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우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기회는 닳아 없어지는 것.

by 세하

언제 연필을 마지막으로 썼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한때는 자주 썼고,

자주 지워냈다.


지우개가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였을까.

연필을 쓸 땐

조금 덜 조심했던 것 같다.


그냥 지워버리면 되니까.


그러다 보면

같은 자리를 계속 지우게 되고,

종이는 점점 얇아졌다.


결국 새 종이를 꺼내면서,

자꾸 덧지운 탓에 구멍 난 종이를 보며

지우개 탓을 하기도 했다.


“지우개가 조금 더 좋았더라면..”


하지만,

휘갈겨 쓴 건 늘 연필이었다.


지우개를 탓할 자격은

분명히 없었다.


지우개는 말없이 닳아갔다.

모양도 흐려지고,

어느 순간,

더는 쓸 수 없게 되었다.


지우개는 묵묵히,

그 흔적들을 지우느라

자신을 조금씩, 다 닳아 없앴다.


그리고,

지우개가 없어진 뒤에야 알게 됐다.

쓰는 것보다,

지우는 게 더 힘들다는 걸.


잘못 휘갈겨 낸 연필 탓이 아닌,

기회를 너무 많이 준 지우개를

원망하게 되는

안일한 마음.


내가 겪었던 몇몇 사람들은,

기회를 주는 사람에게

처음엔 마음이 넓다 했고,


그 기회를 여러 번 받아내자

이내,

만만하다고 여겼다.


애초에 연필 옆에

지우개가 없었다면,

더 깊은 후회를 하고,

같은 실수를

조금은 덜 반복하지 않았을까.


인생이란 종이에 흐트러진 실수는

마땅히,

함부로 휘갈겨 낸 연필 탓이어야 한다.


연필이 없으면

쓸모없어지는 지우개.

지우개 없이는

단 한 줄도

마음 놓고 쓸 수 없는 연필.


하지만 기억해야 한다.

지우개는,

영원하지 않다.


지우개연필.p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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