즐거운 편지

사실 언젠가 이런 순간이 올 거라고 준비는 하고 있었지만 막상 직접 겪어내보니 쉬이 받아들이기 어렵네요. 내가 좋아하는 <응답하라1997> 속 대사처럼 '사람 마음은 스위치가 아니라 껐다 켰다 할 수가 없'기에 적당히만 좋아하려고 많이 노력했어요. 만남을 하는 와중에도 헤어짐을 생각하는 나를 보며 그럭저럭 절제하고 있는 줄 알았더니 이제 보니 큰 효과는 없는 것 같아요. 아직도 함께 산에 가고 얘기를 하고 손잡고 싶어요. 이젠 그렇게 할 수 없는 상황이란 걸 받아들일 때까지 얼마나 걸릴까요. 사람의 기억력은 생각보다 취약해서 어떤 일이라도 결국은 망각의 늪에 빠져버린다고 했었죠. 하지만 구체적인 이야기와 장면들은 기억 너머로 흩어지더라도 강렬했던 느낌과 감정들은 남아있을 거라 믿어요. 그마저도 시간이 지나고 닳아 없어진다면 인간은 기억도 못 하고 감정도 못 느끼는, 아주 무력한 존재가 되어버리는 셈이잖아요. 그래서 이번 여름 당신와 함께한 느낌들은 내 마음에 사랑스럽고 예쁜 자국으로 오래도록 남아있으면 좋겠어요. 문득 너무 보고 싶은 날에는 자국을 쓰다듬고 함께 했던 시간들을 추억하며 버텨볼게요. 많이 아프고 힘들겠지만 그게 우리 둘 다에게 바람직한 일일 것이기에.

rendezvous: a meeting with someone that is arranged for a particular time and place and that is often secret (citation: britainica dictionary)

해외 사전에서 따온 건데 우리 만남을 설명할 수 있는 단어를 이제야 찾았어요. 바람직하지 않고 떳떳하지 못한 관계였을까요 우리는. 이따금 자조하는 심정으로 윤리중추가 마비된 건 아닐까 싶기도 했어요. 하지만 같이 있는 동안 떨리고 그렇지 않은 동안 애틋한 마음, 그 마음만큼은 거짓이 없고 단단했어요. 그래서 불안하고 걱정돼 매일 작별을 유예받았다는 생각이 들지라도 나는 기쁘고 행복했어요. 처음 눈맞춤, 손맞춤, 그리고 입맞춤 모두 방금 전 일까지 생생하네요. 그런 당신이 가는 뒷모습을 어쩔 수 없이 지켜만 봐야 하는 게 많이 속상해요. 내가 조금만 더 성실히 살았더라면, 그때 다른 선택을 했더라면, 더 일찍 당신을 알게 되었더라면 하며 가정에 가정을 붙여보게 돼요. 그렇지만 그런 생각들은 역시 가정, 허구의 일이기 때문에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에선 발생하지 않은 채 지나가버린 것들이죠. 그렇다면 이 모든 게 처음부터 꿈이었으면 오히려 좋겠다 싶기도 해요. 그럼 당신이랑 작별하는 이 순간도 현실이 아닌 것이 될 수 있는 거잖아요. 이미 질척거릴 만큼 질척대서 마지막 인사만큼은 아쉬움 남기지 않고 담백하게 하려고 했는데 정말 부질없는 다짐이었어요. 이제는 당신과의 시간에 내가 먼저 마지막을 고해야 하는 순간이 왔어요. 그동안 마음 써주고 시간 내준 일들 모두 고마웠어요. 안녕, 그리고

잘 살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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