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코인이 꿈꾸던 자유의 城, 카프카가 꿈꾸던 글의 城
프라하를 떠나기 전날도 계속되는 물갈이로 아프기는 했지만 그 아픔마저 익숙해진 상태로 느릿느릿 프라하 명소를 구경했다. 하지만 제일 보고 싶고 기대했던 프라하 성의 내부는 오래 보지 못했다. 오전에 여유를 부리고 오후에는 스트라호프 수도원에서 밍기적거렸기 때문이다.
때문에 프라하 성에 도착했을 때는 내부 관람 가능 시간이 30분 밖에 안 남은 상황이었다. 매표소의 직원은 내일 오는 것이 좋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다음 날은 파리로 떠나야 하기에 '입성(入城)'에 의의를 두고 30분 만에 보기로 결정했다.
입구를 따라 걸었다. 1시간씩 위병대가 교대하는 3개의 입구, 3개의 정원으로 구성된 프라하 성. 제1정원에는 국빈을 맞이하는 장소, 제2정원에는 바로크 양식으로 만든 17세기의 코르 분수와 대통령 관저, 왕궁미술관 등이 있다. 제3정원에는 멀리서도 보이는 14세기 고딕 양식으로 만든 성 비투스 대성당이 있으며 성당 뒷편에는 황금소로가 있다. 프라하 성은 '작은 도시'라고 칭해질 만큼 규모가 컸다.
정문으로 들어가면 보이는 깃발이 있다. 깃발에는 체코어로 '진실은 승리한다'라고 적혀 있다. 이는 체코인의 정신을 담은 문구라고 한다.
제 2정원의 입구로 들어가니 바로 보이는 것은 대통령 관저였다. 시간이 없어서 안에 들어가 보지 못하고 겉으로만 훑고 갔지만 그 모습만은 가슴에 깊이 새겼다. 왜 프라하 성에 대통령 관저가 있는지, 그리고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나는 여행 전에 얄팍하게 공부하여 알고 있었다.
체코는 1600년대부터 1989년까지, 약 500년 동안의 긴 식민 지배 역사를 가지고 있다. 오스트리아(합스부르크) 왕가 → 독일 나치 → 소비에트 연방으로 이어지는 긴 식민지 역사가 그렇다. 500년 간 프라하 성의 통치자가 체코인인 적이 없다는 것이다. 낮에도 밤에도 프라하 시내 어디를 가도 성, 성에서도 중앙에 있는 '성 비투스 성당'이 그리 잘 보이건만 500년 동안 그곳에 사는 사람은 체코인이 아니었다. 체코를 억압하는 타국의 지배자였다. 그걸 매일 상기하면서 살았던 체코인들...
성 비투스 성당(St. Vitus Cathedral)
제3정원을 지나 프라하 성의 정중앙부에 도착했다. 성 비투스 대성당. 길이 124m, 너비 60m, 높이 33m의 건축물로 9세기에 바츨라프 1세의 탑부터 시작해서 14세기 카를 4세가 고딕 양식으로 본격적으로 건설하여 이후 600년 동안 지어 완성한 성당이다. 오른쪽의 탑부터 가장 왼쪽까지 600년. 고딕양식의 성당은 저 둥근 장미창을 중심으로 수많은 창들이 밖에서 볼때는 언뜻 문양과 같이 보이지만 안에 들어가서 보면 스테인드글라스로 한 땀 한 땀 수 놓아져있다. 13세기부터 20세기까지 각각의 시대에 각각의 저명했던 화가들의 각기 다른 작품의 스테인드 글라스. 그런 시간과 역사, 그리고 예술이 담긴 건축물이다. 참고로 가장 최근의 스테인드 글라스가 알폰소 무하의 작품이다.
