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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시용 Aug 09. 2024

思母文

누구보다 사랑 넘치고 강인하며 선했던

2024년 8월 3일 토요일 오전 9시 46분. 저희 어머니는 폐암으로 소천하셨습니다.

2023년 말 겨울이 시작될 때부터 기침이 심해지셨습니다. 처음에는 감기인 줄 알았는데 3년 전 항암 치료했던 자궁경부암이 재발되어 폐로 전이가 되었습니다. 이번에는 항암 치료를 못했습니다. 식사를 제대로 못하셔서 급격하게 체중이 줄어 항암 할 체력이 안되기도 했고, 올해 봄부터 의사들의 파업으로 인해 예약된 진료 일정이 한 달, 두 달씩 미뤄지기도 했습니다. 이후 양평에 있는 요양병원에 계셨는데, 진료를 제대로 받지 못하다 보니 오른쪽 발부터 무릎 아래까지 피부염이 생기고 뼈가 아플 정도가 되어 팅팅 붇기도 했습니다.


7월 초에는 식은땀이 흐르고 숨이 쉬어지지 않아 외래를 다니시던 강남 세브란스에 응급으로 실려 가셨습니다. 마지막까지 그곳에 계셨습니다. 마지막 일주일부터는 속도가 급격하게 빨라져서 원래 끼고 있던 4L 산소를 40L로 바꾸고, 모르핀을 투여하고, 일인실로 병실을 바꿨습니다. 가정의학과 선생님께서는 인사 나눠야 할 가족, 친구, 지인분들을 모두 모시라 했고 의식이 있는 상태에서 대부분 힘겹게 인사를 나눴습니다.


토요일 전날 금요일 밤, 급히 처리할 업무를 위해 잠시 사무실에 갔다가 집에서 눈을 붙이고 새벽 3시쯤 다시 병실로 돌아가려 했습니다. 잠자던 중 엄마 옆에 있던 동생에게서 전화가 왔습니다. '오빠 빨리 와', '오빠 제발 빨리 와'. 생각할 겨를 없이, 아니 온갖 생각으로 가득 차 손을 떨며 급히 병원으로 갔습니다. 일반 산소포화도 100을 유지하지 못한 채 어느새 85가 되어있었습니다. 혈압을 재보니 86/62. 모든 숫자가 1씩 떨어지던 모니터 화면과 엄마의 거친 숨소리, 그 지옥 같던 어두운 밤이 생생합니다.


폐암으로 인해 제대로 누워서 주무시지 못했습니다. 누우면 폐가 눌려 침대 등받이를 올리고 앉아서 잠을 자는 둥 마는 중 제대로 잠들지 못했고 섬망 증세도 보였습니다. 많은 이들과 인사를 다 나누고 간 금요일 오후 3시 반. 근 한 달간 제대로 숙면하지 못한 어머니에게 저와 동생이 진정제를 권했습니다. 잠이라도 푹 자고 깨어났으면 하는 마음에. 엄마는 아무 말이 없었어요. 동생이 물었습니다. '엄마 깨어나지 못할까 봐 그래?'. 엄마는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저와 동생은 엄마에게 걱정하지 말라고, 꼭 깨어날 거라고, 엄마가 푹 자고 일어나야 정신이 깨끗해질 거라고 설득했습니다. 엄마는 다시 한번 고개를 끄덕이셨습니다. 그리고 다음날 토요일 오전 9시 46분 심박수가 0이 되는 것을 가족과 엄마의 형제자매 모두 옆에서 함께 지켜봤습니다.




엄마는 못된 엄마였습니다.

