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리 앰비언스 1번

1. 공명하던 곳

by segye
39fde29cff97ca96a39725b63b19baef.jpg



긴 복도 끝에 위치한 그 방은 독특한 오각형 구조였어. 넓다고는 볼 수 없었지만 단 한 면만을 제외하고 넓은 창이 트여있어 통쾌했어. 대로변 코너에 위치한 집이라 바깥 소음이 여과 없이 창문 틈으로 새어 들어왔는데, 그 소리가 어찌나 생생하던지 일부러 녹음한 앰비언스를 틀어놓은 것 같았어. 왜 유성 영화가 처음 나왔을 무렵, 할리우드 음향실 어느 버튼 위 견출지에 '거리 앰비언스 1번'이라고 표기되었을 법한 그런 소리 있지.


온화한 오전의 햇볕이 투영되고 있을 무렵이었을 거야. 벽난로가 눈에 띄어. 광택이 나는 적갈색 벽돌로 견고히 만들어졌는데 그 안에는 타다 만 재가 고스란히 남아있었지. 난로 위쪽으로는 울퉁불퉁한 나무 찬장이 달려 있었어. 사포질도 제대로 않은 걸로 보아 방주인이 직접 달았음을 어림짐작할 수 있었지. 찬장 위에는 갖가지 소설과 인문 서적, 디브이디 컬렉션이 뒤엉켜 있었어. 일말의 질서도 없이. 고다르나 트뤼포 컬렉션은 같은 게 몇 세트나 꽂혀 있었어. 하나쯤 내가 가져간들 아무도 모를 것 같았지. 마침 그 주에 본 루이 말 영화도 꽂혀 있어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그러다 펜화가 그려진 디브이디 하나에 유독 눈길이 가. 표지에 <폴란드 애니메이션 영화 선집>이라고 쓰여 있었거든. 영화 학교가 있는 폴란드 우치에 가보고 싶다던 내 소망을 기억하는 방주인은 나를 빤히 바라보더니 그걸 가지라고 눈짓하데.


방주인의 노트북이 몇 개나 굴러다니고, 그 옆으로는 파인애플 주스팩과 모노클 잡지가 몇 권 쌓여 있었어. 주인은 내게 단호한 표정으로 아연 영양제 몇 알을 건네고 파인애플 주스팩으로 시선을 돌려. 알았어, 마시면 되잖아. 그는 <게리>를 이제서야 봤다고 고백하며 아르보 패트의 '거울 앞의 거울'을 재생해. 젠장, 이 곡 좀 난 그만 듣고 싶어. 게다가 이 방에 거울은 단 한 개도 없잖아. 그러나 난 예의를 차리느라 아무 말도 않아.


"한때 세르비아 부르주아들 사이에서 피아노를 사들이는 것이 대단히 유행이었대." 그가 방안에 가득 드리운 침묵을 깨. "유행이 퍼지다 보니 형편이 여의치 않은 사람들도 보여주기 식으로 피아노를 사들이기 시작했는데, 그런 사정의 한 사내가 구입한 피아노를 자랑하듯 새 집 거실 한복판에 두고 친구들을 불러 파티를 열었다지. 친구들은 흡족한 얼굴의 그를 밀어내며 피아노를 때려 부수고, 집을 불태워 버렸대. 난 이야기가 참 좋아. 언젠가 내가 변해 그 피아노 주인처럼 된다면 내 친구들이 꼭 그의 친구들처럼 해 주었으면 좋겠어."


이윽고 나는 답했어. "내가 정말 깊은 산골짜기에서 태어나 자랐다고 했잖아. 그 집에도 피아노는 있었어. 내가 태어나기 이전부터 말이야. 내 부모는 부르주아와 거리가 멀었지만 피아노를 꼭 가르치고 싶어 했지. 그렇지만 불행히도 그 집에는 쥐가 득실거렸거든. 토끼만 한 들쥐들이. 우리는 몇 달에 한 번 꼭 조율사를 불러야 했어. 자유자재로 건반을 갖고 노는 조율사들은 언제나 낯설고 경이로운 신들 같았어. 그래, 난 아직 부르크뮐러 2번 아라베스크에 멈춰 있었거든. 조율사가 먼 길을 달려와 소리가 변해버린 피아노 뚜껑을 열면, 쥐들이 갉아먹은 피아노 내부는 톱밥으로 가득했어. 내게 피아노를 부숴줄 친구는 없었지만 이러나저러나 부르주아가 될 운명은 일찍부터 못 됐던 거지."


파인애플 주스팩을 입에 들이붓고 고개 호기롭게 젖혔지만 남은 한 방울 위태로이 떨어질 뿐.

매거진의 이전글미드나잇 익스프레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