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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시용 Mar 18. 2021

Interviewer's Note No.3

the Persons : Film Storyboard Artist

학창 시절 가장 힘겨워했던 교과목이 '미술'이었습니다. 싫어하는 교과목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색칠하고 그리고 자르고 붙이는 행위가 재미있어 집에서 혼자만의 미술시간을 즐기기도 했죠. 문제는 저의 실력이었습니다. 머릿속으로 상상한 모양과는 전혀 다른 형태의 작품이 탄생했습니다. 제 나이 또래면 누구나 알 법한 밥 로스(Bob Ross) 아저씨가 '참 쉽죠?'라고 하는 말만 믿고 호기롭게 덤볐던 거죠. 결국 다른 사람은커녕 저 자신도 전혀 만족할 수 없는 그림만 그렸고, 그렇게 미술이라는 분야와는 시간이 흐르면서 자연스레 멀어졌습니다.


다른 한편으로 그림을 잘 그리는 이들을 동경한다는 의미이기도 했죠. 머릿속에 떠오르는 장면을 원하는 대로 그려낼 수 있는 사람. 글, 말, 제스처로 표현 방식이 한정되어 있는 저에게 '그림으로 의미를 전달하는 사람'은 인상 깊게 다가왔습니다. 그림이 갖고 있는 전달력이 결코 작지 않으니까요.


더퍼슨스의 세 번째 주제인 '영화 콘티 작가'가 이 정의에 적확하게 들어맞는 직업입니다. 아직 영상으로 만들어지기 전, 시나리오에 적힌 한 편의 영화를 가장 먼저 시각화하는 사람들이죠. 연출가의 머릿속에 자리 잡은 광활한 아이디어를 명확한 장면으로 정제하는 사람이자, 우리가 영화관에서 관람하는 영화 장면들의 설명서를 마련하는 사람입니다. COVID-19로 영화관을 찾는 설렘과 즐거움이 어떤 느낌이었는지 가물가물해질 무렵 영화 콘티 작가들을 만나 인터뷰했습니다. 그림을 잘 그리는 사람에 대한 동경은 차치하고서라도 그동안 재밌게 봤던 한국 영화들의 줄거리가 어떤 과정을 거쳐 완성됐는지 그 이야기를 듣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흥미로운 시간이었습니다.


정작 이들과 대화를 나눈 뒤 든 생각은 콘티가 단순한 '그림 그리기'에 국한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콘티뉴이티(Continuity)라는 단어가 의미하듯 줄거리의 맥락과 정합성을 파악하는 논리력, 스토리보드의 각 장면이 실제 촬영 현장에서 어떤 형태로 촬영되는지 따져볼 수 있는 기술적인 지식, 등장인물의 캐릭터와 의상, 소품, 배경 등 다양한 정보를 취합해 한 컷의 그림으로 표현하는 정보 전달력까지. 작화 실력 이외에 갖춰야 할 능력이 많은 '제2의 연출가'라는 생각이 들었죠. 그림으로 정보를 전달하고 각 영화 전문가들과 합의를 이뤄내는 사람. 이번 시리즈의 부제가 'Image communicator'인 이유입니다.


영화 콘티 작가들과 이야기를 나눴던 시간은 빛을 보지 못한 채 숨겨져 있던 보석을 발견한 느낌이었습니다. 거창한 표현이라 생각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저 역시 생소한 분야를 호기심만으로 접근했던 터라 깊은 통찰에 대한 기대가 크지는 않았죠. 정작 이들과 대화하는 내내 영화를 대하는 저의 편협함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어떤 감독이 제작했는지, 어떤 배우가 나오는지에만 초점을 맞춰 관람할 영화를 선택했으니까요. 감독과 배우가 모든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영화계에서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구성원들의 관점을 이해하는 것이 참 의미 있겠다 생각했습니다. 감독의 연출력과 배우의 연기력만으로 들여다보기에 영화는 방대하며 조밀하기 때문입니다. 앞으로 이어질 더퍼슨스의 영화 관련 주제들도 그동안 스포트라이트를 받지 못했던 이들에게 시선을 맞춰볼 계획입니다.


부디 이 책을 읽는 여러분도 제가 느꼈던 바를 온전히 누리길 바랍니다. 지겹도록 돌려봐 다음 장면에서 어떤 대사가 나올지 외울 정도로 눈에 박힌 영화를 '콘티'라는 또 다른 관점에서 바라볼 때 느끼는 즐거움. 분명 봤던 영화지만 새로운 영화를 대하듯 관람하는 희열. 한 장면 한 장면의 풍미를 온전히 음미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무엇보다 이름 모를 여럿이 모여 영화를 봐도 아무 걱정 없는 날이 하루빨리 다가오기를 고대합니다. 그리고 마음 편히 영화관에 갈 수 있는 날이 됐을 때, 이 책이 새로운 관점으로 영화를 바라볼 수 있는, 더 깊은 통찰로 이끌어주는 도움의 손길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편집장 이시용



<더퍼슨스 No.3: 영화콘티작가>


https://thepersons.imweb.me/book/?idx=154



- 위 글은 <더퍼슨스 No.3: 영화콘티작가>에 실리는 Interviewer's Note 전문입니다.

- 위 글의 모든 저작권은 더퍼슨스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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