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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우정 Oct 27. 2019

프라하 카를 대학 & 바츨라프 광장

이문열의 <선택>과 프라하의 봄, 그리고 아름다운 죽음

팁투어에 참여하면서 카를 대학이라는 곳으로 향했다. 프라하 구시가지에 있는 카를 대학은 규모로는 서울의 초등학교보다도 작은 대학이지만 유구한 역사를 지니고 있었다. 한편 내가 정말 좋아하는 카프카, 쿤데라, 둡첵, 하벨의 대학이자 팁투어를 하면서 새로 알게된 얀 팔라흐, 얀 자히츠의 대학이기도 하다. 시간상 교정 안으로 들어가보지도 못했지만 얀 팔라흐와 얀 자히츠로부터 시작하는 '프라하의 봄'에 대해 알게 되면서 이 작은 대학이 좋아졌다. 걸출한 인물과 역사를 함께 그린 오랜 대학. 체코의 오랜 역사를 지탱해 온 학교이기 때문에 그 정신도 대대로 이어져 온 것이겠지.

팁투어 중에 들은 설명과 백과사전에서 발췌한 내용에 따르면 체코의 세종대왕(?)이라고 불리는 카를4세는 집권 시기동안 신시가지, 카를교, 성비투스 성당 등을 지었는데 그 중 카를대학은 학예를 중시하던 카를4세의 기풍과 카톨릭을 부흥시키고자 했던 목적에 의해 1348년에 건립되었다. 종교적으로 얀 후스라는 중요한 인물을 배출하였으며, 설립 당시 신학, 예술, 법률, 의학의 4개의 학과로 운영된것이 현재는 17개의 학과로 늘어났고, 무려 600여년의 세월동안 체코의 학문 정신을 계승했다고 한다. 

한 때는 독일인과 체코인의 대학으로 분리되기도 하였고, 이후 1939년에는 히틀러에 의해 폐쇄되기도 하였지만 위기를 넘기고 나서 체코대학으로의 명분과 사명으로 다시금 개방을 하여서 지금까지도 명실공히 체코의 최고 대학으로 전통을 잇고 있다. 현재는 의학부가 가장 유명하다고 한다. 유학도 많이 온다고 한다.

카를대학처럼 오랜 명소가 있는 구시가지에서 화약탑을 경계로 걸어나오면 신시가지가 바로 연결된다. 신시가지에 있는 바츨라프 광장은 팁투어를 마치고 따로 방문했다. 구시가지가 우리나라로 치면 사대문 안이라면 신시가지는 사대문 밖이라고 할 수 있는 곳으로, 카를 4세에 의해 확장된 시가지를 일컫는다. 지금은 쇼핑몰과 호텔, 레스토랑이 모여 있어서 상업지구를 형성하고 있고, 이런 신시가지를 대표하는 곳은 국립 박물관으로 가는 바츨라프 광장이다. 바츨라프 광장은 프라하 최대의 상업지구일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의 광화문 광장과 같은 저항과 민주주의의 상징으로, 역사적으로 의미가 있는 장소이기도 하다.


국립박물관으로 가는 큰 광장과 대로변은 1968년 '프라하의 봄'이 일어났던 곳이다. 당시 소련의 지배 하에 있던 동유럽 국가 중 처음으로 체코에서 소련의 지배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민주화 운동이 일어났고, 소련의 탱크가 침공하면서 비폭력 저항을 하던 시민들 다수가 목숨을 잃었다. 이후 1969년 '프라하의 봄'의 실패로 패배의식에 빠진 시민들의 의식을 일깨우고자 얀 팔라흐, 얀 자이츠라는 카를대 철학과 학생이 분신자살을 한 역사적인 장소가 바로 이곳, 바츨라프 광장이다.  

국립박물관 쪽으로 걷다보면 얀 팔라흐와 얀 자이츠의 기념비가 나온다. 아직도 이곳에는 많은 사람들이 꽃을 놓고간다. 죽기에는 너무 아까운 20살 남짓의 청년의 분신. 이들이 없었으면 민주화가 이루어질 수 있었을까? 소비에트 연방이 와해되면서 1989년에야 체코가 독립하지만 이들의 죽음은 69년 당시에도, 89년 독립시기에도, 그리고 여전히 체코인들의 가슴 속에서 살아 숨쉬고 있다.



카를대학과 바츨라프 광장에서 '프라하의 봄'을 떠올리며 든 인문학 단상

숭고한 죽음이란 무엇인가?

