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모으는 이유
스트라호프 수도원(Strahov Monastery)
프라하에서 마지막으로 관광하는 날이었다. 오전에는 시민회관에서 클래식 공연을 보고 오후 일정은 스트라호프 수도원에서 시작했다. 흐라드치니 언덕이 있는 이 구역은 프라하 성과 가까워서 프라하성까지 고지대에서 바라보는 시가지 풍경을 보면서 여유롭게 이동할 수 있다. 어떻게 프라하에 오자마자 아파서 마지막 날까지 계속 아프기만 했는지 모르겠다. 사실 마지막 날은 공연 보고 호텔에서 트램을 타고 스트라호프 수도원으로 가려고 했으나 택시를 타고 갔다. 거리는 10분도 안 걸렸는데 뭐 500 코룬인가 나왔다. 바가지를 씌운 건지 미터기에 장난쳐 놓은 건지... 실랑이 벌일 힘도 없어서 내려서 낑낑거리면서 구경했다.
스트라호프 수도원은 블타바 강 건너편, 프라하 서쪽 언덕에 위치해 있다. 플라디슬라프 2세 때인 12세기에 건립되었으나 전쟁과 화재로 많은 부분이 손실되었고 17세기~18세기에 복합적인 시대 양식으로 복원되고 이어져 내려왔다. 그러던 18세기 말 수도원 해체 명령이 내려지자 긴급히 학술기관으로 신고하여 수도원의 명맥을 이어나갔다고 한다. 이후에도 공산주의 정권이 들어서면서 체코 박물관으로 바뀌었고 공산 정권이 물러선 다음에야 수도원의 기능을 회복했다고...
지금 수도원은 미사 시간에만 개방하고 거의 닫혀있으나 관광객은 수도원을 보러 오는 것이 아니라 유럽에서 가장 아름답다고 소문난 스트라호프 도서관을 보러 많이 온다.
스트라호프 수도원은 이 도서관 때문에 유명하다. 18세기에 학자들의 연구기관으로 쓰이던 곳이었지만 1779년 당시 수도원장인 Vaclav Mayer가 철학 도서관으로 구성하였다. 이때 수집한 장서는 무려 14만 권이다. 이곳에는 10세기 중세시대 오르간 연주 악보라든지 성경이라든지 16세기 콜럼버스의 항해 기사 같은 진귀한 역사자료도 전시되어있다. '신학의 방'과 '철학의 방'은 관계자나 특수목적이 아니면 출입을 못하고 문 밖에서만 관람할 수 있다. 그래서 일반 관광객은 천정 위에 프레스코화와 장서들이 꽂힌 정경만을 볼 수 있다... 김훈의 <유럽 자전거 기행> TV 프로그램을 보고 방문한 곳인데 일반인 신분이라 김훈처럼 안에 들어가서 구경하고 14세기 유물인 곤돌라 책장을 돌리지 못해서 아쉬웠다.
신학의 방과 철학의 방에 못 들어가는 대신 진귀한 고서들과 유물을 복도에서 관람할 수 있다. 중세시대 성경이 아주 깨끗한 상태로 보존되어 있다. 라틴어를 모르지만 얼마나 보존상태가 좋던지... 일일이 수도승이 필사한 정성 어린 흔적이 아주아주 깨끗한 상태로 남아있다. 해당 성경은 귀족들의 교육용 성경으로 사용해서 깨알같이 그림도(색감도 무지 화려하고 선명함) 그려져 있고 금칠로 도배되어 있다. 망원경같이 프레임이 여러 개로 그려진 '천지창조' 그림이 한 페이지에 걸쳐서 화려하게 금빛으로 장식되어있기도 하고...
깨알같이 고르게 필사한 글씨체와 저 장식적인 프레임과 채색된 그림이 천 년이 넘는 세월에도 변하지가 않았다. 바깥의 상설 전시장은 1798년 Baron Karel Jan Eden이 모은 개인 소장품이 전시되고 있다. 중세시대의 책 보관 상태가 무척 세심했다.
스트라호프 수도원을 나오면서 수도원으로서는 12세기부터, 도서관으로서는 17세기부터 명맥을 이어 온 언덕 위의 이 장소가 나는 무척 부러웠다. 한국의 외규장각 도서처럼 오랜 역사를 간직한 서적을 지금까지 큰 손실 없이 지켜온 것이 대단하다고 여겨졌다. 500여 년의 식민 역사에도 말이다.
스트라호프 수도원이 있는 언덕의 전망도 멋있었다. 시계탑에서 바라본 구시가지가 아기자기하고 뭔가 따뜻하고 정감 있는 느낌이라면 여기서 바라본 시가지의 전망은 시원하고 통쾌하고 뻥 뚫리는 느낌이었다. 바람도 진짜 많이 불고 시야가 트이니 마음이 비워지는 기분이었다. 유리관 안에 있는 수집품이나 빼곡히 몰려 있는 실내의 도서관을 구경하다가 야외로 나와 넓은 하늘과 마을의 전경을 보니 더 통쾌한 느낌이 들었다. 무언가 빽빽한 것, 집중된 것, 모으는 것, 밀도가 높은 전시를 보고 나면 항상 반대급부로 높은 곳에서 넓은 곳을 보고 싶어 진다.
