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오래된 한 버릇에 대하여 : "씀"에 대한 씀.
예전부터 난 내가 써놓은 글이 계속 보전되는 데 꽤나 집착했다. 어릴 적 썼던 일기장 수십 권, 쓰고 난 뒤 뒷면에다 이것저것 끄적거린 이면지 수십 장, 심지어 고등학생 때, 다른 이들은 졸업하면서 죄다 버려버린 손때 묻은 교과서들과 담임선생님이 시켜서 강제로 5장씩 채워 조회 때마다 검사 맡았던 공부 노트까지. 어느 것 하나 버린 것 없이 아직 그대로 남아 있다. 다 모으면 책장 하나 가득 채울 정도로 거대한 분량이 되는 이 무수한 종이쪽들을 난 이따금씩 마치 내 분신인 것처럼 지켜보며 흐뭇해하곤 했다. 정작 어떻게 무슨 내용을 적었는지에 대해선, 다시 꺼내서 잘 읽어보지도 않으면서.
그래서였는지는 몰라도, 유독 다른 사람들보다 글 쓰는 일에는 관심도 많고 자신감이 넘쳤다. 학창 시절 교내외 백일장 대회에서 상 받아온 적도 꽤 되고, 지금까지도 글 짓는 걸로 쏠쏠하게 챙겨 먹는 것들이 있다. 군생활을 하면서 무심코 적어낸 영화 감상문으로 생각지도 못하게 정훈 포상을 딴다던가. 그럴 땐 내 필력이 예전에 비해 그리 많이 죽진 않았구나 싶어 뿌듯하기도 하고, 사실 객관적으로 내가 글을 그리 잘 쓰는 사람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부대의 수백 명 사람들 중 나 이상으로 글을 잘 쓰는 이들이 그리도 없는가 싶어 솔직히 당황스럽고 안타깝기도 했다.
어쨌거나, 특출 나게 잘하는 것도 특별히 흥미 있는 취미도 마땅히 없는 나에게 한 장씩 쓰며 쌓아갈수록 왠지 나만의 역사를 써 내려가는, 또 이따금씩은 쏠쏠한 재미도 가져다주는 글은 내게 꽤 특별한 의미가 된다. 뭐, 사실 내가 적은 글들 중 대다수는 그다지 아무 의미도 아무 실리도 없는 넋두리 같은 것에 불과했지만, 건망증 심한 내가 그때그때 떠오르다 쉽게 사라져 버리고 마는 수많은 생각 내지 영감들을 더 오래 간직하고 저장해 둘 수 있는 것만으로도 나쁘진 않으니까. 정말 가끔씩이기는 하겠지만, 그렇게 하나둘 쌓인 내 과거의 글들을 다시 읽어보며 미처 잊거나 지우며 살아온 과거의 나와 재회할 수 있으니까. 그러면서 그때의 나와 지금의 내가 얼마나 다른 사람이 되었는가를 비교하는 것도, 어떻게 살아왔는가를 되짚어 보는 것도 재미있고 특별한 경험이 된다.
사실 예전보다 귀차니즘이 너무 심해져 예전처럼 틈틈이 글을 쓸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여유가 되는 한, 난 예전처럼 가능한 한 최대한 끄적거려 볼 것이다. 괜히 이런 게 좋아 내가 역사 전공을 택한 건 아닐 것이다. 전공자들 사이에서라면 유명하다 못해 질리도록 들었을 이런 말도 있듯이.
역사란 역사가와 그의 사실들 사이의 지속적인 상호작용의 과정이며, 현재와 과거 사이의 끊임없는 대화이다.
- Edward H. Car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