압도적인 높이와 넓이를 자랑하는 아치형 천정과 그걸 약 800년동안이나 지지하고 있는 기둥, 그리고 다양한 색으로 장식된 창을 통해 은은하게 들어오는 빛하며 약간 축축하면서 서늘한 성당 특유의 공기가 관광객이 득실득실한데도 고요하게 감싸고 있다. 성 비투스 성당 들어가자 마자 한 30초 정도 멍하게 있었다. 갑자기 눈물 날것만 같은 그런 벅찬 느낌이랑 성스러운 기분이 들면서 기분이 완전 묘해졌다. 유럽사람들이 천주교를 모태신앙으로 많이 믿는 이유도 이렇게 아름다운 성당이 도시 곳곳에서 오랜 역사와 함께 자리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카를교에서도, 프라하의 가장 머나먼 곳에서도 보이는 높이로 짓기까지 600년. 왜 이렇게 높게 지었을까? 성당을 높게 짓는 이유는 신에게 더 다가가기 위해서라고 한다. 또한 창문을 크게 내는 이유는 고딕 양식의 특징으로 빛이 가득 들어오게 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빛이 가득 들어오면, 인간이라는 존재는 작아진다. 신 앞에서, 광활한 빛, 자연의 섭리 속에서 인간은 작아진다. 그런 이유로 고딕 양식의 성당은 창이 크고, 다양한 빛의 색채를 위해 스테인드 글라스를 그리고, 높게 짓는다.
성 비투스 대성당에서는 매년 9월 28일 보헤미안 왕국의 바츨라프 왕에게 바치는 미사가 거행된다. 바츨라프는 성당을 처음 지은 인물이자 체코라는 나라를 지키는 수호성인이었다. 성 비투스 대성당 안에도 '바츨라프 예배당'이 있는데 성당에서 가장 중요한 방이다. 왕의 즉위식이 열리던 곳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수백 년동안 매년 9월 28일이면 주교가 직접 10세기의 성 바츨라프 왕의 해골을 들고 미사를 집행한다.
10세기부터 이어져 온 대성당. 보헤미아의 정신. 체코인에게 성 비투스 성당은 지적인 유산이자 영적인 자부심이었을 것이다.
성 비투스 성당을 뒤로하고 황금 소로로 향하는 길로 걸었다. 황금소로는 중세시대 연금술사들이 모여서 황금을 연구하던 장소였다. 그런데 지금의 황금소로가 유명한 건 연금술사 때문이 아니라 프란츠 카프카가 집필활동을 한 곳이 있기 때문이다.
카프카는 황금소로에 있는 여동생의 기념품 가게에서 몰래 글을 썼다. 카프카의 아버지가 글 쓰는 것을 반대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카프카의 진로도 어릴 때부터 법학이니 뭐니 강요했다고 한다. 그래서 카프카는 보험공사에서 일을 하고 나면 아버지 몰래 오후에는 기념품 가게를 하던 이곳에서 소설을 썼다. 프라하 성 바로 인근의 기념품 가게에서.
카프카는 프라하 성을 보면서 소설 <성>을 썼다. 독일계의 유대인 출신가정에서 자란 카프카에게 프라하는 낭만의 도시가 아니고 억압이자 족쇄같은 곳이었지만 체코의 보헤미안 정서와 문화적인 유산들은 그의 작품 속에 많은 영감을 불어넣어 주었다. 간결하면서도 시적인면서도 시니컬하고 현실적인 풍자가 다 녹아있는 문체로 그는 글을 썼다.
카프카의 아틀리에는 지금은 카프카 관련 기념품을 파는 곳으로 바뀌어 있다. 프랑스 사람들이 나폴레옹을 독재자라고 싫어해도 나폴레옹 마케팅을 하듯이 체코 사람들도 카프카는 싫어하지만 카프카 마케팅을 한다.
체코 사람들은 카프카를 왜 싫어할까?
