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겨울-후쿠오카 4만 걸음(2/2)

by 밍경 emb

구시다신사를 지나 10시 50분쯤 배고픔을 못 참고 이치란라멘을 먹었다.

엄청나게 큰 라멘집에 한국어로 된 메뉴판을 받아들고 10분을 기다리다 들어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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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론 이번 여행에서 먹은 음식 중 가장 별로였다. 그러고보니 어른이 되고 간 네 번의 이전 일본 여행에서 이치란라멘을 먹은 적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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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의 일본은 한국의 2029년쯤 지난 세상이라 하던데 그건 경제나 사회 시스템에 해당되는 이야기인 것 같고, 사실 도시와 골목들 자체는 오히려 2009년쯤 잃어버린 한국의 모습을 보여주곤 한다.

오호리공원과 마이즈루 공원으로 걷다 만난 만화책 대여점. 어릴 땐 참 많이 빌려보던 만화책이었는데 이젠 대여점이 한정판 만화책보다도 희귀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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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즈루 공원에 진입하기 전.

시들어빠진 연못의 풀은 연꽃같이 보였는데, 구멍 술술 뚤린 연근도 간신히 알아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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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즈루 공원은 사실상 후쿠오카 성터가 남아있기만한 동네 아주머니들의 종합 운동공간이었다.

여기가 한국인지 아닌지 헷갈릴 정도로 화려한 등산복을 입은 아주머니들이 야산을 걸어다녔고 흙먼지 날리는 축구장에선 고등학생들이 공을 차고 놀았으며 할아버지들이 곳곳에서 배드민턴을 쳤다.


관광지가 아닌 공간으로 들어온 덕분에 영어 한 줄도 못 듣고 성큼성큼 걸어다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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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글 지도는 여행자에게는 필수 어플리케이션이지만 또 생각보다 친절하지만은 않다. 골목길인줄 알고 따라간 곳이 사실은 조용하디 조용한 주택가일 때가 많다.

다만 가끔 그런 불친절 사이에서 예상 외의 풍경을 마주칠 때도 있는데, 이번에도 마찬가지로 마이즈루 공원에서 오호리공원으로 넘어가는 길에 후쿠오카 어느 곳보다도 일본스러운 주택가 골목을 마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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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는 관광객 수준을 넘어 사람 자체를 볼 수가 없었는데, 길목을 자기들 집처럼 점령하고 앉아있던 고양이부터 온갖 잡다한 꽃들로 자그마한 정원을 장식해놓은 모양이 꼭 일본의 감성이었다.


한 20분 정도를 보면서 곳곳을 훑었다. 일본 첫 날 여행 중 가장 좋았던 기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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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만 5천보쯤 걸어가며 도착한 오호리공원은 석촌호수와 여의도공원의 그 어디쯤을 옮겨둔 느낌이었다.


두루미가 겁도 없이 사람들 근처로 돌아다니는게 신기했고, 유일한 명물 스타벅스에만 사람이 득시글거리는것도 흥미로웠다만 사실 이쯤 되니 조금 춥고 배고픈데다(오후 2시쯤 되었었다) 너무 예쁜 골목을 통과해 오는 바람에 감동은 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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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는 대충 훑고난 뒤, 오다가 꼭 먹고 싶었던 우동집이 마침 1km쯤 떨어져 있다 해서 다시 그 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가는 길에 찍은 사진인데, 노출도 제대로 조정하지 못 했지만 사진 가운데에 있는 노인 세 명을 꼭 잡아내고 싶었고 또 그 노인 세 명이 마음에 들었다.

특히 왼쪽에 있는 노부부는 '차려입었다'는 단어가 그 누구보다 긍정적으로 어울리는 한 쌍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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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찬가지로 우동집에 가는 길에 찍은 사진. 운전석과 조수석을 오가는 빨간 옷 아기가 너무너무 귀여웠다.


이 사진도 내가 좋아하는 일본 특유의 감성이 느껴져서 애정이 간다. 왠지 모르게 일본 차들은 다 귀여웠는데, 소형차 자체도 많은데다가 그 소형차들이 죄다 주둥아리가 짧은 편이라 더 그러는 듯 하다.

