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색 콘크리트 자갈벽과 햇볕이 통하지 않는 철문 속엔 사람이 살았다
2014년, 프랑스에서 1년 남짓 학교를 다녔다. 집을 떠나니 혼자 살 공간이 필요했다. 나는 지역에서 공공서비스 차원에서 지어준 학생 단체 아파트를 선택했다.
집 밖에 나오면 바로 보이는 거주지의 사진.
도저히 미학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디자인이다. 나중에 알았지만 이 곳에 거주하는 학생들은 이 아파트를 'Alcat Community' 라고 불렀다. 프랑스에서 유명한 교도소의 이름을 따서 만든 별칭이었다. 실로 적절한 작명이다. 여튼...
다섯평 남짓한 내 방 안에서는 의식주가 해결 가능했다. 부엌과 화장실 그리고 침실이 한 공간에 모여 있는 이 곳은 한국말로 흔히 쪽방이라 부른다. 그러나 나는 힘주어 발음해야 하는 이 단어보다 오히려 원룸이라는 왜래어가 더 편하다. 음식 재료가 들어오고 쓰레기가 나가는 일을 제외하면 다섯평 남짓한 방에서 며칠을 있어도 살아갈 수 있는 세상. 이 글은 그런 세상에서 일상을 살아가던 학생들의 이야기다.
옆집 남자는 나와 동갑, 혹은 한두 살 정도 많다. 건물의 가장자리, 돌출된 부분에 위치하기에 삼면이 외벽으로 이루어진 내 작은 집의 유일한 이웃 사람이다. 다시 말하면, 유일한 내벽을 마주보고 살아가는 사람이다.
공대생이라고 하는 그는 영어를 잘 하지 못한다. 프랑스어 발음의 억양이 매우 강하고, 입 안으로 소리를 울리며 내기 때문에 나는 그의 말을 이해하기 굉장히 어려웠다. 그를 처음 만나게 된건 낮선 땅에 들어오고 약 삼일이 지난 후였다. 집에 적응하지 못해 이리저리 물건을 옮겨야 했던 때, 나는 방문을 열고 담배를 태우던 그와 어색하게 인사를 나누었다. 그 후 몇번인가 길목에서 마주쳤다. 하지만 그는 영어를 못하고 나는 그의 불어를 이해하지 못했다. 우리는 어색하게 인사를 나눈 후 각자의 길을 걸어갔다.
제대로 이야기를 나누게 된 계기는 순전히 내 필요에 의해서였다. 어쩌다 보니 불운이 겹쳐 내 방에서는 아파트 공용 무선 인터넷을 사용할 수 없었다. 이 나라에서 서비스를 해결해주겠거니, 마냥 기다릴 수는 없었다. 내가 선택한 길은 옆집 남자가 사비로 설치한 무선 인터넷을 나눠쓰자고 제안하는 것이었다.
이사온지 일주일이 조금 지난 밤, 처음으로 옆집의 철문을 노크했다. 절반의 요금을 내고 무선 인터넷 비밀번호를 사겠다고 제안했다. 약 오초간의 고민 끝에 그는 승낙했다. 그렇게 짧고 간단한 거래가 이루어졌다. 내가 사는 기간 내내 거래는 지속됐다.
사실 그는 무선 인터넷을 따른 친구와도 함께 나누어 쓰고 있었다. 그는 무선 인터넷의 비밀번호를 자주 바꿨다. 옆집 남자는 보안을 위해서라고 말했다. 비밀번호를 바꾸는 날짜는 내가 돈을 지급해야하는 날짜와 엇비슷했다. 그와 내가 나눈 페이스북 메세지는 전부 무선 인터넷 비밀번호 혹은 인터넷에 대한 금액 독촉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와 거래한 내내 그는 비밀번호를 총 여덟 번 변경했다. 내가 그에게 인터넷을 공유하자고 요구한 후, 그의 비밀번호는 2개월동안 바뀌지 않았었다. 그러나 떠나기 전 달, 그의 비밀번호는 세 번 바뀌었다.
윗집에는 또 다른 남자가 살았다. 그는 파티를 좋아했다.
얼굴을 제대로 본 적은 없었다. 금요일마다 그의 집은 친구들이 드나들었고 다 같이 술을 마셨다. 새벽 한시에 음악소리와 젊은 여자의 웃음소리, 쿵쿵대는 발소리가 들렸다. 처음에는 소음이라 생각됐지만, 몇 달 지나자 짜증은 적응으로 바뀌었다.
그는 EDM(Electronic dance music)을 좋아했다. 그 밖에도 술을 마시며 놀기 좋은 여러 음악이 들려왔다. 가끔 나는 일부러 창문을 열어두고 그가 틀어놓은 클럽 음악을 감상했다. 두 가지 다른 박자의 음악이 교묘히 얽혀 들어가던 순간이 재밌었다. 그러나 그가 몇 살인지, 어떻게 생겼는지는 전혀 알지 못했다.
거주 오개월 차, 아래층 세탁기에 넣어둔 삼유로치의 세탁물을 꺼내러 방문을 나섰다. 윗집의 문이 열려있었다. 신기하게 생각하던 순간, 계단에서 한 중국인 여자와 마주쳤다. 안경을 쓰고 편안한 복장의 옷을 아무렇게나 걸쳐입은 채 머리를 질끈 묶은 평범한 동양인이었다. 좁은 계단에서 그녀는 나를 위해 살짝 자리를 비켜주었다. 나는 웃음과 목례로 답했다. 내가 내려간 후, 그녀는 계단을 한 층 더 올라가더니 내 윗집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그 날은 금요일이었다. 이후, 간간히 흘러나오던 일정한 박자의 클럽 음악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파티를 좋아하던 그가 언제 이사를 갔는지 나는 끝까지 알지 못 했다.