예를 들면 한국의 작가 이상이 일본어를 곧 잘해서 일본어로 시를 썼는데 마치 그 시가 전세계적으로 유명한 시가 되어서 한국을 대표하는 시가 된 것과 마찬가지라고나 할까. 카프카는 체코에서 평생을 살았다. 그런데 대학도 독일어권 명문대학을 다니고(체코가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의 식민 지배를 받을 당시), 법학 전공자에 보험회사다니면서 글도 또 독일어로 썼다. 당시 프라하는 90%의 피지배인이 체코어를 사용했고 10%의 지배층만 독일어를 사용했다. 때문에 독일에서는 자국의 작가 취급을 하기도 한다.
한편으로는 카프카, 그 자신은 작가라고 생각함에도 아버지 때문에, 생계 때문에 자기억압 때문에 평생을 직장에 다니면서 글 쓰고 괴로워하다가 죽었다. 유대인이라서 어디 속하지도 못하고 늘 그렇게 불안하게 살았다. 약혼과 파혼도 한 세 번 했을 것이다. 가정을 꾸리지도 못하고 한번 꽂힌 여성한테는 편지를 300통 넘게 보내고 집착하다가 또 헤어지고를 반복했다.
이렇게 카프카는 가정에서도 사회에서도 늘 이방인으로 살았지만 예술적으로는 자기의 일가를 이루었다. 나처럼 100년 후에 이 사람을 보기위해 찾아오게 하는, 그런 예술적인 마력의 자취를 죽은 후에야 남긴 작가이다.
카프카의 자취를 따라, 카프카를 생각하면서 카프카의 집필실을 지나 황금소로를 빠져 나왔다. 성의 후문. 성에 걸린 깃발을 보았다. 이 깃발에도 '진실은 승리한다'라고 쓰여 있었을까?
체코는 약 500년간 식민지배를 당했다. 마지막 식민지배자였던 소비에트 연방에는 68년 '프라하의 봄'으로 일컫는 민주자유화 운동으로 맞서지만 탱크와 무력을 앞세운 프라하 침공으로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했고 체코인은 다시 익숙한 식민지배의 그늘 속으로 들어갔다. '프라하의 봄'을 잊지 말자는 얀 팔라흐와 얀 자히츠의 분신 자살이 있었지만 그래도 아직 소련의 지배는 혹독했다.
그러던 1985년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소련의 정권을 잡으면서 냉전이 종식되기 시작하였고 그가 펼친 개혁은 공산주의 국가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폴란드의 민주화 운동을 시작으로 체코도 약 5년간 '시민포럼'을 대표로 민주화 운동을 벌인다. 마침내 1989년 11월 시민들은 오랜 세월 반체제 인사로 활동하며 시민포럼을 이끈 '바츨라프 하벨'의 이름을 외치면서 프라하 성의 진정한 주인이 바뀌기를 열망했다. 450여년이 넘는 시간동안 프라하 성의 주인이 체코인인 적이 없었다. 1989년에야 체코인이 프라하성에 입성하게 된 것이다. 체코인들이 그들의 대리인으로 민주화 인사인 하벨을 지목하면서 '벨벳혁명'을 일으켰고 이미 와해된 소련이 물러났기 때문이다.
그렇게 500여년 만에 프라하 성의 주인이 '체코인'이 되었다. 500년 만의 독립.
프라하 성을 보면서 생각한 인문학 단상
카프카도 '체코인이 꿈꾸던 자유'를 꿈꿨던 것은 아닐까?
카프카가 마지막으로 쓴 장편소설 <성>. 카프카는 프라하 성을 보고 <성>을 썼다. 카프카는 <성>을 미완성으로 끝냈다. 미완성이라해도 분량은 상당하며 그의 작품의도와 구성이 훼손되지 않았다고 한다.