게다가 앞에서 언급했듯이 일본은 차 자체도 형형색색인 경우가 많다. 흰색 회색 검정색으로 통일한 우리나라와 달라 조금 부러웠던 부분이다.


그리고 다리 빠지게 걸어갔던 시나리우동은 이유를 모르게 문을 닫았었다...

하필 시나리우동이란 가게는 우리로 치면 연남동 주택마을 어느 한 구석에 숨어있는 우동집이어서, 근처에 먹을 데도 없는데다가 지하철역도 멀었다. 이 때 나는 2만 8천보 정도를 넘은 터라 다리가 정말 아픈데다가 짜증이 솟구쳐 처음으로 지하철역으로 향했다.


지하철을 탄 이유는 간단했다. 근처에 도대체가 카페가 없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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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은 정말 카페가 없다. 커피 맛있고 유명하다는 일본에서 카페 찾기가 이렇게 어려운 점도 이 나라의 양면성이라면 양면성이다.

지하철로 한 정거장을 이동해 도토루커피가 있는 니시진 역에 내렸다. 더럽게 비싼 일본 지하철 가격은 한 정거장에도 200엔. 2009년도 아니라 1999년 초등학생 시절 이후 본 적 없었던 지하철 종이 티켓이 2019년 일본에서 쓰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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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토루커피는 딱 체인점 커피스러웠고 2층짜리 카페에는 나 홀로 공부하는 젊은 일본인들로 꽉 차있었다. 일본에서는 어느 카페든 아이스 커피를 시키면 우리의 스타벅스 오늘의 커피처럼 만들어놓은 아메리카노만 따라주었고 그래서 커피는 약간씩 시큼했다.


4시까지 잠시 쉬다가 후쿠오카시 박물관 쪽으로 다음 코스를 정했다. 번화가 한가운데에서 군것질거리도 아닌 채소를 팔고 있는 노점상이 인상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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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쿠오카 역사를 보러 간 후쿠오카시 박물관에는 난데없이 코난 전시회가 열리고 있었다. 같이 간 친구는 마침 코난 마니아였고 그저 코난에 대한 무엇을 한다는 것만으로 홀려서 우리는 각자 1000엔씩을 내고 전시장에 들어갔다.


들어가서야 이 코난 전시회가 무엇을 전시했는지 알았는데, 내 생각보다 훨씬 신박했다. 쉽게 말하면 이 곳은 공간을 옮겨가며 한 살인사건을 추리해보는 전시회였다. 게다가 탐정 사무소-카페-살인사건이 벌어진 장소 등 코난이란 이야기가 펼쳐지는 공간과 이 전시회에서만 보여주는 살인사건이란 스토리가 벌어지는 장소를 실제 크기의 모형으로 꾸며놓고 있으니 팬이라면 눈이 돌아갈 법 하다. 게다가 관람객은 그 모형 공간에 직접 들어가 힌트를 찾은 뒤, 펜으로 힌트를 기록하고 최종적으론 살인범을 찾아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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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탈출같기도, 추리소설같기도 한 이 신박한 전시회에는 애들뿐아니라 커플, 어른들도 무척 북적였다. 처음에는 친구를 비웃으며 마냥 웃기만 했는데 모형 전시관을 따라가다 보니 나도 모르게 추리 자체에 한껏 빠져서 누가 범인인지만 고민하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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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컨셉 자체는 좋지만 한국에 도입했으면 대폭 망했을 것 같은 전시회일텐데...

이 나라에선 지역을 돌며 순환 전시를 열 정도로 성공적이다.


의아했지만 한 시간동안 전시장을 돌아다니다보니 어느 정도 수긍이 갔다. 단순하지만 세심한 모형 공간 배치는 최대한 실제 상황을 구현하기 위해 아주 작은 것에도 신경을 쓴 흔적이 보였고(예를 들어 만년필이 놓여진 방향을 왼손잡이인 범인에 맞춰 우상좌하로 배치시킨다거나), 체험 서비스는 사람들이 기다리지 않도록 최소 대여섯 개의 기계를 놔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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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선 항상 비슷한 느낌을 받았다. 이 전시회뿐 아니라 어느 음식점에 들어가도, 손님에 대해서는 과도할 정도로 배려가 몸에 배여 있었다. 아이스 커피를 들고 음식점에 들어가 앉으면 직원이 자연스럽게 아이스커피를 냉장고에 넣어드릴까요? 하고 물어보거나, 음식 사진을 찍고 있으면 조용히 옆으로 다가와 직사광선을 적다리 가려 노출 때문에 사진이 망하는 걸 막아주는 거다.