스트라호프 수도원에서 느낀 인문학적 단상
책을 모으는 취미는 왜 있는 걸까?
스트라호프 수도원을 방문한 김훈이 "책 모으는 취미가 있으신가요?"라는 질문을 받자 "책을 모으는 취미는 없다"라는 대답을 한 것이 기억났다. 책을 모으는 취미는 왜 있는 걸까? 책뿐만 아니라 고고학, 자연사와 관련된 물품을 수집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어떤 결핍이 수집에 대한 욕망을 일으키는 걸까?
스트라호프 수도원에 있는 중세의 성경 필사본은 소수의 귀족만이 소유할 수 있었다. 중세 때는 손으로 일일이 양피지에 적고 금칠을 한 그림을 삽화로 넣어 몇 년 몇 달을 걸쳐 한 권의 성경을 제작하였다. 이런 금칠한 책은 지금으로 치면 포르셰 한 대 정도의 가격이었을 것이다. 귀족은 자신의 권력과 부를 과시할 목적으로 성경 필사본을 구매했을지도 모른다. 한편으로는 '라틴어'라는 소수의 지배층이 사용하는 언어를 사용하며 또 대대손손 그의 부와 권력을 물려주었을 것이다. 그만큼 책은 희소가치를 지닌 귀중품이었다.
15세기가 되어서 어떤 우연으로 또는 필연으로 일일이 필사하던 성경을 구텐베르크가 기계로 대량 생산하면서 '인쇄혁명'이 시작되었고 오백여 년이 지난 지금은 나라는 제3세계의 개인이 책을 모아서 나만의 큐레이션을 할 수 있을 정도로 대중화되었다.
책은 더 이상 특정 계층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나의 부모님은 둘 다 독서광이었다. 다만 읽는 종류가 달랐는데 문학류는 엄마가, 비문학류는 아빠가 많이 읽었다. 아빠는 역사소설을 좋아했고 엄마는 세계문학을 좋아했다. 집에는 엄마가 처녀시절부터 가지고 있던 책들과 고모에게서 받은 세계문학 전집, 아빠가 보는 역사소설 시리즈가 빼곡히 꽂혀 있었다. 어린 시절에 생일 선물을 받아도 늘 그런 전집이나 책 시리즈가 주였다.
초등학교 3학년 때 처음으로 상을 받았다. 월마다 하는 반장 임명장과 독서 우수상. 독서상은 공립 초등학교로 전학을 가서도 매년 받는 상이었다. 그러니까 나는 아주 어릴 때부터 지적으로 탐식을 많이 했다. 허겁지겁 책을 보고 지식을 머리에 새겼다.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 집에 놀러 오는 친구들은 하나같이 놀랐다. 내 책장의 책들이 3중으로 겹겹이 쌓아 꽂혀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책을 많이 읽는 모범생은 아니었다. 늘 겉돌았다. 머리도 좋다고는 할 수 없었다. 그냥 책이 좋았다. 뭔가 책에 싸여 있으면 어떤 철옹성 안에 있는 것 같았다. 책을 읽을 때는 아무도 건드리지 않으니 말이다. 요새 같다고 할까나.
지금도 친정에 가면 책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다. 엄마의 습관이다. 오래된 책도 잔뜩 있다. 오래된 책 중 하나를 물으면 엄마는 대답하지 못한다. 줄은 잔뜩 쳐져 있는데 말이다. 아마 기억력이 약화되었기 때문일까? 엄마와 마찬가지로 나도 책을 잔뜩 쌓아두고 산다. 유전이다. 또 달마다 책을 구입해서 꽂아둔다. 수집욕이 있어서 책뿐만 아니라 타로카드나 사진집, 그림 도록 같은 것도 모은다.
어느 시인의 칼럼에서 그가 지적으로, 문화적으로 시인이 되지 못할 환경에서 자랐음에도 어떤 계시로, 이끌림으로 혹은 10% 정도의 확률로 시인이 되었다고 한다. 글을 쭉 읽어보니 어릴 적부터 지적인 허영심이든 지적인 갈증이든 집에 책을 수집하는 아버지가 있어서 자연스레 책을 읽었고 그 속에서 아버지가 쓴 한 줄의 메모(시인은 이것을 '시'라고 표현했다)를 발견하여 그 의미를 떠올리던 중 시적 재능이, 재능의 가능성이 발현되었다고 한다.
내겐 지적인 갈망과 결핍이 늘 있다. 많이 배우지 못한 것에 대한 회한도 있다. 공부머리가 좋지 못했던 것에 대한 콤플렉스도 있을 것이다. 한편으로는 명품백이라든지 자동차라든지 재화가 많이 드는 상품을 수집할 여력은 안되니 비교적 저렴하게 구입할 수 있는 책을 모으는 것일지도 모른다. 어쨌든 수집은 물질에 대한 '소유욕' 이 발현된 행동이니까.
그래도 다른 것이 아니라 '책'을 수집하는 건 어떤 가능성을 증폭시키는 행위 아닐까.
시인의 탄생-같은 손이 오그라드는 표현이 아니어도 열외 학자, 변두리 철학자, 쓰리잡 문학 연구가 정도는 내 책장 안에서 키워나갈 수 있는 가능성. 책을 수집하고 모은다는 건 그런 가능성을 만들어 가는 행위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