아파도 아프지 않은 것처럼 연기하며 결국 자식들 속을 상하게 했습니다. 생각해서 선물을 드려도 미간을 찌푸리며 '에이, 뭐 이런 걸 사와'라며 무안하게 만들었습니다. 여행을 보내주겠다고 해도 본인도 요새 바쁘다며 거짓말을 했습니다. 본인 식사는 쥐꼬리만큼 드시면서 독립한 자식 집에는 매일 같이 찾아와 직접 지은 밥과 반찬을 두고 가시며 가슴 아프게 했습니다. 깔끔 떠는 성격 탓에 독립 후 함께 사는 고양이를 싫어했으면서도 집에 올 때마다 사료와 물을 챙겨주고 청소를 하며 말과 행동이 달랐습니다. 아들은 군대에 가있고 딸은 해외 유학 중에 있어 적적한 마음이었을 텐데도 자식들 부담 줄까 봐 먼저 연락하지 않으며 마음을 속였습니다. 3년 전 자궁경부암이 발병했을 때, 자식들 걱정할까 봐 알리지도 않고 혼자 항암을 견뎌내며 안타깝게 만들었습니다. 이번에 암이 재발되어 폐로 전이가 되었을 때에도, 나이가 들어 살이 빠진 거라며 속이다가 이모를 통해 알게 했습니다. 자신이 떠나고 자식들이 보며 눈물을 흘릴까 봐 우리들의 옛 추억이 있는 사진 앨범을 가족들 몰래 없앴습니다. 자식들이 어렸을 적부터 집안 형편이 좋지 않았음에도 잘 커주어 고맙고 미안하다며 전혀 이치에 맞지 않는 말을 했습니다.


엄마는 못된 엄마였습니다.

그래서 엄마를 사랑했습니다.


마지막까지도 자식 걱정이었습니다. 본인은 폐가 거의 기능을 못해 숨이 차 새벽 내내 잠들지 못하는 상황에서도 병간호하는 우리는 집에 가서 편히 자라며 말해줬습니다. 섬망 증세가 있을 정도로 정신이 힘든 상황에서도 25일이 아파트 관리비 확인하는 날이라며 톡을 남겼습니다. 거동이 불편해 침대 생활을 하며 온갖 곳에 욕창이 생기는데도 병간호가 서툰 아들에게 짜증 한 번 내지 않았습니다.




저희 엄마는 누구보다 사랑이 넘쳤고 강인했으며 선하신 분이었습니다.

자녀로서 받은 상속이 있다면 돈도, 부동산도, 주식도 아닌 헌신적인 사랑의 표본과 평생 힘든 역경 속에서도 버텨낸 강인한 정신, 그리고 항상 남에게 폐 끼치지 않으며 거짓 없이 살았던 선한 모습입니다.


그렇기에 엄마와 천국에서 꼭 다시 만나자 했던 마지막 약속 역시 꼭 지킬 것이라 생각합니다.

발인을 마치고 엄마의 본가인 양평에 유골함을 모시고 다시 서울로 돌아오는 차 안. 요즘의 날씨처럼 갑작스레 폭우가 내려 어떻게 집에 갈지 걱정이었습니다. 거의 차에서 내릴 때쯤 거짓말처럼 비가 그쳤습니다. 장례식장에서 상복을 평상복으로 갈아입고 다시 집으로 돌아가는 길. 한강 건너편으로 무지개가 걸려있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우연의 일치야, 요새 여름이니까 그렇지, 그저 과학적인 자연 현상이야 라고 치부할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저는 엄마가 후드득 내리다 그친 비를 통해 이제 슬픔은 씻어 보내고 새로운 마음으로 다시 시작하라는 뜻으로, 무지개를 통해 엄마는 천국에 잘 도착했다는 뜻으로 믿습니다.


사랑하는 엄마를 매일 떠올리되, 더 이상 슬퍼하지 않습니다.


누구보다 사랑이 넘치고 강인하며 선했던 故 신정순을 아름답게 기억해 주시길 바랍니다.


더불어 이번에 찾아와, 또는 메시지로 저희 어머니를 위해 기도해 주시고 가족을 위해 위로해 주신 분들께 감사 말씀 드립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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