이런 과도한 배려는 한국,중국,유럽,미국, 그 어디에 가져가도 어색해져버린다. 결국 이 곳 사람들이 공유하는 독특한 배려 문화가 모여 '일본스러움'이란 형용사를 만들어내고, 그게 다시 일본만의 고유한 특색으로 자리잡은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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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는 상설 전시를 보려 했는데 코난 전시회장을 나오니 박물관이 문을 닫아버렸다.

아쉽지만 6시쯤 후쿠오카 타워로 이동했....지만 충격적인 소식을 들었다. 우리는 토요일에 후쿠오카에 도착했는데, 후쿠오카 타워가 금요일인 어제부터 내부 공사에 들어가서 전망대에 갈 수 없다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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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동집도 문을 닫고 후쿠오카 타워 전망대까지 틀어막히니 이번 여행은 운이 지지리도 없나보다, 한탄만 나오던 날이었다.

3만 5천 걸음을 넘어선 후쿠오카 여행의 하늘이 금새 어두워졌다. 아쉽지만 후쿠오카 타워는 외경만 본 뒤 모모치해변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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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모치 해변은 가고 싶은 마음보다는 왠지 한 번쯤 가야할 것 같아서 와본 곳이었다.

어두컴컴해 잘 보이지 않는 바다 너머로 결혼식장이라는 공간 하나만 유럽의 분위기를 내뿜고 있었다.

간단히 불빛만 바라보다가 다시 니시진역으로 돌아와(모모치해변에서 약 20분은 걸어야 한다) 나카스카와바타로 와 요시즈카 우나기야라는 장어집에서 장어를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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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돈으로 3만 5천원에서 4만원 사이의 돈을 내면 장어 네 조각과 녹차, 밥, 장어 내장을 넣은 맑은 국, 야채절임반찬이 한 세트로 나온다.

가성비로 따질 음식은 아니었지만 구성에서부터 요리에 대한 자부심이 느껴졌다. 이 곳이 후쿠오카에서도 유명한, 몇백년이 된 장어집이라고 하던데 몇백년동안 진짜 있었는지는 합리적 의심선상에서 솔직히 모르겠다만 적어도 백년쯤 지난 집에서 "이게 완성품이다" 라고 말하는 듯한 포스가 있었다.

장어와 밥을 담아온 도시락통마저 노쇠하고 해탈한 듯 보여서 조용히 밥을 먹고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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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만 걸음을 채웠을 때 하카타역으로 걸어가던 중 들린 어느 시장 구석 이자카야에 들러 닭껍질구이를 먹었다. 11시쯤 된 선술집에는 일본인 커플과 샐러리맨, 그리고 두 명의 한국인 남성 여행객이 있었다.

두건으로 머리를 싸맨 30대 초중반의 남자가 능숙하게 돌려가며 구워준 꼬치에 삿포로 맥주 한 잔을 곁들이니 뭉친 다리 근육의 통증이 그제서야 느껴졌다.


소문의 닭껍질구이도 맛있지만 곱창 구이가 정말 괜찮았다. 역시 일본 이자카야는 다르다며 여행 첫날 굉장히 즐겁게 하루를 마무리했는데, 사실 진정한 일본의 이자카야는 여행 나흘째 저녁에야 만났고 그 압도되는 경험에 첫날 이자카야는 다 쓸려가버렸다.


PS

이번 일본 방문에서 후쿠오카 여행은 사실 메인이 아니었다. 후쿠오카는 하루쯤 몰아치고 나머지는 사가현 후루유마을이란 산골짜기에 틀어박혀 숨 쉬고 온천 하고 밥 먹고 책 보는게 목적이었다.

그래서 두 번째 일본여행 포스팅은 후루유마을과 료칸체험이 될 예정이다. 세 번째이자 마지막 일본여행 포스팅은 앞서 언급한 '충격적인 이자카야' 이야기로 마무리할 계획이다. 이 이자카야는 충분히 그럴 가치가 있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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