줄거리는 대략 이렇다. 토지측량기사인 K가 어떤 성의 지배자로부터 편지를 받고 한 마을에 들어온다. 성의 토지를 측량하려는 본연의 임무를 수행하고자 하지만 날씨와 재난, 사고와 사건으로 바로 지척에 있는 성에 당도하지 못한다. 마을 사람들은 어딘지 무기력하고 무력하다. 얼굴도 보이지 않는 성의 지배자에 대해서 무조건적으로 복종하는 굴욕적인 모습을 보인다. K는 이방인으로 이들과 섞이면서 자신의 임무, 마을의 성과 관청으로부터 직업적으로 인정받고자 하며 또 갖은 사건과 마을사람들의 방해로 번번히 실패로 돌아가는 입성에 대해 개인의 투쟁을 벌인다.
카프카처럼 주인공 K는 이방인이다. 철저한 아웃사이더로서 K는 마을사람들을 관찰한다. 마을사람들은 '성'에 경외심을 가지고 있다. 성은 그들의 욕망이자 그들을 내적으로 세뇌시키고 외적으로 마을을 벗어나지 못하게 억압하는 지배자이다. 한편 성은 권력의 상징이다. 성은 관청이고 법의 집행처이다. 마을사람들은 성의 지배자, 지배자의 하수인, 하수인의 하수인, 하수인의 하수인의 하수인...으로 이어지는 관료들의 명령에 따라 움직이며 그들의 명령에 복종하는 것을 영광으로 생각한다. 성의 권위에 조금이라도 저항하는 사람은 마을 전체가 직간접적으로 벌을 내린다. 저항한 자 뿐만 아니라 저항한 자의 가족도 직업을 구할 수 없고 마을 사람들에게 말도 걸 수가 없다. 일종의 이지메이다. K는 그런 사람들 틈에서 외부에서 온 이방인으로서 자신의 직무인 '성의 토지 측량'을 하려고 하지만 번번히 실패로 돌아간다. 지배자의 변심, 또는 관료제 아래서 관료들의 태만으로 일의 시한이 늦춰지기 때문이다.
K는 성에 대해 광신적인 마을 주민들 속에서 유일하게 합리적인 이성을 가진 사람이다. 그래서 마을이 배척하는 인물과 친교를 맺기도 하고 이 때문에 성의 공분을 사서 일이 더 늦춰지고 점차 그는 피폐해진다. 그럼에도 그는 성으로 가기를, 그곳에서 자신의 임무를 수행하기를 계속해서 시도하고 꿈꾼다. 그것이 K의 합리적 이성에 의한 '소명'이므로...소설은 이렇게 계속해서 성에 들어가 임무를 수행하려는 K의 투쟁을 그리고 있다. 소설은 완성되지 못했지만 반복되는 사건과 시도, 그리고 실패의 연속, 그렇지만 계속하려는 K의 의지를 보면서 든 생각이다.
이 소설에서 K는 카프카의 분신이 아닐까? 그리고 마을 사람들은 카프카가 살던 시대의 사람들의 모습이 아니었을까?
카프카는 평생을 체코에서 살다 죽었다. 그가 살던 시기는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의 식민 지배 시기였다. 그리고 이런 식민 지배의 역사는 카프카가 죽은 지 100여 년이 지난 다음에야 종식되었다. 카프카는 유대인으로서도 평생을 살았던 체코의 시민으로서도 소속감을 느끼지 못했지만 그에게 보헤미아란, 체코란, 그리고 프라하란 '자유를 잃어버린 땅'으로서 작가로 살고자 했으나 평생 직장에, 아버지에 매여 억압을 느끼고 살던 자신을 투영한 '성과 마을'의 풍경으로 소설 속에서 그려낸 것은 아니었을까? 카프카는 그의 작가적 자의식, 그리고 '소명'으로 <성>을 쓴 것이 아닐까? 마을 사람들이 그들을 억압하고 그들 스스로가 서로를 억압하게 만드는 '지배'에서 벗어났으면 하는 마음으로 <성>을 쓴 것이 아닐까?
지금까지 카프카는 역사적 소명의식을 가진 작가가 아닌 역사를 등한시한 실존주의의 대표 작가로서만 알려지고 오해 받아온 것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