얀 팔라흐 & 얀 자히츠의 죽음과 프라하의 봄

얀 팔라흐(1948년 8월 11일 ~ 1969년 1월 19일)는 체코의 카를대학교 철학과 학생으로 21세에 프라하를 점령한 소련에 저항하여 프라하 바츨라프 광장의 국립 박물관 앞에서 분신 자살을 하였다. 일찍이 소련의 체코 침공에 시민들은 대항했으나 소련은 탱크를 앞세워 프라하를 점령하고 주민들을 학살했다. 그런 실패로 시민들은 오랜 세월 소련의 치하에서 저항정신을 잃고 소시민으로 살았다. 이런 시민들을 향해 얀 플라흐는 분신자살을 하여 다시금 소련에 저항하기를 꿈꿨다. 그의 뜻을 따라 1969년 2월 25일 같은 장소에서 같은 학교 학생 얀 자이츠가 같은 방식으로 자살했고 이후에도 에브젠 플로첵 등이 분신하여 '프라하의 봄'의 정신을 일깨웠다.


한 개인이 국가, 민족과 같은 선험적으로 결정된 개념을 위해 안위를 포기한다는 것은 내가 생각하기에는 대단한 일같다. 지식인으로서의 부채의식,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공동의 가치를 위해 개인의 희생, 가장 극렬한 방식인 죽음을 택한다는 것은 경외할 일이다. 


혹자는 개죽음, 무모한 시도라고 할 지 모른다. 하지만 나같은 소시민이라면 더더욱 묵인하고 외면하고 근근히 입에 풀칠이나하고 살았을테니까 이런 죽음에 나는 경외심을 느낀다. 결의와 독기가 없고서는 행할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나뿐아니라 대부분의 소시민이 제국주의 시대에 혹은 인권 탄압의 시대에 그렇게 살았으니까...더 대단한 일처럼 느껴진다. 


"죽음이란 결코 숭고하지 않고 역사는 역사에 의미를 부여하는 낭만주의자들의 키치에 지나지 않는다"는 카를 대학 출신 밀란 쿤데라의 의견도 동감하는 바이지만, 어떤 죽음은 민주화와 민주주의의 역사의 상징이자 도화선이 되기도 한다. 그 상징성의 댓가가 개인의 참혹한 죽음이라 해도 그 죽음의 피를 닦고 어떤 역사는 더 나은 미래를 향하기도 하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노동사에 전태일 같은 인물이 없었다면 기계처럼 소진되는 인간의 몸과 노동에 대해 시민들이 깊이 생각할 기회가 있었을까?


물론 이런 전태일의 죽음이나 프라하의 봄에 대조되는 죽음도 있다. 소설가 이문열이 그의 작품 <선택>에서 '섬뜩한 아름다움'이라고 일컬었던 열녀의 죽음이 바로 그것이다. 조선시대에 미망인이 지아비를 쫓아 자살하면 열녀비 세워주던 것. 


이런 죽음도 숭고하다고 할 수 있을까? 역사를 바꾼 죽음일 수 있을까? 

나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사회가 요구하는 관습이 인류 공통의 지향점인 자유, 평등, 박애의 원칙과 상반되는 경우가 바로 열녀에 대한 과한 사회 관습이었다. '열녀'는 관습이라고 할 수도 없는 구습이다. 그런 구습을 쫓아서 열녀들이 자살한 건 인류공통의 이상을 위한 대의보다는 그저 구습을 답습한 것에 불과하다. 구습의 피해자이고 희생자였다. 그들에게는 세상을 바꾸고자 하는, 역사를 일으키려는 진일보한 사고가 부재해 있다. 그저 관습에 얽매여 어쩔 수 없이 개죽음을 당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체코가 "프라하의 봄"의 실패로 체코 시민이 패배의식에 쩔어있을 때, 정치적으로 냉소적으로 변모하고 무사안일주의가 팽배했을 때 다시금 체코인들의 마음 속에 민주주의에 대한 정신을 일깨우고자 학생들이 시도했던 죽음은 결코 헛되었던 것은 아니다. 어린 나이의 학생들은 죽어있는 사회에 대해 경종을 울린 것이다. 실패한 프라하의 봄의 정신을 되살리기 위해, 소련의 침략에 대항했으나 실패로 돌아갔던 아픈 세월에 소시민으로 연명하며 불의를 참고 살았던 시민들을 향해 종을 친 것이다. 바꾸려고 했으나 바뀌지 않았던 모든 것에 대해 대화를 한 것이다. 대화의 수단으로 할 수 있었던 것이 죽음밖에 없었다고 생각하니 안타깝다. 그 경직되고 냉정하고 추운 사회에서 했던 학생들의 생각이, 그 무서운 생각을 실천에 옮겨야만 했던 열렬한 마음이 안타깝고 존경스럽다. 그 마음이 역사를 만들기는 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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