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현듯 또 만나
연인 아닌 정인에 가까운 사이
늘 필름 카메라를 들고 나오는 친구
"반지 뭐야? 대박이네"
"껴볼래?"
"응, 줘 보세요"
늦봄 코트 입고 만났던 친구와 늦더위가 기승인 초가을에 얇은 가디건을 걸치고 만났다. 햇빛은 뜨겁고 바람은 시원한 날이었다. 장소는 해방촌 식당. 짙은 남색과 채도 높은 녹색을 조화롭게 매치한 그의 스타일링에 감탄도 잠시. 손을 보니 손가락 한마디를 감싸는 스프링 형태의 반지를 끼고 있었다. 그럼 그렇지. 착용하는 아이템이 늘 재미난 친구라고 생각했는데 기대를 저버리는 법이 없다. 왕반지를 손가락마다 한 번씩 넣어 보고 이건 약지보다 검지에 딱이라는 말로 대화를 열었다. ‘근황은 넣어둬. 액세서리 얘기부터 들어야겠으니까' 우리만의 아이스브레이킹인 셈.
식탁 한 편에는 언제나처럼 카메라가 있었다. 영상을 전공하고 사진을 주요 업(그는 부캐도 있다)으로 삼는 친구는 만남 자리에 약속이라도 한 듯 항상 카메라를 가져왔다. 마치 놓치지 않아야 할 장면을 만났을 때에 대비해 장비를 지니고 다니는 이미지 사냥꾼처럼. 그는 나와 동행하며 마음이 이끄는 순간 셔터를 누를 것이다. 여느 때처럼 나를 포함한 온갖 세상 풍경과 너머의 이야기를 포착할 것이다. 친구는 본투비 창작인이니까.
FW 인간인 나는 여름이 저무는 게 아쉽다는 친구의 면전에 대고 더워 죽겠다는 말을 연신 내뱉었다. 야외에 착석한 터라 햇살이 자꾸 따귀를 때렸다. 땀이 주륵. 끈적이는 나 자신, 너무 싫다. 겨울에는 껴입기라도 하지. 하지만 로케가 마음에 쏙 들었기 때문에 이 정도는 참을 수 있었다. 공복이라 뱃고동이 나만 들을 수 있는 정도의 진동으로 울렸다. 자, 내 위장에 들어올 첫 음식은?
"맥주랑 와인 어디 둘까요?"
아차차. 목을 적실 음료부터 나왔다. 보기만 해도 내장까지 청량한 맥주는 내 앞에, 이름 모를 화이트와인은 친구 앞에 사이좋게 놓였다.
'짠!'
잔 부딪히는 소리는 언제나 경쾌하다.
"너 왜 이렇게 피부색 진해졌어?"
"일부러 태닝했어. 건강해 보이지"
"응 훨씬, 딴 사람 같아."
"넌 머리 그새 많이 자랐네, 엄청 길어"
각자 피부가 한 톤은 짙어지고 머리가 한 뼘은 길어질 동안 쌓인 이야기를 꺼냈다. 휴가를 다녀왔다는 친구의 근황부터 요즘 하는 일에 관한 고민과 지향하는 직업인으로서의 모습, 지난 인연에 관한 이야기까지 나눌 대화 소재가 한 보따리였다. 음식도 하나 둘 눈앞에 놓였다. 정확한 메뉴 이름은 모르지만, 맛은 좋았던 걸로 기억. 바게트도 함께 나왔는데 식감이 겉바속촉의 정석이었다. 주메뉴를 올려 먹기 딱 좋은 조합이었다. 이 맛에 돈 벌지. 먹고 싶은 걸 내 노동의 값으로 등가교환하는 순간 비로소 으른이 됐다고 느끼곤 한다.
'나… 조금 어른이 됐을지도?'
