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항상 늦었고, 그 날은 2 년째 추적대는 비가 내린다.
나는 가까이 죽음을 느껴본 적이 없다.
때문에 죽음의 공기와 모양을 알지 못한다.
나는 종교가 없다.
그래서 4월 16일이 되면 마음이 복잡해진다.
형체 없는 기도가 형체 없는 죽음에 닿는다면, 형체를 찾은 간절함이 하늘로 정해질까.
대략 이런 생각을 하는 것 같다.
4월 16일 근처에는 4년째 비가 온다.
나는 물을 좋아한다.
물에 들어갔을 때 다리가 닿지 않아 둥둥 떠있는 듯한 자유로움.
몸이 묶여있어야 할 땅이란 공간에서 떨어졌을 때, 물결이 발바닥을 스쳐나가 간지럽히는 감각이 키득거릴만치 우습다.
이날만큼은 물이 무섭다.
물이 무서워지는 날에는 비가 내린다.
차라리 확 쏟아내주면 좋으련만, 비는 우산을 바투 쓰지 않는다면 어느새 어깻죽지를 적실 정도만 내린다.
물과 죽음이 얽힌 4년 연속 비가 찾아온다.
물은 좋아하지만 비는 좋아하지 않는 나는 물과 비가 모두 슬퍼져 더욱 마음을 엔다.
4년 전 4월 16일, 나는 이 나라에 있지 않았다.
내가 간 유럽의 어느 나라는 미치듯 쨍한 햇살이 4월의 여름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부활절의 축제 기간이었는데, 오직 나한테만 죽음이 어우러졌다.
내 옆으로는 세계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들 정도로 크다는 오래 된 성당의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사람들은 죽음에서 돌아온 예수를 찬양했다.
나는 타들어갈 듯한 햇살 아래에서 행진 소리를 들으며 형체 없는 간절한 기도를 형체 없을 신에게 올렸다.
그 날이 다시 와, 죽음에 얽힌 시간과 기억의 잔상이 오지 않은 죽음만큼 두렵다.
많은 이가 죽었고, 많은 이가 떠나서 결국 많은 이가 울었다.
많은 이는 여전히 울고 있고, 울고 있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 많은 일을 해냈다.
많은 이가 기억하고, 그런 많은 이를 누군가는 증오한다.
어떤 이는 기억을 이용해 영달을 추구하고 많은 이들은 또 거기에 휘둘린다.
나는 그 슬픔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며, 증오는 차마 받아들이지 못한다.
형체 없음에서부터 파생된 증오의 단말마에 대해서 나는 때로 똑같이 증오한다.
방식이 잘못되었을지언정. 발버둥마냥.
나는 일부러 기사를 찾아보지 않는다.
그러다 다시 비가 오고 어깻죽지가 젖으면, 내 가방에 매어둔 잊지 않을 흔적을 혼자 되뇌인다.
나는 항상 늦었다.
4년 째 16일에는 비가 온다.
요새만큼은 형체 없음을 그 자체로 믿어보고 싶다.
형체 없는 기도가 형체 없는 간절함을 만나 죽음에 몸을 의지한 누군가들에게 전해질 수 있다면.
언어로 차마 제단할 수 없는 감정을 말과 빗물 하나에 꾹 눌러담아 전하고 싶다.
잊지 않는 행동은 아마
형체 없음에 형체를 덧대는 유일한 수단일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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