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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저미생 Oct 05. 2024

#4 생사의 고비를 넘은 우리

출산과 동시에 완치된 임신중독증과 진급 걱정병

고비는 넘겼지만, 상황이 해결된 건 아니었다.

임신 중독증의 완치 방법은 출산뿐이나, 주수가 적어 아이를 좀 더 뱃속에서 키워야 했기 때문에

이때부터 내 몸의 병과 아이의 생명 사이에서 줄다리기가 시작되었다.


이틀 간격으로 차로 30분 거리의 대학 병원에 진료를 보며 아이가 살아있음을 확인했고,

혈압을 루 3번 측정해 혈압 수첩에 기록했다.

매일 일정한 시간 아스피린을 챙겨 먹으며

출혈이 일어나지 않도록 조심해야 했고

(아스피린을 먹으면 혈류가 좋아져 출혈 시 피가 잘 멈추지 않는다.)

무리한 신체 활동 금지, 정신적인 스트레스를 받아서도 안 됐다.


진급 걱정에 끝까지 고민했지만 아이를 지키는 것이 우선이었기에, 파트장에게 바로 이 상황을 알렸다.

출산은 예정일과 관계없이 언제든 이루어질 수 있고, 나와 아이의 상황에 따라 급박하게 진행될 수 있으니 미리 후임자 선정과 인수인계 준비를 해달라고 요청했다.

후임자는 생각보다 빠르게 선정되었고 인수인계는 순식간에 진행되었다.


상황은 좋지 않았지만, 불행 중 다행으로 나의 임신중독증은 다른 산모들에 비해 굉장히 더디게 진행되었다.

20주에 시작된 임신중독 의증은, 34주가 되어서 확진되었고 평가 시즌인 12월엔 재직 상태로 남을 수 있게 되었다. 

이때 비로소 진급에 대한 걱정을 조금 놓을 수 있었다. 육아 휴직 상태가 아닌 재직 상태라면 나에게 평고과를 날릴 순 없을 거라 확신하며 출산에만 집중하려 노력했다.


36주, 임신중독증으로 산모의 몸이 더 이상 임신을 유지할 수 없다는 의료진 판단으로 나는 출산했다.

아이의 몸무게는 1.6kg로 평균 신생아 몸무게의 정확히 반절이었다.


코로나로 면회도 자유롭지 못해 출산 후 5일 만에 처음 마주한 아이의 모습은 처참했다.

제대로 영양 공급을 받지 못해 채 굵어지지 못한 팔뚝과 다리, 살가죽을 뚫고 꽂혀있는 주삿바늘들,

입천장에 붙어있는 고무관, 온몸에 덕지덕지 붙은 반창고까지...


인큐베이터 속에 누워있는 안아볼 수 없는 가녀린 아이의 몸을 마주했을 때,

'우리가 어려움 속에서도 잘 버텨 이렇게 서로 만날 수 있게 되었구나!'라는 감동은 느낄 새도 없이,

나의 진급을 향한 걱정과 마음의 무거움이 아이를 이렇게 만든 건 아닐까 죄책감이 쓰나미처럼 몰려왔다.


아이가 중환자실에 있는 한 달 동안 가장 답답했던 건, 내가 해 줄 수 있는 것이 없다는 것이었다.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엄마의 사랑을 느낄 수 있도록 열심히 모유를 유축해 가져다주는 것뿐이었다.


세상에 나온 아이의 존재감은 뱃속에 있을 때와는 다른 차원의 것이었다.

사람들은 이 모든 상황이 그저 벼락을 맞는 것과 같은, 이유 없이 찾아온 우연한 불운이라며 나를 다독였지만 이렇게 소중한 존재가 될 줄 알았다면, 임신 기간 동안 그렇게 진급 걱정하며 보내지 않았을 거다.


아이가 태어나고 임신 기간 내내 불안했던 진급에 대한 생각은 하나도 떠오르지 않았다.

"진급? 하면 좋고 아니면 말지!" 아이를 마주한 후 완치된 건 임신중독증 뿐만이 아니었다.

7개월여간 괴롭혔던 나의 진급 걱정병도 함께 완치되어 이내 내 마음은 평안과 안정을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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