친구는 최근 퇴사를 감행하고 새로운 일에 도전하고 있단다. 두 가지 일을, 아니 그 이상을 야무지게 잘 해내는 당신의 이야기에 응원의 말을 더했다. 남들이 보기에 비효율적일 수도 있겠지만, 시도 자체에 의의를 두면 어떤 경험이든 삶의 자양분이 될 것이라는 대화를 나눴다. 일에 방점을 두더라도 일에 쫓겨 살지는 말자는 작은 다짐과 함께. 또 퇴사한 자신에게서 문제를 찾는 친구에게 회사의 성격과 개인의 성격이 다를 수 있음을 분명히 전했다. 단지 '깔'이 맞지 않았을 수도 있다고. 업무를 맡으며 부족한 점을 문제라고 생각할 수는 있어도 회사를 그만뒀다고 자신을 부정하지는 말자고. 특정 조직에 어울리는 사람이 아니라고 해서 문제가 있다고 볼 수는 없는 거라고. 사실 이 글을 쓰는 순간마저도 마음이 아릿할 정도로 네게도, 내게도 하고 싶었던 말이다.
"앗, 뜨거!"
친구가 햇빛에 뜨겁게 달아오른 금속 의자에 팔등이 닿자 고통스러운 소리를 내질렀다. 밀도 있는 대화를 나누다 보니 친구의 등짝과 내 볼이 벌겋게 익는 줄도 몰랐다. 음식도 다 먹었으니 이만 자리를 옮기자고 했다.
패션에 관심이 많은 우리는 디자이너 브랜드 팝업에 방문해 서로에게 잘 어울리는 옷을 권하고, 엔틱한 주얼리숍에 방문해 주인장과 탄생석에 대한 이야기도 나누는가 하면, 라이프스타일 편집숍에 들러 각자 필요한 생활용품과 선물용 제품을 구매하고, 꽃집에 들러 주홍색 꽃을 사느니 마느니 하다가 이럴 때 기분 내야 하지 않겠냐 따위의 소비 조장 멘트를 던지며 장미와 해바라기를 구입하기에 이른다(나만).
최종 목적지는? 에어컨 바람과 커피가 있는 카페. 와중에 내 배로리는 띠로리. 1%다. 충전이 시급했다. 카페에서 아이스아메리카노와 아이스라떼를 주문했다. 왜인지 술을 거나하게 걸치고 해야 할 것 같은 얘기가 친구 앞에서 술술 나왔다. 친구 역시 마찬가지. 내 앞에서 무장해제 된 사람마냥 본인의 일화와 생각을 훌훌 털어놓았다. 각자의 헐렁하고 서툰 구석을 알아도 밉게 보지 않는 친구. 별나게 굴어도 이유가 있으리라 짐작하는 사이. 서로의 명과 암까지 보듬는 관계. 괜찮다고, 잘하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는 흔한 격려와 칭찬마저 농도가 다른 단단한 신뢰가 대화 기저에 있었다.
귀갓길에 친구가 요즘 해 질 녘 하늘이 너무 아름답지 않냐고 물었다. 동의의 표시로 고개를 힘차게 주억거렸다. 그러고 보니 친구는 간혹 내게 별다른 말 없이 하늘 사진을 촬영해서 보내곤 했다. 장기간 해외에 있을 때는 밤하늘의 빼곡한 별 사진을, 오늘 유난히 날이 쾌청하다며 구름 사진을, 붉게 노을 지는 하늘 사진을 음악과 함께 들어 보라며 유튜브 링크를 보내오기도 했다. 낭만을 아는 사람.
우리 여정이 누군가에게 권해주고 싶은 데이트코스 아니냐며 웃었다. 본투비 섬세한 인간인 친구와 나는 서로의 감도에 맞는 장소를 척하면 척 찾아내곤 한다. 찬 공기가 더운 공기로 바뀌며 다시 선선한 바람이 불어올 때쯤 만남을 가진 우리는 다음을 기약하며 인사했다.
"안녕, 또 만나"
우리는 사랑 가득한 세상을 상상하고, 선한 사람이 이긴다는 문장에 감응하는 사람들이다. 이참에 사랑에 대해 생각해 봤다. 인류애(는 잃은 지 오래지만), 가족애, 친구와 연인 간의 사랑…이 모든 게 사랑 아닌가. 이 원초적인 감정을 네이버 국어사전은 '어떤 사람이나 존재를 몹시 아끼고 귀중히 여기는 마음'이라고 정의했다. 그렇다면 이 또한 여러 형태의 사랑 가운데 하나다.
마음이 통하는 친한 친구가 있어서 행복하다. 이 투박한 문장이 쓰고 싶어서 노트북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