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세계를 맞닥뜨렸을 때
내 현재 직업은 월간지 에디터. 기자라는 직함으로 더 많이 불리지만 여전히 익숙지 않다. 일간지 기자들처럼 취재나 인터뷰도 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책 만드는 '편집자'에 가깝기 때문. 주로 예술, 디자인, 대중문화 등을 소재로 다루며 이 밖의 영역은 단기간에 초인적인 힘으로 지식을 쌓고 취재가 끝나면 잊는다. '내가 뭘 공부하긴 했지' 정도의 잔상이 남는달까. 생성형 AI가 창작 분야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기사를 작성한다고 가정하면 상당한 양의 관련 자료를 면밀히 살펴보고, 이를 말 같은 글로 써낸 후 싹 다 잊어버린다. 업계 동향은 커녕 생성형 AI가 뭔지, 프롬프트가 뭔지 정도나 몇 마디 설명하면 다행이겠지. 언젠가 공부했던 방대한 지식을 클라우드에 보관했다가 원할 때 동기화해서 사용할 수 있는 날이 오기를 바란다. 이 유용한 기술이 대학 수능 볼 때 있었다면 그토록 고통받지 않아도 됐을 텐데. 그리고 난 여전히 수학을 잘했을지도? 직업에 대한 사족이 길었는데 관자놀이가 찢어질 것 같다는 엄살을 부리고 싶을 정도로 골 아픈 일을 하고 있다는 뜻이다. 아, 왕왕 촬영도 한다(+그 외 무수한 잡일). MD가 '뭐든 다한다'의 약자라는 우스갯말이 있듯 에디터 앞에도 M을 달아줘야 한다.
그래도 이 일을 사랑한다. 업계에서 괄목할 만한 포트폴리오를 쌓은 사람들을 만날 일이 잦은데 그들이 들려주는 이야기가 가끔 짜릿할 정도의 쾌감을 준다. 내가 쉽게 감동하는 편이기도 하지만, 유명인들은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마음속에 문장 하나씩 품고 사는 것 같다. 뼛속까지 준비된 사람들 같으니(부들). 사실 앞서 말한 내용은 [일하면서 느끼는 보람] 카테고리의 작은 부분에 속한다. 만나는 사람들은 대체로 유명세를 떠나 인상적인 구석이 있다. 삶의 분명한 지론이 있고, 어떻게 살아야 할지 끊임없이 고민한다. 자신의 작업에 애정(혹은 애증)이 있다. 취재에 응한 사람에게 "당신 얘기 좀 듣고 싶어요~"라고 하면 대부분 "어서 와~ 뭐부터 얘기해 줄까" 같은 열린 태도로 임한다. 게다가 이 대화를 세상 밖에 알릴 기회를 양도 받는다. 내 역할은 누군가의 이야기를 서술하는 일인 셈. 편집자가 손가락을 놀릴 때 신중해야 하는 이유다.
지난 8월 말, 이태원에서 연 음악 플랫폼 론칭 기념 행사에 참석했다. 불특정다수와 살 부대끼는 거 극도로 싫어하는 내게는 쉽지 않은 공연이었지만, 취재라 소중한 주말 시간을 내어 방문했다. 손등에 입장을 위한 보라색 도장을 찍을 때부터 도망가고 싶었으나 그럴 수 없었다. 일이니까. 하지만 나란 인간, 빼더라도 막상 상황이 닥치면 잘 적응한다. 심지어 잘 놀 때가 더 많다. 마침 현장에서 회사 분들을 대거 만나 얼굴에 보라 도장이 묻었다느니 칠칠이라느니 놀림받으며 클렌징티슈 및 화장품을 제공받았다(그날 내 귀인들이었다). 심지어 나는 조깅하고 나온 터라 TPO도 안 맞았다. 모델과 연예인, 업계 관계자들이 양껏 꾸미고 온 자리에 홀로 남루한 차림새였다. 슬쩍 감상하고 집 가면 되는 줄 알았지 뭐야. 일회용 컵에 담긴 '공짜 위스키'를 홀짝대며 집 갈 틈을 노렸다. 보아 하니 타이밍 놓치면 대기 2시간, 본 공연 3시간 이상. 귀가는 자정쯤에나 할 것 같았다. 하지만 계획은 무산되라고 있는 법. 본 공연이 시작되며 어쩌다 맨 앞에 자리 잡게 됐다. 사실 앞이나 뒤나 사람 많으니 피곤한 건 매한가지지만 기왕 잘 보이는 곳이면 좋잖아? 공연은 나잠수, 효도 앤 베이스, 이센스 순이었다. 첫 주자로 넉살과 비슷한 헤어컬을 보유하고 탐나는 그래픽 티셔츠를 입은 나잠수님. 그의 노래는 잘 몰랐지만, 단 하나는 알 수 있었다. 라이브 기절이다... 공연이 마친 후 그의 팬이 됐다. 다음은 효도 앤 베이스. 멤버는 기타 장석훈, 베이스 이재, 드럼 허키 시바세키 셋으로 구성되어 있다. 장석훈님은 나의 최애 가수 크러쉬 곡 피처링을 한 적이 있으므로 이미 알고 있었지. 코앞에서 기타 연주하는 걸 봤는데 '격정적인 연주'란 이런 건가 싶었다. 중간에 기타줄이 끊어졌는데 땀을 뚝뚝 흘리며 공연을 매듭짓는 걸 보고 경이로움을 느꼈다. 마지막 이센스. 우주 대스타였다. 나는 그의 팬이 됐다. 이하 생략.
에디터로 일하며 가장 신명나는 순간이 언제냐 묻는다면 유명인과 조우했을 때도, 유명 행사에 방문했을 때도 아니다. 이는 부수적인 일이다. 인터뷰이와 깊은 대화를 마치고 녹취된 내용에서 마음을 끄는 문장을 길어 올릴 때 즐겁다. 일이 아니라면 접점이 없었을 수 있는 곳에서 나와 다른 세계를 구축하고 있는 이들의 열정을 엿봤을 때 감동한다. 내가 이 일을 좋아하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