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인식 안에서 하나의 상징적 대상으로 살아남기는 쉽지 않다. ‘흰색'하면 ‘깨끗함'이 떠오르고, ‘왼손잡이'하면 ‘이단아'의 이미지가 떠오르고, ‘탄산음료'하면 ‘콜라’가 떠오르는 인식 구조. 지금 우리에게는 너무나 당연하고 기초적이어서 이에 대해 의문을 가지는 것부터 생소하지만, 돌이켜보면 짧게는 수십 년에서 길게는 인류의 역사와 함께하며 학습된 인식들이다.
그만큼 인간의 인식 속 상징체계에 침투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 쉽지 않은 작업이다. 기본적으로 ‘누적'이 필요하다. 자연 상태의 초원에 소수가 걸어가면 길이 생기고 다수가 걸어가면 마을이 생긴다. 왕래의 편의를 위해 건물, 인프라가 구축되기 시작하고 이를 위해 자본이 집약된다. 이렇게 구축된 실제 세계의 공간 점유는 곧 인간 인식 체계의 상징적 점유로 이어지기 마련이다. 3차 산업 혁명을 거쳐 새로운 산업 혁명 시대의 도입부에 위치한 현시대의 인류는 이러한 상징적 점유를 상당한 가치를 지닌 ‘자산'으로 평가한다.
용산 전자상가 일대는 상징적 인식 자산을 소유하고 있는 대표적인 지역이었다. ‘용산'하면 ‘전자기기', ‘IT’를 떠올리던 시기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게임기나 컴퓨터를 구매하기 위해서는 으레 용산으로 향하기 마련이었다. 비단 소비자뿐만이 아니었다. 자신만의 혁신적인 하드웨어, 소프트웨어를 만들기 위해 전국의 청년들 역시 용산으로 모여들어 우리나라 20세기 IT 부흥의 시작을 이끌었다. 앞 문장을 과거형으로 표현한 의도를 강조하고 싶다. 과거에는 그러했으나 현재는 그러하지 않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대한민국 수도 서울 한복판에 위치한 상징적 동네의 침체. 이번 지역 인터뷰 프로젝트 첫 번째 주제로 ‘용산 전자상가 일대'를 선정한 이유이기도 하다.
우선 논의의 대상을 명확히 하려 한다. 용산에는 이태원, 남산, 이촌 한강공원, 서울역 등 지금도 많은 이들이 찾는 역동적인 동네가 존재한다. 개중 우리의 관심사는 ‘용산 전자상가 일대'다. 이곳은 1980년대부터 새로운 밀레니엄을 맞이하던 2000년 전후까지 전자기기의 성지로 자리매김하며 많은 이들을 끌어들였다. 상품이 거래되는 시장 구조로 치환해보면 상품의 생산자, 도매업자, 소매업자, 소비자 모두가 모여드는 대규모 클러스터(Cluster)였다. 전자기기를 구매하기 위해 많은 이들이 몰려들었고, 당시 이 일대가 얼마나 성행했는지 덧붙여 기술하는 것은 사족으로 느껴질 정도다.
가장 대표적인, 동시에 상징적 존재인 전자랜드는 1988년 처음 개장해 PC, 오디오, 비디오 등 다양한 가전제품을 선보였다. 전자랜드 옆으로 시선을 옮기면 용산에서 가장 오래된 상가인 원효상가가 조명기기, 전자악기, 노래방 기기 등의 제품들을 판매하고 있고, 과거 가장 많은 이들이 찾았던 나진상가도 함께 위치하고 있다. 게임을 즐겨했던 사람이라면 적어도 한 번쯤 방문해봤을 두꺼비 상가도 용산 전자상가 일대의 한 축을 담당했으며, 없는 부붐 빼고 모두 갖추고 있다는 PC 부품 전문 상가인 선인상가도 많은 이들의 기억 속에 남아있다. 21세기를 눈앞에 둔 최첨단 기술 태동의 시대에서 그 최전선을 선도하는 신전과 같은 공간이었다.
이러한 신화는 21세기의 시작과 전자상거래 시대가 도래하며 의심받기 시작했다. 오프라인에서 직접 눈으로 확인하며 손으로 만져보고 구매해야 했던 상품들을 집 안에서 주문할 수 있게 됐다. 패션, 식음료 분야와는 달리 기성 제품들의 성능과 규격이 명확히 획일화된 전자기기의 특성은 전자상거래로의 채널 이전 속도를 가속화했다. 성지는 무너졌다. 용산 전자상가를 터전으로 삼아 생계를 이어가던 여러 형태의 판매자들은 과거의 영광을 뒤로하고, 이제는 본인들 스스로에게도 면죄부를 발급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생계의 위협'이라는 개념은 그들의 문제이지 소비자들의 문제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전자상거래의 출현이 비단 우리나라에서만 벌어진 현상이 아니었기에 해외 주요 도시들의 오프라인 상권 몰락 사례를 심심찮게 찾아볼 수 있다. 다만 용산 전자상가 상권의 몰락 속도를 부추긴 이유는 그뿐만이 아니다. 당시 용산 이외 지역에서 쉽게 구할 수 없는 전자기기가 대부분 용산에 몰려있다 보니 수요와 공급의 원리에 따라 상품의 가격이 상승하는 현상이 심심찮게 발생했다. 이러한 가격 상승분이 고스란히 소비자들에게 전가됐고, 결국 온라인 유통 채널이라는 유용한 대체재를 만난 소비자들의 외면으로 귀결됐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2020년대를 맞이한 용산은 코로나 사태라는 악재를 함께 맞닥뜨렸다.
