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는 늘 쾌활하셨다. 어린 시절에 내가 많이 웃는 성격이 된 것도 어찌 보면 아버지가 한 번도 찡그린 표정을 짓지 않았기 때문인 것 같다. 내 첫 사회화의 대상이었다.
그래서일까. 아버지의 지친 모습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선택적으로 기억을 지웠는지 모르지만 내게 아버지를 기억하는 시간들은 늘 웃음밖에 없었다. 성인이 되고 난 후 아버지 사업이 실패하고 떠밀리듯 경제적 독립을 하게 된 나는 돈을 버느라 늘 바쁘게 대학을 다니며 아버지를 몇 번 보지 못했다.
그렇게 20대 이후 중년이 된 지금까지 아버지란 존재는 점점 희미해져 갔다. 사실 생각하면 머리가 아팠다. 사업 실패 이후 빚을 갚기 위해 어딘가에서 계속해서 일을 하고 계셨을 아버지를 찾는 것보다 내 앞에 놓인 삶의 과제들이 버거웠던 것 같다. 등록금을 벌고 학교를 다니고 취직을 해야 하고 그 안에서 당장 오늘과 내일의 삶이 더 중요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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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는 늘 무언가를 배우는 것을 좋아하셨다. '허허.. 기웅아 공부는 끝이 없단다. 이 나이에 해도 배우는 일은 재밌더구나..' 라며 늦은 나이에도 국가 자격증 준비를 하셨다. 나는 아버지의 그런 모습을 보면서 잠시나마 안도를 했다. 독립 이후 아주 오랜만에 보는 아버지의 모습에서 생기를 느꼈다. 당시 불혹이 지난 나이보다 스무 살은 훨씬 넘은 나이임에도 아버지는 책을 읽으며 해맑게 웃고 계셨다.
신기했다. 20대부터 치열하게 돈을 벌고 졸업 후 취직하고 정신없이 급류에 휩쓸린 것처럼 살아온 내게 아버지의 상황에 비추어 볼 때 저런 여유로운 웃음은 늘 불가사의하게 느껴졌다.
문득, 어린 시절 보던 아버지의 웃는 모습이 겹쳐져 보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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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이 지나 아버지는 사회 복지사 자격증을 취득했고, 과거에 했던 일들과 상관없이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셨다. 성북구의 조용한 동네에서 일을 하셨다. 가끔 사회생활의 피로의 독이 쌓일 때쯤 아버지를 보고 이야기를 나누며 웃곤 했다. 일상의 평범한 일들을 웃으시며 이야기하시는 아버지의 모습에서는 변하지 않는 맑은 에너지가 있었다. 아버지가 건강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찌든 느낌이 들 때마다 나는 아버지를 가끔씩 뵈러 갔다. 일하시는 곳 근처 북한산을 돌며 차를 마시고 이야기를 나누는 것만으로도 무언가 해소되는 기분을 느낄 수 있었다. 불혹의 나이가 된 내가 이제는 아버지가 매일같이 웃으시던 그 모습이 실제로는 모진 사회의 풍파 속에서 얼마나 지키기 어려운 모습이었는지를 알게 되서일까.. 애잔함과 맑아지는 기분을 동시에 느끼고 집에 돌아오면서 알 수 없는 젊은 시절의 죄책감을 느낀 날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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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던 어느 날. 평화롭고 화창한 어느 주말 낮이었다. 아버지와 산책을 하고 밥을 먹으러 갔다. 사실 전날 아버지와 오랜만에 병원에 같이 가기로 한 날이었는데 회의를 하다 지나쳐버린 미안함과 부쩍 최근 들어 숨이 가쁘시다는 말에 혼자서 가셨던 병원에서 무어라고 말했을까 결과에 대해 궁금하던 차였다.
우리의 단골 메뉴인 야채 쌈밥을 먹기 시작했는데 그날따라 아버지는 말 수가 거의 없으셨다. 무슨 일이 있으셨던 걸까 궁금해졌다. 침묵 속에서 어제 약속을 잊은 것이 미안해질 찰나, 아버지가 입을 떼셨다.
'기웅아.. 새하얗더라..'
'네..?!'
'엑스레이만 찍어도 어떤 상태인지 알겠다고 하시더라'
'무.. 무슨 말씀이세요?'
'의사가 여기 폐가 전부 하얗게 보이는 게 뭔지 아시겠어요? 이게 다 종양 덩어리예요라고 하시더라..'
