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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원탁의 세희 Feb 12. 2020

소도시 백수, 서울 취준생이 되기로 결정하다.

인터넷만 믿고 혼자 서울로 향했다.

'내가 잘하는 게 뭘까?' '정말 하고 싶은 게 뭘까?' '아 이건 정말 돈 많이 준다고 해도 못하겠다.'


취업할 분야를 정하기 위해 세운 기준은 이 세 가지였다. 추상적인 질문임에도 거르고 거르다 보니 선택지가 많지 않았다.


그중 최종적으로 선발된 일은 오래된 취미이면서, 전공과도 긴밀했으나 '이 정도 능력만 가지고 직업으로 삼아도 되나?'라는 걱정 때문에 도전할 엄두를 내지 못하던 것이었다.


 가지 감사하고도 절망적인 사실이 있다면,  시기의 내겐 그런 검열을 거칠 여유조차 없었다는 것이다. 하루하루 자책감에 마음이 망가져가고 있었다. 더 이상 무거워져만 가는 압박감을 감내하고 싶지 않았다.


인터넷을 켜고 해당 분야 취업 과정에 대해서 검색하자 모든 것이 일사천리로 이루어졌다. 세상에는 정말 많은 취준생들이 스스로 포트폴리오를 만드는 것에 어려움을 느끼고 있었으므로 돈만 주면 도와주겠다고 나서는 학원이 즐비했다. 그중에 가장 유명하고 자신감이 넘쳐 보이는 학원 홈페이지에 들어갔다. 화려한 고퀄리티의 포트폴리오에 매혹당했고, 수많은 취업 현황 리스트에 현혹당했다. 이거다! 졸업하고 처음으로 속 시원한 결정이 났다.


나는 바로 다음 날 저녁 식탁에서 아버지에게 서울에 올라가야겠다고, 거기에서 학원을 다니며 취업준비를 해야겠다고 말했다. 그동안 특별한 압박 없이 졸업하고 집에서 노는 나를 지켜봐 주던 아버지는 의외로 아직 딸을 멀리 떨어뜨려놓을 준비가 안된 듯 당황했다. 서울에서 어떻게 취업할 건지, 그 학원이 어떤 곳인지, 확실하게 취업을 할 수 있는 건지 등을 물었고, 나는 하나를 물으면 세 가지를 대답하는 식으로 계획을 말했다. 디자인에 대해서 아는 것이 전무한 아버지였지만, 그 혼란한 마음을 안심시킬 수 있는 마법의 주문을 나는 잘 알고 있었다.


"아빠, 내 선배들도 다 그렇게 서울 학원에서 포트폴리오 준비하고 취업했대."


그렇게 가장 빠른 날짜로 학원 상담을 신청했다. 더워지기 시작한 초여름 날, 찔찔 땀을 흘리며 네 시간가량을 이동해 만난 학원 원장님은 자신감 넘치면서도 담담한 태도로 나를 맞이했다. 구체적인 커리큘럼과 취업 현황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옳은 길을 잘 찾아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보다 내가 걱정했던 '이 정도 능력'이면 자격요건이 충분하다는 것을 알자 이제껏 쌓여왔던 모든 불안감이 한방에 날아가는 기분이었다. 원장님의 담담한 학원 상담이 마치 '너는 이 일을 해내기에 충분한 가능성이 있는 사람이야.'라는 말처럼 느껴졌다.




대학 졸업 전, 상경을 꿈꾸던 친구들이 주저하곤 했던 이유는 비싸다고 소문이 자자한 집세 때문이었다. 나는 이전까지 서울에 취업해야겠다는 계획이 없었기에 그제야 서울의 보증금과 월세를 접하게 됐다. 관광지 말고는 아는 곳이 없었기 때문에 동네를 정하는 것부터가 너무 막막했다. 이번에도 내가 기댈 데라곤 인터넷 세상이 전부였다. 거액의 보증금이 필요하지 않으면서 이제 막 자취를 하기 시작한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곳, 접근성이 좋은 2호선이 다니는 곳, 여러 데이터의 축적으로 내가 갈 곳은 신림동이라는 결론이 났다.


대학교를 다닐 때 자취방을 구한 경험이 두 번 있었다. 하지만 서울에서 400 원의 보증금을 가지고 관리비를 포함해 월세 45 원을 넘기지 않는 원룸을 구하기란 보통 일이 아니었다. 특히 햇빛이 잘 들고, 쾌적하고, 활동이란 것을 할 수 있는 넓이의 방을 구하는 일은 거의 불가능한 것처럼 느껴졌다. 중개인들을 만나 어둡고, 오래되고, 비좁은 곳을 돌면서 하나하나 체념을 하기 시작했다. 원하는 방을 구하겠다는 마음은 진작 접었고, 마지막으로 지키고 싶은 조건을 되뇌었다. 우울감과 쉽게 친해지는 특성이 있는 내겐 햇빛이 중요했다.


여러 방을 돌다가 어느새 해가 주황빛으로 물들 무렵, 노을빛이 따뜻하고 환하게 들이치는 마지막 방에 들어섰을 때 나는 구세주라도 만난 듯 "이 곳으로 할게요!"라고 외쳤다.

처음으로 보는 탁 트인 풍경이 감사해서 칙칙한 인테리어나 세 사람이 누우면 인간 퍼즐이 완성될 만큼 좁은 평수는 별 부정적인 힘을 끼치지 못했다.


마치 계라도 탄 듯 시원하게 결정한 나를 잠시 의아하고도 얼떨떨한 표정으로 바라보던 중개인은 이내 햇볕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해당 건물의 사소한 장점과 지리적 장점을 보탰다.


중개인과 나는 계약을 위해 부동산으로 돌아와 유리판을 덮은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앉았다. 내가 계약할 방을 정했다는 소식을 전하기 위해 아버지에게 전화를 거는 동안 그는 여러 서류들을 출력해 정리하고 있었다. 전화를 받은 아버지에게 괜찮은 방을 골랐다는 말과 함께 계약금을 보내달라는 말을 할 때였다. 뉴스에서 빈번하게 들려오는 부동산 사기를 당하는 건 아닌지 걱정이 된 아버지가 여러 사항들을 물었고, 잘 모르는 내가 어버버 거리자, 중개인은 잠시 전화를 바꿔달라고 했다. 해당 매물에 대한 전문적인 설명이 신속 정확하게 지나갔다. 설명을 마치고 공손하게 통화를 마치는 것을 보며 정말 믿음직스럽고 친절한 분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핸드폰을 건넨 그는 한 손으로 입을 가리고 크게 웃었다. 방금 남에게 아주 웃긴 이야기라도 들은 듯 내게 말하면서.


"어우 세상에! 목소리가 옛날 시골 어른들 같으셔... 이런 목소리는 정말 오랜만에 들어보네. 호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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