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트릭스 연대기
가령 내가 갑자기 떠오른 “둑이 무너진다”라는 문장을 X에 올린다고 하자. 그 일은 반드시 근시일 안에 일어났다. 당연하다. 세계에는 적어도 수천만, 어쩌면 수억 개의 둑이나 댐이 있을 것이고 그중의 하나가 무너지는 건 너무나 흔한 일이니까. 둑이 무너지면 대량 인명 피해도 당연한 일이다. 모든 게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런데 그 말을 누가 했느냐가 문제인 거다. 당시 X의 사용자 수는 3억에 육박하고 있었다. 그 3억 명 중에 아무개가 그런 멘션을 남긴다고 누가 그걸 예언이라고 보겠나? 그 3억 중에 오로지 머스크 일가와 망할 트럼프 일가의 멘션만이 주목을 받았다. 그들, 그리고 내가 말하는 모든 것은 예언이 되었다. 아니, 그건 예언이 아니라 “자, 이제 결과로 내 말을 증명해라”는 명령이었다.
- <X Æ A-Ⅻ 머스크의 회고록> 중에서
90년대에서 가장 혁명적인 이름은 ‘윈도우 95’일 것입니다. 하드웨어 중심의 컴퓨터, 전문 인력이나 쓰던 컴퓨터가 소프트웨어 중심의 퍼스널 컴퓨터로 보급되었으니까요. 특히 제가 살고 있는 곳에서는 이 윈도우 운영체제에 대한 의존도가 높았죠. 모든 집이 다 윈도우를 썼고… 나중에는 관공서도 윈도우 95, 98, ME…이런 식으로 업그레이드만 되었지, 반백 년을 윈도우에서 벗어나지 못하더군요.
아무튼 그 윈도우 95를 축으로 저희 집에 퍼스널 컴퓨터가 들어온 것은 97년도입니다. 카탈로그에서 모니터와 본체, 키보드와 스피커를 골라서 구입한 브랜드 제품이었습니다. 아직 광대역 인터넷이 들어오지 않았기 때문에 그저 CD와 디스켓을 이용해서 게임이나 놀 거리를 즐겼습니다. 기억나는 건 컴퓨터를 살 때 사은품으로 주었던 게임 CD와 백과사전 CD, 노래방 CD였습니다. 백과사전 CD를 틀면 A부터 Z까지, 가부터 하까지 나열된 리스트를 플래쉬로 설명해 주는 그림과 설명문이 나왔어요. 아주 단순한 그런 프로그램에도 박수를 치며 좋아했던 시절이었습니다. 게임도 만화 속 주인공이 되어 사막과 정글과 얼음의 세계를 누빌 수 있었습니다. 조작은 단순히 밟기나 점프 같은 것이었습니다. 콘솔 게임인 슈퍼마리오와 비슷했죠. 요즘 사람들은 그게 뭔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 당시 게임은 그렇게 경쾌하게 직진하는 것이었습니다. 나아가는 것이었습니다. 그 끝엔 구해야 할 공주가 있고 또 친구가 있고 또 평화가 있었습니다. 온통 나아가는 것이었습니다. 제 지식도 그저 나아갈 뿐이었습니다.
노래방 CD를 넣고 마이크를 연결해서 가족들과 노래를 부르기도 했습니다. 노래방 기계처럼 검색을 하면 해당 노래가 나왔어요. 메커니즘은 인터넷과 비슷하지만 그냥 CD에 저장된 곡들에 한해 검색할 수 있는 것이었어요. 그러나 당시로서는 신기한 일이었습니다. 그저 저장된 정보만으로, 신곡이 없어도 온 가족이 화목한 시절을 보냈습니다. 당시에 제가 살던 한국은 그리 경제 상황이 좋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그 퍼스널 컴퓨터 하나만으로 저희 집은 즐겁게 시간을 났던 것 같습니다. 인터넷이 없던 시절의 제한된 정보. 그것은 어쩌면 진정한 낙원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흔히 말하는 매트릭스 안에서요.
그런 의미에서 98년도는 제게 많은 변화가 일어난 해입니다. 제 퍼스널 컴퓨너의 운영체제도 윈도우 98로 업그레이드를 하였고, 모뎀이나마 인터넷을 연결하였고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나 스타크래프트라는 전략 게임을 시작한 해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스쿨버스를 타고 다니던 사립 초등학교에서 한 반에 40명에 육박한 동네의 공립학교로 전학을 간 해이기도 했습니다. 무엇이 저를 가장 뒤흔들었을까요? 제 자아는 이때를 기점으로 눈에 띄게 자라나기 시작했습니다.
