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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밍경 emb Aug 17. 2024

전성기의 다음 장면도 유쾌하게, 저질스럽게

DOES - 수라(修羅)

애니메이션 '은혼'


한 세기를 풍미한 젊은 영웅의 나머지 삶은 어떨까.


<은혼>이란 만화가 있다. 70권 대까지 나온 책을 전부 사모았고, 애니메이션에 실사 영화까지 섭렵했으며, 일본 원서까지 몇 권 소장할 정도로 나는 이 만화를 좋아한다. 


장르는...설명할 수 없다. 실제 팬들 사이에서는 <은혼>의 장르는 <은혼>이란 농담이 있다. 메이지 유신대체 역사물에 SF를 더하고, 소년 만화에 B급 농담, 19금 드립을 섞은 데다가, 고전 게임에 대한 찬양까지 얹은 짬뽕 같은 만화. 나같은 팬도 친구들에게 섣불리 같이 보자고 추천을 못 하겠는, 그런 요상하고 매력적인데 진입 장벽은 높은 책이다.


본색이 개그 만화라 에피소드식 스토리가 주로 펼쳐지지만 큰 줄기는 심오한데, 그 중심에는 팬들의 압도적인 지지를 받는 주인공, '사카타 긴토키'라는 주인공이 있다. 도박에 빠져 살고 집세도 못 내는 날백수 건달 변태로 그려지지만 한 때는 레지스탕스를 이끌던 리더였다...는 게 공식 설정이고, 그에 걸맞는 싸움 실력을 종종 보여주며 스토리가 이어진다. 


가장 흥미로웠던 대목은 이 인간이 '한 때' 잘 나가던 사람이었다는 것. 외세에 굴복한 정부에 반발하며 반란을 일으켰고 위세를 떨쳤지만 실패한 뒤, 최고의 지명수배자가 되어버린 때까지가 어떻게 보면 그의 전성기었는데, 특이하게도 이 만화는 주인공의 '전성기'를 조명하지 않는다

이 만화의 1화는 전성기를 한참 지나 외세가 이미 대세가 되어 버린 어느날, 환락가 골목에 자그마한 심부름센터를 차려 겨우겨우 살고 있는 한 남자를 소개하는 에피소드로 시작하니까.



그러니까 한 세기를 풍미한 젊은 영웅은, 자신의 이름을 모르던 사람이 없던 시기를 지나, 발에 채이는 어떤 '꼰대'가 되어서 살아가고 있는 것. 

여느 소년만화같은 감동적인 성장 스토리나, 거창한 명분을 가지고 여정에 나서는 그런 이야기는 <은혼>에 없다. B급 저질 개그를 걷어내고 요약하면 이 만화는, 한 때 잘 나갔던 과거의 영웅이 처절하게 실패한 뒤 PTSD를 겪으며 살아가는 슬픈 스토리가 은은하게 깔려 있다.



잘 나가는 사람들을 기억하는 건 쉽다. 팩트만 기록해도 그의 행동 자체는 스토리가 된다. 그러나 그 반짝거리는 순간의 빛이 지나간 다음 장을, 사람들은 그다지 궁금해하지 않는다. 언제나 새로운 스타는 등장하기 마련이며, '지나간' 사람들 돌이켜보는 건 썩 재미있는 일이 아니니까.


그래서 나는 이 책을 좋아한다. 처음부터 끝까지 '지나간' 사람의 이야기를 그려내는 책은 흔치 않다.


상처받은 영웅은 터덜터덜 삶으로 돌아와 삶의 내리막길을 걸어 내려간다. 그러나 상처를 어루만져주고, 어느 사지에든 뛰어들 수 있는 주변 사람들이 하나둘씩 생기면서, 주인공은 끔찍한 트라우마 대신 웃으면서 빛나지 않는 삶의 다음 장을 마주할 수 있게 된다. 이 과정에서 나는 다시 지금, 현재, 내 주변을 이루고 있는 '소중한 것'의 의미를 되새겨볼 수 있다. 




빛나는 시절이 끝났다고 하여 긴토키의 삶은 끝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그 때부터 긴토키의 삶과 <은혼>이란 만화는 시작됐다.

그리고 이 공식은, 우리의 삶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이 글을 읽는 모두는 영웅이 될 수 있거나, 지금 영웅이거나, 아니면 한 때 영웅이었을 거다. 영웅이란 건 곧 무엇이든 다 될 수 있고 그 자체로 주목받는 것, 즉 '젊음'이라는 단어와 치환되는 거니까.

'영웅서사'가 미래거나 현재인 사람들을은 그저 그 순간을 즐기면 된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 어딘가에는, '영웅이었던' 삶을 끝없이 되새기면서 내리막길을 걸어가는 스스로를 자책하는 '긴토키'들이 있을 거다.



기억했으면 좋겠다. 전성기의 다음 장에도 삶은 흘러가고, 소중한 사람들은 변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각자 저마다의 세계가 있으며, 그 세계에서 우리는 늘 주인공이자, 전성기이자, 현재를 살고 있다.



인생의 내리막길도 유쾌하게, 재미있게, 가끔은 저질스럽게, 그렇게 본연의 모습대로 살길 바란다. 

나의 <은혼>은 언제나, 오늘부터 1화로 시작한다.






焼け付く想いは

憂い募らせる

重なる面影を

見つけては項垂れている


一, だれか僕の

ニ, 火を消して

三, 飛ばしてくれ

四, イエイエ



불타버린 마음은

슬픔이 한층 더해진다

겹쳐지는 옛모습을

발견하고는 고개를 숙인다


하나, 누군가가 나의

둘, 불을 꺼뜨려

셋, 날려보내주오

넷, yeah yea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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