같은 층의 세 칸 떨어진 방에는 한 여자가 살았다. 그녀는 흑인이었다. 숯처럼 검은 머리를 항상 땋아서 위로 묶어올렸다.
그녀의 집 문앞에는 두 가지 물건이 있었다. 하나는 높은 의자이고, 또 하나는 재떨이다. 비우지도 않는 재떨이를 옆에 두고 그녀는 의자에 앉아 종종 담배를 피웠다. 주로 화려한 실내원피스를 입고, 낮은 슬리퍼를 신은 채 땋아올려진 머리를 철문에 기대고 담배를 태우며 조용히 밖을 바라봤다.
때로 그녀는 남자들과 함께 집에 들어갔다. 몇 달간 우연히 그녀와 마주칠 때마다, 그녀의 손을 잡고 방으로 들어가던 남자는 항상 바뀌어 있었다.
우리는 인사도, 아는 체도 하지 않는 사이였다. 기숙사도, 완전히 독립된 공간도 아닌 애매한 원룸공간이지만 한국과 달리 생활에 대한 규제는 전혀 없었다. 집값만 낸다면야 각자는 각자의 삶을 살아갔다. 그녀는 그렇게 그녀의 공간을 의자와 재떨이와 함께 지키고 있었다. 내가 떠날 때 까지도.
맨 처음 사진에서 보여줬다시피 내가 살던 곳은 맞은편 쌍둥이 아파트가 훤히 보였다.
밤 여덟시 경, 세안을 마친 후 젖은 머리를 말리기 위해 수건을 가지고 잠시 밖으로 나오면 가끔 쌍둥이 아파트의 앞집 여자를 볼 수 있었다. 금발에 앳되보이는 얼굴을 한 그녀는 3월까지만 해도 털 코트를 입고 있었다.
그녀는 담배를 많이 피웠다. 외출을 하거나 집에 돌아올 때마다 코트를 입고 담배를 피는 그녀의 모습을 종종 볼 수 있었다. 젖은 머리를 수건으로 싸매다 보면 자연스레 그녀와 눈을 마주쳤다. 나는 곧 외면했다. 혹은 그녀가 먼저 고개를 돌렸다.
우리는 서로의 이름도 모르며, 이야기를 나누어본 적도 없었다. 딱 한번, 그녀가 술에 취해 집에 들어가려 하는 나에게 고함 섞인 인삿말을 건넨 것을 빼고는. 그녀의 집은 친구들로 넘쳐났다. 그녀의 방문은 주로 열려있고, 이 원룸아파트에 사는 동갑내기 친구들이 들락거렸다.
문이 닫혀 있다 해도 그녀는 문을 잘 잠구어놓질 않았던 듯 싶다. 그녀의 집은 이 원룸아파트에 사는 몇 친구들의 모임터가 되곤 했으니까.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드나드는 곳이지만 나는 그녀가 있는 맞은편 아파트 근처에 가본 적이 없었다.
네모난 방의 벽은 회색 콘크리트 벽과 자갈로 장식되어 있었다.
처음 몇 주동안, 나는 장식인지 비용 절감인지 모를 기묘한 벽에 자주 다치곤 했다. 좁은 침대에서 뒤척이며 자다가 깜짝 놀랄 서늘한 통증에 잠에서 깨면 손등 부근에 하얀 줄이 생겨 있었다.
상처를 문지르면서 네걸음만에 부엌으로 향해 전기로 작동하는 레인지를 켰다. 내 방은 화력이 너무 약해 한 잔 분량 물이 끓기까지도 십오분 이상 기다려야 한다. 너무 약한 화력이 내 방만의 문제라는 사실을 알게 된 건, 떠나기 한 달 전이었다. 주거 문제게 어려움을 겪던 친구가 이 아파트 원룸으로 이사오고, 친구 집으로 놀러가본 후에야 나는 내 집 화력이 월등히 약하다는 걸 깨달았다.
떠나기 이 주 전. 미리 짐을 정리하기 위해 방안 깊숙히 넣어 두었던 커다란 이민 가방을 꺼냈다. 이사오던 1월 당시까지만 해도 이 아파트에 살던 아시아인은 내가 유일했다. 떠날 날이 가까워질수록 두 채의 아파트에 사는 동양인은 늘어갔다.
언제 이 곳으로 이사를 온 것일까. 비슷한 외모에 비슷한 풍습을 가진 사람들은 눈이 마주치면 서로를 조금 더 오랜 시간 바라봤다. 그러나 일초도 안되는 짧은 시간이 지난 후, 우리는 이내 다른 방향으로 시선을 돌렸다.
내가 살던 아파트 원룸에서는 다섯 평 남짓한 방에서 의식주를 해결할 수 있었다. 공유하는 곳은 대형 쓰레기통과 세탁기 뿐이다. 두 공간은 오래 머무를 필요가 없다. 그래서 그 곳에 살던 사람들은, 회색 콘크리트 자갈벽과 햇볕이 통하지 않는 철문으로 이루어진 네모난 공간 밖을 '집'이라고 부르지 않았다.
emblem0403@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