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생사의 고비를 넘은 우리
출산과 동시에 완치된 임신중독증과 진급 걱정병
고비는 넘겼지만, 상황이 해결된 건 아니었다.
임신 중독증의 완치 방법은 출산뿐이나, 주수가 적어 아이를 좀 더 뱃속에서 키워야 했기 때문에
이때부터 내 몸의 병과 아이의 생명 사이에서 줄다리기가 시작되었다.
이틀 간격으로 차로 30분 거리의 대학 병원에 진료를 보며 아이가 살아있음을 확인했고,
혈압을 하루 3번 측정해 혈압 수첩에 기록했다.
매일 일정한 시간 아스피린을 챙겨 먹으며
출혈이 일어나지 않도록 조심해야 했고
(아스피린을 먹으면 혈류가 좋아져 출혈 시 피가 잘 멈추지 않는다.)
무리한 신체 활동 금지, 정신적인 스트레스를 받아서도 안 됐다.
진급 걱정에 끝까지 고민했지만 아이를 지키는 것이 우선이었기에, 파트장에게 바로 이 상황을 알렸다.
출산은 예정일과 관계없이 언제든 이루어질 수 있고, 나와 아이의 상황에 따라 급박하게 진행될 수 있으니 미리 후임자 선정과 인수인계 준비를 해달라고 요청했다.
후임자는 생각보다 빠르게 선정되었고 인수인계는 순식간에 진행되었다.
상황은 좋지 않았지만, 불행 중 다행으로 나의 임신중독증은 다른 산모들에 비해 굉장히 더디게 진행되었다.
20주에 시작된 임신중독 의증은, 34주가 되어서 확진되었고 평가 시즌인 12월엔 재직 상태로 남을 수 있게 되었다.
이때 비로소 진급에 대한 걱정을 조금 놓을 수 있었다. 육아 휴직 상태가 아닌 재직 상태라면 나에게 평고과를 날릴 순 없을 거라 확신하며 출산에만 집중하려 노력했다.
36주, 임신중독증으로 산모의 몸이 더 이상 임신을 유지할 수 없다는 의료진 판단으로 나는 출산했다.
아이의 몸무게는 1.6kg로 평균 신생아 몸무게의 정확히 반절이었다.
코로나로 면회도 자유롭지 못해 출산 후 5일 만에 처음 마주한 아이의 모습은 처참했다.
제대로 영양 공급을 받지 못해 채 굵어지지 못한 팔뚝과 다리, 살가죽을 뚫고 꽂혀있는 주삿바늘들,
입천장에 붙어있는 고무관, 온몸에 덕지덕지 붙은 반창고까지...
인큐베이터 속에 누워있는 안아볼 수 없는 가녀린 아이의 몸을 마주했을 때,
'우리가 어려움 속에서도 잘 버텨 이렇게 서로 만날 수 있게 되었구나!'라는 감동은 느낄 새도 없이,
나의 진급을 향한 걱정과 마음의 무거움이 아이를 이렇게 만든 건 아닐까 죄책감이 쓰나미처럼 몰려왔다.
아이가 중환자실에 있는 한 달 동안 가장 답답했던 건, 내가 해 줄 수 있는 것이 없다는 것이었다.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엄마의 사랑을 느낄 수 있도록 열심히 모유를 유축해 가져다주는 것뿐이었다.
세상에 나온 아이의 존재감은 뱃속에 있을 때와는 다른 차원의 것이었다.
사람들은 이 모든 상황이 그저 벼락을 맞는 것과 같은, 이유 없이 찾아온 우연한 불운이라며 나를 다독였지만 이렇게 소중한 존재가 될 줄 알았다면, 임신 기간 동안 그렇게 진급 걱정하며 보내지 않았을 거다.
아이가 태어나고 임신 기간 내내 불안했던 진급에 대한 생각은 하나도 떠오르지 않았다.
"진급? 하면 좋고 아니면 말지!" 아이를 마주한 후 완치된 건 임신중독증 뿐만이 아니었다.
7개월여간 괴롭혔던 나의 진급 걱정병도 함께 완치되어 이내 내 마음은 평안과 안정을 찾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