나요?

안판석: 물론이죠. 정 선생은 아마 그렇게 말한 걸 알면 날 죽이려고 들 거예요. (웃음) 남에게 지나친 칭송을 받거나 자신이 밖으로 자꾸 드러나는 걸 견디지 못하는 사람이에요.

Q. 다만 그 사람이 세상과 관계 맺는 방식이 남달랐던 것뿐이라고 보시는 건가요?

안판석: 베토벤은 괴팍했는데 음악만 아름다웠다는 얘기도 있지만, 나는 그가 인품도 훌륭하고 사고도 깊은 인간이었을 거라고 생각해요. 그렇지 않았다면 그렇게 아름다운 음악을 만들 수 없었겠죠. 아주 섬세한 예술가들 중에는 너무도 예민해서, ‘사짜’를 잘 못 견디거나 재수 없는 인간과 앉아 있는 걸 정말 힘들어하는 사람이 있어요. 그들의 얼굴에서 불쾌감을 목격한 누군가는 밖에 나와 그 사람을 씹겠지. 일면만 보고 ‘막 산다’고 비난할 수도 있고.

드라마나 연극도, 보는 사람들이 등장인물의 인생 전반에 연민을 느껴야 해요. 아리스토텔레스는 연민이 감정을 정화시키는 카타르시스를 만들어낸다고 했는데, 그게 드라마의 중요한 역할이라고 생각해요. 자꾸 씻어내면 사람이 착해지니까.
 

Q. 드라마의 재미와 윤리적인 측면은 결국 같이 간다고 생각하시나요?
안판석: 당연히 그렇다고 봐요. 공자 왈, 맹자 왈 해야 윤리적이라는 게 아니라 드라마는 무조건 인간의 고통을 다루는 거예요. 단 하나, 그 고통과 결부되어 얻는 인생의 통찰을 다루는 거기 때문에 윤리학과는 뗄 레야 뗄 수가 없는 거죠. 그런데 그게 왜 이렇게 재미있는지, 참 신기하지요. 모든 인간에게는 순정이 있기 때문에 ‘내가 잘못 사는 게 아닐까? 나도 좀 나아지고 싶은데 어떡하지? 내가 그렇게 했으니 죽일 놈인가?’ 같은 죄책감, 쓸쓸함, 허무함을 혼자 껴안고 살아요. 그러면서도 그걸 누군가와, 혹은 무언가와 민망하지 않게 교묘히 탐구하는 시간을 갖고 싶어 하죠. 어떤 사람에겐 그게 소설이고, 누군가에겐 영화고, 또 많은 사람들에겐 드라마인 거예요. 그러니까 드라마를 본다는 건 사실 참 의미 있는 시간이라고 생각해요. 중요한 건 드라마를 통해 답을 제시하는 게 아니라 인간을 의문 속으로 빨려 들어가게 하는 거죠.

Q. “보는 사람은 대충 보더라도 드라마가 ‘작품’이라는 생각은 포기할 수 없다”고 말씀하신 것도 비슷한 맥락일까요?
안판석: 이 직업이 엄중한 직업이란 생각을 가지고 있어요. 드라마에서 윤리를 보여주려면 그것을 자기가 겪은 것처럼 느끼게 해야 하고,

Q. 마지막으로, 앞서 말씀하신 평생의 테마를 가지고 <밀회> 이후의 작품을 만드신다면 여전히 풀리지 않는 의문이 있기 때문일까요.
안판석: 조금 거창하게 말하면, 시지프스의 신화 같아요. 시지프스가 바윗덩이를 산 정상으로 굴려 올리면 도르르 굴러 떨어져요. 그럼 또 내려가서 굴려 올리죠. 그 사이 0.00001초 정상에 오른 순간이 있는데, 모든 세계에는 누군가의 어떤 행위에 의해 0.00001초의 정점을 맛볼 수 있는 순간이 있어요. 어차피 영원히는 안 되는 일이죠. 인류의 역사에서 행복하기만 한 시간이 어디 있어요. 우리가 역사책을 봐서 알고 있듯 늘 싸우고 고통과 비탄 속에 있었죠. 하지만 멈춰서 한탄만 하는 게 아니라, 안 되는 줄 알지만 그래도 끝까지 해보겠다고 하는 데 진정한 인간성이 있어요. 그리고 끝까지 돌을 굴려 올리다 보면 옆에서 같이 굴려주는 놈들이 생겨요. 그들과 함께 느끼는 연대감, 그걸 통해 맛보는 고통 속의 행복이 참 아름답고 중요한 거죠. 세상이 어떻게 되는지는 알 수 없고, 설혹 좋은 세상은 안 온다 해도 그 짓을 끝없이 하는 거예요. 어느 놈은 기사로, 어느 놈은 드라마로, 어느 놈은 밀가루 반죽 가지고 안 되는 일을 끝까지 하는, 그게 인간성이에요. 나도 인간으로 태어났으니 돌을 굴리는 거예요. 이번에 연습 했으니까 다음엔 좀 더 잘 굴리지 않겠어요? 좀 더 오래 멈춰 있게, 그거 한 번 해 보려고.

사진. JTBC

http://m.ize.co.kr/view.html?no=2014060417077249879





드물지만 노래를 듣다가 부른 가수보다 노랫말을 누가 썼는지가 궁금해지고. 드라마를 보며 배우작가보다 연출한 사람이 누구인지 찾아보게 될 때가 있다. 작사가 중엔 윤종신님이 그랬고 연출가 중에선 안판석님이 그랬다.
영화도 드라마도 새로운 걸 부지런히 찾아보거나 시작한 영상을 끝까지 보는 힘은 한참 부족해도 좋아하는 몇가지를 정말 오래 두고두고 꾸준히 돌려는 편판석 감독님이 연출한 드라마도 그 중 하나였다. 순전히 극의 분위기때문에, 그 분위기가 주는 안정감, 따뜻함, 아름다움 때문에.

  밀회라는 드라마는 내가 스물세살, 대학교 마지막 학년에 방영했다. 그 때 공부 끝나고 집에 돌아와 자기 전에 한 편 씩 아껴보곤 했는데 당시 같은 방을 쓰던 친구는 이 드라마가 너무 어두워 싫다 했다. 또 인터넷 상의, 꽤나 많은 수의 혹자들은 이런 불륜 미화 드라마는 방영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모두 나름 이유가 있는 말이겠지만 내게 이 드라마는 따뜻하고 아름다웠다.


비로소 자신을 알아봐 주는 이를 만났을 때의 설렘, 드물게 찾아 오는 그 황홀함. 그리고 이를 매개해주는 피아노 선율.

 

어쩌면 예술이 오묘한 건. 어떤 사람에게 어둡고 우울하게 느껴지는 작품이 또 어떤 사람에게는 따뜻하게. 그리고 아름답게 느껴질 수 있기 때문.

그리고 그 와닿음은 참 신기하게도, 많은 부분 그가 느끼는 결핍에서 기인한다는 점이다.  누군가의  있음 이 아니라, 누군가의 '없음'으로 인해 한 사람이 느낄 수 있는 지평이 넓어질 수 있다는 것.

그러고 보면 한 사람의 일생에 있어 가장 강렬한 순간, 누군가의 영혼을 뒤흔드는 경험은  대체로 그의  없음을 가장 강하게 건드리데에서 오는 것일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다. 묘하기도 무섭기도. 희망적이기도 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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