가만히만 있어도 존재를 인정받고 사랑받을 수 있었던 시절은 지났습니다. 저는 학교에서도 컴퓨터를 통해서도 무언가를 증명해야 했습니다. 무언가를 증명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시기가 도래했습니다. 존재의 이유. 너는 왜 존재하고 있어?라는 물음. 제 조급증은 자라났습니다. 무엇에 대한 조급과 또 갈급이었을까요? 인정? 애정? 잘 모르겠습니다. 하여튼 그 시절의 저는 특별하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그것이 30명이 채 되지 않는 사립학교의…말갛고 고운 아이들 틈에서 비슷하다고 느끼며 살다가 40명에 육박한 곳의… 그때 당시로는 떼거리 같던 아이들 속으로 떠밀려진 심정 때문인지 모르겠습니다. 그야말로 R-복합체가 활성화되기 딱 좋은 구조였죠. 온갖 계층의 아이들이 온갖 파벌을 만들어서 온갖 싸움박질을 하던 시기였으니까요.
그건 그 시점 도산한 아빠의 회사도 마찬가지겠지요. 특별함을 증명하지 못했고, 존재의 이유를 증명하지 못했고, 그래서 살아남지 못했습니다. 우리 가족은 그 시기 모두 전략 시뮬레이션 게임에 푹 빠졌습니다. 그리고 현실과는 다르게 easy 모드의 컴퓨터는 제게 늘 승리를 가져다주었습니다. 그때만큼은 그래, 저는 특별한 사람이었습니다. 승리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상을 가득 타 오는 사람이었습니다.
특별하지 않다는 것. 그것을 인정하기까지 참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매번 증명하려 했지만 잘되지 않았습니다. 지금에 와서…제 변연계의 비극을 이야기하면서 제가 특별하지 않았다고 고백합니다. 그건 너무나도 명백한 사실입니다. 이렇게 말하면서도 아직도 저는 제게 무엇인가 특별한 것이 있었으면 합니다. 빛나는 집안과 빛나는 외모와 빛나는 지성과 빛나는 영광 같은 것이 조금이나마 있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아쉬워하는 겁니다. 정말 이건 변연계의 비극이지요.
둑은 무너집니다. 공고하지 못한 댐은 한철 장마에도 무너집니다. 이건 자유의지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지금 저는 자유의지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제 저는 스스로를 매개나 매질(medium)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거대한, 어떤 무질서와 무의미의 힘이 통과하는 송신탑 같은 겁니다. 빛이 통과하는 어떤 불투명한… 아, 불투명하면 통과하지 못하는 건가요? 어쨌든 그런 빛이 통과하는 아주 흔해 빠진 매질 같은 겁니다. 제가 하는 말도 제가 생각하고 떠올린 기억들로 조합해서 말하는 거겠지만, 그것을 관장하는 건…네 R-복합체이든 변연계이든 뭐든 어떤 우연 또는 필연 또는 그 모든 것이 뒤섞인 힘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마치 자동기술 인형 같은 거죠. 그 애니악 전에 존재하던 타자기 인형 말이에요. 아시나요?... 애니메이션도 있는데(웃음)... 어쨌든…지금 제가 하는 말도 거의 자동기술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저도 어느샌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으니까요(웃음).
특별하기를 바라는, 그 욕망마저 설계된 최초의 98년도를 지나 99년도...여전히 전략 시뮬레이션은 인기가 많았습니다.. 또한 이때는 제가 있던 한국과… 적어도 일본은 세기말의 정서가 지배했습니다. 노스트라다무스의 지구 종말 예언이 일어날 것이라고 믿는 사람들이 많았어요. 텔레비전을 틀어도 온통 지구 종말에 대한 다큐나 영화 같은 것이 나왔습니다. 그리고…바로 <매트릭스>가 개봉한 해이기도 하죠. 아아… 저는 아직 아이였기 때문에 특별함을 증명할 시간이 많이 남았다고 여겼지만… 당시 한국 사람들은 많이 좌절했을 거에요. 희망은 없었습니다. 어딘가는 특별할꺼야, 라고 도망칠 곳도 없었습니다. 저는, 우리는 특별하지 않았습니다. <매트릭스> 속 빨간 약의 세상은 그걸 알려줬어요. 하지만 그 빨간 약조차도 특별한 사람들만 선택권이 있고 또 거기에서도 특별한 사람만 선택하는 걸…왜 그때는 몰랐을까요?
--후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