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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늘고래 Mar 06. 2021

NFT, 소유를 예술하다.

자본주의가 탄생시킨 소유의 예술

흔히 NFT를 디지털 아트라 생각한다. 이는 정확하지 않다. 왜냐면 디지털 아트는 NFT 훨 이전부터 존재해왔기 때문이다. 구글에 셔터스톡을 쳐보라. 엄청나게 많은 디지털 이미지들이 반겨 줄 것이다. NFT는 디지털 아트가 아니라 디지털 아트를 "소유"할 수 있게 도와주는 기술이다. 그것이 바로 소유의 예술이다.


NFT의 핵심은 어떤 무엇에 대한 소유권을 디지털 세상에 박제시키고 그것을 증명하는 행위이다. 따라서 NFT가 존속하기 위해서는 인간은 지속적으로 무엇을 소유하고 싶어 해야 한다. 이 말은 즉슨 아무도 어떤 유형을 사적으로 소유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면 NFT는 존속할 수 없으며 이에 반해 모두가 무엇을 계속 소유하고자 한다면 NFT는 활개를 치게 된다.


굉장히 "자본주의"스럽다 느껴진다. 무엇을 계속 만들어내야 하고, 무엇을 계속 소유해야 하며, 무엇을 끊임없이 소비하고 거래해야 하는 우리가 알고 있는 그 자본주의.. 유동량이 죽거나 거래가 끊기면 존립이 위태로운 바로 그 자본주의..


그렇다.


NFT는 다름 아닌 디지털 자본주의의 신호탄인 것이다.


그래서 NFT가 시대를 바꾸는 예술이라니, 예술적 혁명이라니 하는 말을 들으면 뭔가 한 켠이 찝찝하다. 물론 '예술'이라는 단어를 그림 작품, 춤, 노래 등과 같이 대중적으로 인식되는 예체능 계열에 한해 정의했을 때 그렇다는 말이다. 여기서 예술의 영역을 "의미"의 영역이라 확장한다면 NFT의 예술적 가치는 사피엔스 출범 이후 항상 존재했던 소유욕이자 그 궁극에 서 있는 자본주의의 향기라 하겠다. NFT는 단순한 "예체능"의 영역이 아닌 자본주의 프레임의 끝판 왕이었던 것이다.  


이로써 우리는 NFT가 인간의 소유욕에 대해, 소유의 예술적 의미에 대해 무엇을 시사하고 있는지 고찰할 필요가 있다. 너무나 갖고 싶은 게 많아 이제 만지지도, 냄새 맡지도, 맛볼 수도 없는 디지털 화면의 무엇을 소유하고 싶어 하고 더 나아가 현실 속의 그 어떤 무엇도 소유권을 선포할 수 있는 시점까지 이르렀기 때문이다.


소셜 토큰 Roll의 화면


위 스냅샷은 소셜 토큰 Roll의 화면이다. Roll은 인플루언서들이 자주 사용하는 플랫폼으로 자신의 명성을 토큰화하여 팔로워들에게 판매할 수 있도록 해주는 곳이다. 토큰을 구매한 자는 셀럽의 열정 팔로워가 되겠으며 이벤트 등에 대해 혜택을 받을 수 있다. 물론, 토큰 세일을 하여 돈을 챙기고 딱히 아무것도 하지 않는 셀럽들도 있다. 이건 순수히 셀럽 마음..


여기서 특이한 점은 토큰 세일을 통해 자신의 하루를 판매하는 사람도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토큰 구매자는 "하루" 구매자가 되며 토큰을 들고 있다면 판매자가 하루 동안 내리는 의사결정에 대해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 즉, 그 하루만은 셀럽이 무엇을 할지, 무엇을 먹을 지에 있어서 지시를 내릴 수도 있고 (어느 정도의 규칙은 있겠지만) 토큰 홀더들이 다수일 때면 합의를 통해 "민주주의"적으로 그 하루에 대한 기획안을 짤 수도 있다는 것이다.


"타인의 하루를 소유하다"


"하루"라는 개념은 실체가 없다. 즉, 여기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을 증명할 수도 없고, 그것을 만질 수도 없다. 우리가 마음에서 만들어 내는 "생각"에 불과하다. 이로써 소유할 수 없다고 여겼던 무엇을 소유할 수 있게 된 지금, 정말 우리는 무엇을 소유하고 있고 무엇을 소유하고 있지 않은지 고찰해 보게 된다. 나는 내가 두드리고 있는 물리적 키보드를 진정 소유하고 있는 것인가? 아니면 그 키보드를 소유하고 있다는 "생각"을 소유하고 있는 것인가?


만약 "소유"의 개념이 생각에 대한 소유를 의미한다면 디지털 세계는 소유의 예술이 무제한으로 펼쳐질 수 있는 곳이다. 왜냐면, 디지털 세계는 물리적 제약이 존재하지 않으며 국경이 없기 때문이다. 이 말은 즉슨 나는 언제나 내 앞에 있는 물컵의 소유권을 NFT의 형태로 발행하여 디지털 상에서 전 세계 누구에게나 판매할 수 있으며, 실제로 판매가 된다면 물컵이 물리적으로는 내 앞에 존재하지만 아프리카 탄자니아의 이름 모를 누군가가 소유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아니, 소유한다고 "생각"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허허..


이때 정부는 어떤 조치를 취할 것인가? 중국 정부만 해도 해외로 5만 달러 이상 반출시키는 것을 법으로 금지하고 있고 한국 정부 또한 자산 반출에 굉장히 예민한 지금, 물리적으로는 영토 내에 있는 물건의 소유권을 외국인이 디지털 상에서 습득한다면? 그 물건을 압수할 것인가? 그 물건은 가만히 있는데도 불구하고? 정부는 이에 어찌 대응할 것인가? 아니.. 이제 정부의 목적과 존립성에 대해 질문을 해야 할 때인가?


질문할 뿐 답은 모른다. 그저 인간의 소유적 내러티브가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 지켜보는 게 너무나 흥미로울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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