잠시 클러스터의 존재 이유에 대해 짚고 넘어가 보자. 가락동의 청과물 시장, 노량진의 수산 시장 등이 대표적인 클러스터 시장이다. 소비자들은 클러스터에 가면 관련된 거의 대부분의 상품 라인업을 저렴한 가격에 접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신뢰는 소비자들이 지속적으로 시장을 찾게 만들고 공급자는 해당 소비자층을 효과적으로 유치할 수 있다. 더불어 소비자는 정보탐색 과정을 효율적으로 수행할 수 있다. 두세 가게만 다녀보면 특정 상품의 사장가와 특성을 바로 알 수 있다. 클러스터가 존재하는 이유다.
그런데 온라인 채널이 발전하며 해당 채널을 통해 관련 정보를 더 빠르고 다양하게 얻을 수 있게 됐다. 굳이 발품을 들여 오프라인 시장까지 찾아갈 필요가 없어졌다. 게다가 주문과 결제, 배송의 모든 과정이 버튼 몇 개로 이뤄진다. 상품에 대한 정보와 상품 그 자체에 대한 접근성이 확연하게 개선된 것이다. 이러한 기술 혁신은 중간 도소매 유통 단계까지 건너뛸 수 있는 유통 혁신으로 이어졌다. 이와 같은 변화는 상징적이면서도 실제적이었다. 용산 전자상가 일대 도소매상들은 단번에 위기에 빠졌다.
우리는 패러다임(paradigm)이라는 용어에 별다른 감흥이 없다. 여러 맥락에서 여러 행태로 소비되며 닳고 닳도록 소비된 까닭이다. 다시 한번 본래 의미를 떠올려보려 한다. 패러다임은 20세기 미국의 과학철학자인 토머스 쿤(Thomas Kuhn)이 《과학혁명의 구조》에서 처음 제시한 용어다. 특정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인식 체계 또는 이론적인 틀을 지칭한다. 아이러니하게도 패러다임의 전환은 기성 패러다임의 존재를 기반으로 이뤄진다. 기성 패러다임 A가 존재했기에 A와는 다른 새로운 패러다임 B, C가 등장할 수 있다. 용산 전자상가는 이미 A의 과정을 거쳤다. 긍정적인 모습과 부정적인 모습 모두 녹아있는 고정된 개념. 이제 새로운 인식 체계로 전환하기 위한 시도를 필요로 한다.
여러 방법론을 탐색할 수 있겠으나 원론적으로 다음 세 가지 범주로 나눌 수 있다. 오프라인에서만 경험할 수 있는 기존 장점을 강화하는 방식, 기존 특성과 다른 산업을 융합해 새로움을 추구하는 방식, 기존 특성에서 새로운 분야로 탈바꿈하는 방식. 아쉽게도 코로나 사태로 인해 첫 번째 방법을 시도하기에는 큰 제약이 생겼고 다시 진행하기까지 상당한 기간이 필요할 것이다. 그렇다면 남은 방식은 두 가지다. 새로운 분야와의 융합 그리고 새로운 분야로의 발돋움.
앞선 두 가지 방향성을 갖고 용산에서 활동하고 있는 플레이어(player)들을 만났다. 그들은 사업가이기도 하고 크리에이터이기도 하며 기획자이기도 하다. 그들은 새로이 바뀌고 있는 용산 전자상가 일대에서 혁신을 추구하며 매일을 도전하고 있다. 용산의 디지털 대장간을 활용해 아무 자본도 없이 자신의 제품을 만들기도 하고, 새로운 IT 서비스를 만들어 보겠다는 열정을 갖고 상상가에서 해커톤을 개최하기도 하며, 시장에 변혁을 일으키겠다는 창업가 정신을 지니고 외국인의 신분으로 용산 서울글로벌창업센터(SGSC)에 들어가 스타트업을 운영하기도 한다.
그들을 인터뷰했다. 국내 IT 산업의 거점이 다른 지역으로 옮겨 갔음에도 용산을 택한 이유가 무엇인지, 용산만이 갖고 있는 매력이 무엇인지, 앞으로의 용산 전자상가 일대를 어떻게 바꿔가고 싶은지. 이들과의 대담을 거치며 처음 제시했던 ‘용산 전자상가에 대한 인식론적 상징체계'가 어떻게 변해갈지 그 실마리를 찾을 수 있었다. 이를 통해 용산은 다시 한번 국내 IT 부흥의 중심으로 회귀하기 위한 해답을 찾아가는 중이다. 그 해답을 찾기 위한 필자의 역할은 여기까지다. 이어질 인터뷰를 통해 용산을 바꿔가는 크리에이터들이 이야기를 들려줄 것이다.
용산 전자상가 이야기는 다음 글에서 계속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