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시우 Feb 28. 2022

해발 1700m 겨울 한라산이 나에게 선물한 풍경들

글쓰는 사진작가가 담아온 한라산 설경

https://youtu.be/GVTkeX1lq9s

유튜브에서는 더 많은 한라산 영상과 사진, 글을 감상하실 수 있습니다.

Youtube_ [시우의 시선]




2022년 2월 10일 오전 10시.

한라산을 오르기로 결정한 시간이었다.

사진 촬영이 목적이었기에 날씨가 화창해야 했다.

일기예보 상으로는 문제가 없어 보였다. 



존 무어는 인간이 산을 정복하는 것이 아니라, 

산이 인간을 허락하는 것이라고 했다.

산에 오르기 전까지는 허락의 범위를 가늠할 수 없다.

그가 허락한 범위 안에서 최대한의 것들을 담아오기 위해 만반의 준비를 할 뿐이다.


한라산에 쌓인 눈은 조금도 녹지 않은 상태였다.

아이젠을 지참하지 않으면 입산이 제한된다고 했다.

처음 사용해보는 아이젠을 등산화에 끼우고

가방과 스틱을 든 채 산에 올랐다.


가방 속에는 이온음료와 단백질 바, 김밥이 담겼고

어깨에는 니콘 DSLR이 장착되었다.

열의 가방에는 카메라 렌즈와 삼각대가 추가로 들어있었다.

건은 열에게 힘이 들면 언제든지 짐을 나눠 들자고 했다.



‘선택과 집중’.

우리들에게 종종 회자되는 문장이다.

당연한 문장이라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문득 두렵다.


한정된 시간 위에서 무엇을 선택한다는 것은

다른 어떤 것들을 하지 않겠다는 말과도 같다.


사람들은 저마다 배낭을 짊어진 채 자신이 선택한 길을 가고 있다.

배낭 속에는 책임이 담겨있다.

다른 것들을 하지 않아서 발생하는 책임과

결과에 대한 책임일 것이다.



눈으로 둘러싸인 한라산을 하염없이 올랐다.

잘 사용하지 않았던 근육들이 순차적으로 아파왔다.

모양을 낸 머리칼은 금세 헝클어졌고,

날숨에 젖은 마스크는 낮은 기온 덕분에 얼기도 했다.


눈꺼풀의 물기를 닦아내며 주변을 바라봤다.

지금 내가 서있는 이곳을 조금이라도 더 눈에 담아 가겠다는 의지 표명이었다.

한라산의 5%도 채 안될 등산로 면적을 제외하고 발자국 하나 없는 설경이 광활하게 펼쳐져 있었다.


사람의 흔적 없이 쌓인 눈이 다수인 풍경을 언제 보았나.

내가 살아왔던 도시의 풍경은 달랐다.

눈이 내리면 새벽부터 제설차가 나타나 도로를 잿빛으로 물들였고,

인도와 집 앞에 쌓인 눈은 발자국과 염화칼슘이 뒤섞인 사람의 흔적으로 덮혀있었다.



좋은 환경에서 자란 나무 위에 그간 내렸던 눈이 안착해 있었다.

햇빛은 설경에 반사되어 산의 굴곡을 더욱 잘 보이게 했다.

눈과 나무, 경사가 빛과 만나 저마다의 모양새를 뽐내고 있었다.

오늘, 이 시간에만 즐길 수 있는 광경이었다.


사진을 촬영했다.

그렇게 하면 이곳에 나를 내려놓고 올 수 있다는 듯이 

정성스럽게 노출값을 조절하고 셔터를 눌렀다.

이 순간에 다른 것을 하지 않고 사진을 촬영하는 이유에 대해,

그에 따른 책임에 대해 생각했다.


다른 것을 하지 못해도 꼭 해야만 하는 것.

책임을 지되 후회는 하지 않는 것.

나에게 사진은 그런 것이었다.



콜라와 소주를 마시던 마지막 날 밤.

우리는 연애, 가족, 친구, 일에 대한 사랑 이야기를 했다.


저마다의 사랑은 소중하고도 복잡한 것이었다. 

언제나 그랬듯 사랑에 대한 정답을 찾지 못한 채 제주에서의 마지막 밤을 보냈다.


김포행 비행기에서는 친구들과 떨어진 좌석에 앉아야 했다.

내 옆에 앉은 헝클어진 단발머리를 한 여자가 

창가 좌석에 앉아 책을 읽고 있었다.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었다.

창으로 들어오는 햇빛에 반사된 책 속 문구가 눈에 밟혔다.


내게 돈은 중요하지 않아
그러면 뭐가 중요하지?
사랑. 
사랑이라고?
사랑은 전투야. 
나는 오랫동안 싸울 거야. 
끝까지. 




작가의 이전글 글쓰는 사진작가의 제주도 여행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