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청승이랄까
주말 밤, 회사에서 업무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동네 술집에 들렀습니다. 조금 고급지게 표현하자면 '바'랄까요. 가장 선호하는 다찌 자리에 앉아서 익숙한 올드파부터 주문합니다. 이 술을 계기로 위스키에 입문하게 됐거든요. 이게 다 전 직장 선배 때문(덕분)입니다. 퇴사 선물로 이보다 멋진 선물이 있었을까요? 올드파의 헤리티지에 대한 친절한 설명과 다정한 마음을 담은 편지를 받고 감응해 그날로 '위스키러버'가 됐습니다(차마 알코올 의존증이라는 단어는 붙이고 싶지 않네요). 여하튼 알코올의 힘을 좀 빌리게 됐다는 뜻입니다. 참 편리한 방법 아닙니까? 구구절절 누군가에게 사연을 늘어놓지 않아도 이 술기운이라는 것이 사람 마음을 스르르 녹이고 뇌를 좀 더 유연하게 만들어 주거든요. 그래서인지 잠들기 전 위스키 한 잔이 그렇게 맛지더군요. 둥근 유리잔에 더 동그란 얼음을 넣고 술을 쪼르르. 코를 비집고 들어오는 진한 알코올 향이 정신을 아득하게 만듭니다. 그리고 나름 거금 들여 산 스피커로 음악을 틀고 사르르 잠들곤 했습니다. 인생 좀 피곤하다 싶을 때 간편하게 순간의 번뇌를 끊어내는 방법이거든요. 가끔은 현실에 정면으로 맞서고 씩씩하게 살고 싶다가도 좀 모자라면 어떠냐고 합리화를 합니다. 이 정도의 여유마저 없으면 숨이 턱 막힐 것 같더군요. 회피형 인간처럼 보일 수도 있겠습니다만 나름 살아가는 법을 터득하는 중이라고 어여삐 여겨 주면 좋겠습니다. 이 글을 읽는 누구든요. 최근 지인과 함께 커피를 마시며 이런 대화를 나눴습니다. 글을 쓰는 심리가 참 묘하다고요. 공개된 플랫폼에 잡념을 글로 적는 행위가 결국은 누군가와 연결되고 싶은 심리에서 비롯된 게 아니겠냐고요. 누군가에게 말하고 싶지만 정작 실행에 옮기기 어려운 종류의 생각과 정서를 털어놓는 방식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한때 텍스트 없이 '박명수 짤'로만 대화를 나누는 단톡방도 화제가 되지 않았습니까. 일명 '고독한 명수방'으로 불린 이 서브컬처(라고 생각합니다만)는 꽤나 유쾌한 모임이었습니다. 여전히 있는지 모르겠지만요. 사람 심리가 별나지 않나요? 너와 그렇게까지 알아가고 싶은 마음은 없지만 소소한 생각 공유 정도는 나쁘지 않아. 뭐 이런 심리일까요?
다음 잔은 발베니입니다. '혼자 하는 거 다 잘하는 사람'이라고 스스로 생각했던 저는 근 30여 년 만에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왜냐면 오늘 술맛이 별로더라고요. 얼른 잔을 비우고 집에 돌아가서 쓰고 싶은 이야기가 한가득이었습니다. 직장 다니며 글 쓰는 게 지옥 같은 순간이 간간히 있는데 그건 역시 밥벌이용 글인가 봅니다. 어쩌다 글을 업으로 삼게 됐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입니다. 분명한 사실은 이게 지금 제가 쥐고 있는 가장 큰 밥벌이 수단이자 제 정체성을 말하는 중요한 요소가 됐다는 것이지요. 최근 사수에게 입사 후 처음으로 큰 꾸지람을 들었습니다. 틀린 말 하나 없었지만 정말 삶을 돌아보게 만드는 매운맛 피드백이었습니다. 특히 '직무 유기'라는 단어를 들은 게 가장 큰 충격이었죠. "네 글 구려"보다 무서운 말이 "글로 급여를 받는다면 다시는 이렇게 쓰지 말라"는 말입니다. 심장 쿵, 손 호달달, 동공 지진. 처음엔 수치심과 서러움이 몰려왔지만 쓴소리 역시 애정 아니겠냐고 자위합니다. 이 글을 쓰면서 습관적으로 네이버 국어사전에 '직무 유기'라는 단어를 검색해 봤습니다. 이러쿵저러쿵 수행해야 할 의무가 있음에도 이를 저버리는 것을 의미한답니다. 성실한 느림보인 저는 책임감 하나 내세우고 살아왔는데 이제 뭘 강점으로 삼아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어쩐지 생각보다 회사 생활이 순탄해서 이상하다 싶을 때 이렇게 고난의 역사가 생깁니다. 하지만 이 시대의 직장인이라면 마쳐야 할 업무가 있으니 호딱 세수하고 다시 정신 차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집 가고 싶다'는 생각을 금세 접어두고 급여 모드로 돌아옵니다. 다행히 다음 원고는 순탄하게 넘어간 편입니다. 내용은 재밌다는 옛다 칭찬 한 스푼 정도 들었으니 나름 만족입니다-실제로 나쁘지 않은 원고였다고 생각. 역시 사람은 매가 직빵인가 봅니다. 말로 뚜드려 맞기 싫어서 애쓰는 제 자신이 좀 측은합니다-. 곰곰이 되짚어 보니 상대가 '더 할 수 있는데 안 하는 게 훤히 보였을 경우' 열받거나 실망했던 경험이 생각납니다. 뭐든 조금이라도 기대할 때 그렇지 않겠습니까. 어쩌다 보니 눈 뜨자마자 깊은 반성으로 시작해서 눈 감기 전까지 푸념을 불특정 다수에게 늘어놓고 있습니다. 이 글을 끝까지 읽었다면 당신도 조금 외로운 사람이 아닐까 합니다. 아니면 제 글이 마음에 든다거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