숟가락을 놓았다. 순간 의미를 부정했다. 무엇을 들은 거지. 나는 대체 무엇을 들은 것일까..
아버지는 말씀을 이어가셨다.
'그냥, 순리대로 살다 가려고 한다...'
순리가 뭘까.. 사람은 누구나 태어나면 흙으로 돌아가는 것. 아니.. 지금 내게 그런 의미보다 떠오르는 건 단지 하나였다..'뭐가 되었든 해야겠다...'
'아버지.. 아버지, 아닐 거예요. 정밀 검사받고 또 할 수 있는 치료를 다해봐야죠..'
'괜찮다. 기웅아. 즐겁게 살만큼 살았다고 생각해..'
주의를 의식하지 않은 채로 주말 대낮의 부산한 식당 한가운데서 뭔가 복받치듯 눈물이 터지고 말았다. 멈출 수가 없었다. 아버지는 의연하게 웃고 계셨다. 어떻게 이런 상황에서 웃을 수가 있을까.... 나는 형용할 수 없는 정말 설명할 수 없는 그런 기분이 되었고 계속 울었다.
진정될 때쯤 계산을 마치고 식당 밖에서 기다리시던 아버지는 누군가에게 전화를 하고 있었다. 누군지는 곁에서 오래된 아버지 핸드폰의 밖으로 흘러나오는 익숙한 상대의 목소리를 듣고 알 수 있었다.
'조박사, 그렇게 되었어. 응.. 어... 아 그렇구나. 방법이 없겠구나...'
아버지의 고등학교 동창이자 대학병원 암센터장을 하고 계신 박사님이셨다. 형이 위중했을 때 몇 번이나 신세를 진 분이기에 잊을 수 없는 분이기도 했다. 아버지는 그렇게 무언가를 재확인하신 듯 전화를 끊고 다시 무언가 체념하신 듯한 표정으로 웃고 계셨다.
모든 게 여느 평범한 주말 낮에 발생한 일들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았던 순간이었다. 풍광이 좋았지만 먹구름이 낀 하늘로만 보였다. 앞이 보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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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형병원의 검사실은 늘 인산인해다. 사람들의 표정은 병동마다 다르다. 하지만, 6인실 입원실에서 형의 옆 베드가 안 좋은 결과로 인하여 치워 지는 모습을 수도 없이 지켜보며 견디던 몇 년의 시간동안 입원실에 본 많은 인간 군상의 모습이 떠올랐다. 사람은 흙으로 돌아간다 언젠가는.. 이런 표면적인 표현을 느낄 수 있는 순간들을 위중한 가족이 있는 사람만큼 피부에 와 닿게 느낄 수 있는 사람은 없지 않을까 생각했다. 다사다난했던 지난 몇 년간 익숙한 그 병원의 병상 앞에서 이제는 초조하게 아버지의 정밀 검사 결과를 기다리고 있었다.
잠시 후, 보호자를 호명했다. 가슴속이 진정되지 않았지만 차분한 척하며 자리에 앉았다.
'보호자님 되시죠? 시티 촬영 결과입니다. 자 보시죠'
'네......'
'전신으로 전이가 되셨네요... 폐 안에 있는 종양도 크고, 소세포암이라는 종류라서 전이가 빠릅니다.'
'네......'
'아마 짧으면 3개월 정도실 것 같습니다...'
'..... 다른 검사는 없나요..?'
'뇌 MRI가 남았습니다. 뇌에 전이가 되었다면 더 빠를 수 있습니다.'
아버지에게 돌아갔다. 아버지는 희미한 미소를 짓고 계셨다.
'기웅아, 뭐라고 그러시더냐..'
'네... 아버지 일단 전이는 되었고 치료방법은 찾아봐야 할 것 같아요.'
'음.. 그래 너무 애쓰지 말아라.'
'아네요... 아버지..'
그리고, 다음 MRI검사를 예약하고 우선 할 수 있는게 없어 병원을 함께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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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날 이 순간부터였다. 아버지가 가시기 전에 아버지와 나에 대한 기록을 남겨두기로 생각한 것이다. 다행스럽게 주변에 일반 개인의 자서전을 써주는 달팽이라는 좋은 취지의 서클이 있었고, 또, 나의 상황을 누구보다 이해해주고 발 벗고 나서서 도와주려는 사람들이 있었다.
앞으로 천천히 지난 시간의 아버지와 나에 대한 일들을 여기에 적을까 한다.
2021년 4월
한기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