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 듯 오지 않은 듯.
사실, 이전부터 천천히 오고 있었다. 지독스레 겨울이 강하고 끈질겼던 이곳까지 제대로 오는 데 더 오랜 시간이 걸렸을 뿐. 4월 초에도 눈이 내렸고, 여전히 언제나 발이 시렸다.
힘겹게 따스함이 다가왔지만 그것조차 거저 주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온기와 함께 밀려온 서쪽 공기 먼지에 이번엔 목이 아팠고, 밋밋한 분위기가 싫다는 간부들의 투정 한마디에 피처 피어나지도 않은 봄꽃을 억지로 파내 끄집어내 와 심었다. 바뀐 날씨를 미처 즐겨볼 새도 없이 모두가 이미 너무 지치고 찌들어 있었다. 이미 봄이 떠나가버린 듯한, 마치 이미 초여름인 듯 작렬하는 햇빛 아래 선 마음들은 아직도 모두 겨울이었다.
봄이 왔음에도 진짜 봄이란 존재하지 않을 것만 같은 이곳에서, 그나마 기대해 볼 수 있는 건 역시 바깥세상 나들이뿐이었다. 다들 봄꽃이 질세라 이 계절이 가기 전에 훌쩍훌쩍 떠나가는 사이에, 스물 여드레밖에 허락되지 않은 바깥 구경 기회를 최대한 아껴보고자 무모한 도전을 시작했다. 앞으로 세 달, 내가 오로지 이곳에서만 버텨야 하는 시간들이다. 그때 나가야만, 그토록 좋아하는 봄나들이도 마다한 채 꿈을 찾아 떠났던 소중한 사람에게 웃는 얼굴로 앞에 서서 마주할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그러겠다 큰소리쳐놓고는 정말 그럴 수 있을지 아직도 잘 모르겠다.
이런 고민들이 반복되는 사이, 결국 지나갈 시간들은 지나가고 뒤돌아보면 아무것도 아니리라 생각하다가도, 한 달은 지난 듯한 그녀를 떠나보낸 지가 아직 열 아흐레에 불과할 뿐이라는 걸 상기하면 꼭 그렇지만은 않은 것 같다는 생각에 두렵다. 걸어온 길들보다 걸어갈 길들이 한참 더 남았다는 건, 언제나 결국 지나가긴 했다지만, 또 언제나 좋은 기억이었던 건 아니었다.
그러니 늘 그랬듯 또 문제는 두 가지다. 무엇을 하며 걸어갈 것인가와, 어디로 걸어갈 것인 가겠지.
문득 공허한 하루를 보내며 핸드폰 화면과 음악에만 의지해 또다시 방랑을 시작하던 입대 전 지난날의 내가 떠올랐다. 의지할 핸드폰도, 내가 나로서 온전히 있을 수 있는 혼자만의 공간도 없는 이곳에서 뭘 하며 어디로 가야 할지는 며칠 밤낮을 고민해 봐도 사실 잘 모르겠다─하긴, 그걸 진작에 알았다면 이곳에 오기 전 그렇게 싸돌아다닐 일도 없었겠지. 적어도 앞으로 1년 3개월 동안 "한 곳으로만 행하길" 강요받는 이곳에서의 삶이 이럴 땐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여전히 아직도 아득히 멀어 보이는 이 길 위에서 어떡하면 조금 덜 지루한 여정을 보낼 수 있을까 이렇다 할 생각이 없다. "심심하지 않을 만큼의 적당한 장애물"과 "눈이 즐거운 봄 풍경"이 함께한다면 좋겠지만, 현실은 "꽁꽁 얼어붙은 겨울 한가운데 수북이 쌓인 눈 속, 파묻혀 보이지도 않는 끝없는 희미한 오솔길이나 깎아지른 얼음 절벽"인 것을.
봄이 왔다. 그러나 사실은, 그래서 사실은,
아직 오지 않았다.
지난해 4월 20일,
입대한 지 6개월쯤 될 무렵 썼던 글이다.
1년이 지난 그때의 나와 지금의 나는, 저마다 어떤 길을 가고 있을까.
7월에 맞춰 휴가 쓰겠다고 휴가 안 쓰고 3달씩이나 버텼던 깡 하나는 대단했다.
뭐 지금도, 내가 속한 부대는 워낙 휴가가 가뭄이라 크게 다른 상황이진 않지만.
올해 봄은 내게 진짜 봄이 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