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4.화나 - Power

철없는 고블린은 진화를 거쳐 괴물이 되었다

by 밍경 emb

https://www.youtube.com/watch?v=uTqU76wHMOM


실패와 성공은 뭔가 이제 와 정공은 뭔가
그렇게 좇던 증명과 그 놈의 영혼은 뭔가
되물어본들 정작 못 얻은 정답
어쩌면 결국 변화 속 겉도는 건 나 아니었든가

더 큰 나로 거듭나고픈 한편
부담을 얻는 다는것을 향한
출처를 알 수 없는 강한 거부감
서른 맡 불현듯 날 엄습한 건
그 딴 모순과 허무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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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임: 몬스터


화나는 치밀한 아티스트였다.

화나의 전성기는 2000년대 후반이었다. 힙합 레이블 소울 컴퍼니에서 활동하던 시기였다.

화나의 별명은 '라임 몬스터'였다. 별명답게 정확히, 모음만으로 조립된 가사를 찍어냈다.

숙련된 수공예 장인을 보는 느낌이었다. 쓴 가사 자체보단 가사를 어떻게 만들어내는지에 주목할 수밖에 없었다. 예컨대 이런 식.


Type1

힙합이 이 땅 위 자리잡기까지
차디찬 시각이란 비탈길과 실랑이

ㅣㅣㅣ ㅣ ㅏ ㅣ ㅏㅣㅏㅣㅏㅣ
ㅏㅣㅏ ㅣㅏㅣㅏ ㅣㅏㅣㅏ ㅣㅏㅣ

(동전한닢 remix 中)


ㅣ,ㅏ 등 모음으로만 이루어진 운율이 연속적으로 배치된다


Type2

손목시계라는 이름의 수갑은 날 숨 못 쉬게 해

숨 가쁜 난 슬며시 계속 가슴만 쓸며 신께 숨겨 쉽게

쓴 결심에 스며 쉰낼 풍기는 무기력증을


[손목시계]라는 이름의 <수갑은 날> [숨 못 쉬게 (해)]

<숨 가쁜 난> [슬며시 계]<속 가슴만> [쓸며 신께] [숨겨 쉽게]

[쓴 결심에] [스며 쉰낼] 풍기는 무기력증을

(Deadline 中)


[] 끼리, <>끼리 같은 운율이 교차되며 반복된다



이미지:고블린과 악마


그러나 전성기 화나의 장점은 라임만이 아니었다. 화나는 가사를 조립하는 걸 넘어, 조립한 가사를 자신만의 이미지로 포장해 잘 전달했다. 물건도 좋은데 포장지도 좋았던 셈이다.

화나라는 아티스트는 자신의 독특한 목소리를 만들었다. 목을 갈아서 내는 듯한, 그러나 구덩이에서 울리는 듯한 발성을 고블린, 몬스터, 괴물이라는 단어와 결합시켰다. 당시 화나가 발매한 앨범 커버에는 화나가 보여주고자 했던 이미지가 적나라하게 드러나있다.


화나 1.jpg 화나 정규 1집-Fanatic(2009)


당시 힙합은 주류 음악이 아니었다. 그나마 주류였던 힙합 아티스트가 에픽하이었다. 그조차도 언더그라운드의 감성 담긴 노래보다 달달한 사랑노래가 순위권에 올랐다.


추측이지만 당시 화나는 애초에 메이저가 될 생각까진 없었던 것 같다. 하지만 욕심이 없다는 의미로 연결되진 않는다. 메이저는 아닐지언정 탄탄했던 힙합 마니아층이 고블린,악마, 라임 등의 요소로 덕질(!)할 수 있는 영역을 한가득 열어놓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블루오션에서의 마케팅은 성공적이었다.


힙합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화나는 이름만으로 브랜드가 되었다. 브랜드 자체를 좋아한 사람들은 기꺼이 지갑을 열었다. 화나는 자신만의 세계관과, 블루오션에서 돈이 되는 세상을 동시에 만들어냈다.


다만 2000대 후반의 화나는 철저히 하드웨어에 초점을 맞추는 사람이었다. 자연스럽게 소프트웨어, 즉 내용적인 깊이는 없었다. 무거운 주제를 말하면 허세처럼 느껴졌다. 가벼운 주제를 말하면 영양가 없는 자기 자랑만 늘어놓던 헛스웩(swag)이 되었다.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의 격차가 심햇다.


개인적 취향이지만 깊이 있는 가사를 선호한다. 그래서 나는 화나라는 아티스트를 선호하지 않았다. 상업성 있고 잘 만든 애플의 아이폰을, 모두가 좋아하는 건 아닌 것처럼.



힘은 빼고, 깊이는 더하고


2017년 화나는 정규 3집 <Fanaconda>를 들고왔다. 관심은 있는 아티스트여서 앨범을 샀다. 좋아질 수밖에 없었다.


소위 말하던 2000년대 후반 전성기가 지났다. 짧게 잡으면 5년, 길게 잡으면 10년의 세월이었다. 화나는 계속 노래를 만들었다. 유행은 바뀐다. 그 사이 힙합은 메이저 음악이 되었다. 힙합 안에서도 탄탄한 구조보단 화려함이 선호받았다.


화나는 시류에 휘둘리지 않았다. (외모는 늙지 않았지만) 자기가 부족한 소프트웨어를 묵직하게 채워넣었다. 라임에 대한 편집증적인 집착(결단코 부정적인 말이 아니다)을 조금 덜어내고 가사의 깊이를 한껏 살렸다. 라임의 무게를 빼고 깊이를 더한 곡들 중에는 유달리 마음이 가는 노래도 있었다. 지금 소개하는 Power다.


노래는 후배들을 바라보는 선배, 후배들을 돕고 싶은 선배로 시작한다. 막연히 후배들을 돕겠다는 다짐으로 연결될 듯하지만 예상을 벗어난다. 선배는 자신이 이 일을 하면서 장르와, 음악과, 철학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지 않았다는 자기반성을 거친다.

반성의 과정이 곡의 절반을 훌쩍 넘는다. 결론은 정확히 묘사하지 않았지만 어떤 힘(power)을 얻겠다는 다짐으로 끝난다. 권력 혹은 영향력이라고도 해석될 수 있겠다. 상당히 솔직한 끝맺음이다.


정답인지는 확신할 수 없으나 진실은 느껴진다. 라임에 대한 집착을 좀 많이 내려놨지만, 어차피 앨범의 다른 곡에서 자신의 능력을 충분히 보여주고 있으니 괜찮다. 화나는 성장했다.

성장이라기엔 끝난 느낌이 드니 진화라고 하자. 화나가 정규 3집에서 보여준, 시류에 흔들리지 않는 진화의 과정이 좋았다.



Outro


앨범의 모든 곡이 좋다. 기왕이면 앨범을 통째로 듣는 걸 추천한다.

곡과 곡 사이의 연관성은 없지만, 각 곡이 화나라는 아티스트의 개별적인 장점을 드러내준다.

풍성하고 잘 만들어진 앨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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