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만신창이가 되어버린, 내가 과외 맡은 한 친구의 핸드폰 수리를 맡은 적이 있다. 어떻게 하면 이 정도로까지 망가질까 싶을 정도로 성한 곳이 없었다. 움푹 패인 프레임, 쩍쩍 갈라진 카메라 유리, 뭘 띄우려는지 마는지 알 수 없이 지직거릴 뿐인 디스플레이. 꽤나 연식이 있어 무상 수리 보증 기간이 지나버린 이 물건의 수리비는 25만원이 조금 넘었다. 당근마켓에 돌아다니는 분신들보다도 더 비싼 몸값이다. 애 어머니는 수리비가 30만원을 넘으면 수리를 포기하고 새 폰을 맞춰 줄 작정이었다. 그 친구한테는 다소 유감스러운 일일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새 폰 내지는 아이폰이 갖고 싶어 쓰던 폰을 의도적으로 망가뜨렸는지도 모를 일이다. 짜식, 뭐가 그렇게 심술이었을까. 내가 쓰는 폰이랑 모델도 사양도 생김새도 별 차이 없으면서. 아 오히려 바로 그게 문제일까? 여담이지만 이 폰의 정체는 바로 갤럭시 A 퀀텀이다.
핸드폰 욕심이라면 사실 나에게도 있다. 사실 현대인이라면 누구에게나 흔히 찾아볼 수 있는 물욕이야말로 핸드폰 욕심이 아닌가 싶다. 다만 나는 그렇게 되기까지 다른 이들보다 시간이 좀 더 걸렸다. 주변 친구들이 싸이월드 미니홈피 꾸미기에 열중하고 핸드폰 문자 요금 알이 몇 개 남았는지 전전긍긍하는 동안, 나는 내가 좋아하는 과학 분야 만화책에나 더 열중하곤 했었다. 2008년 초6 무렵까지도 내겐 핸드폰이 없었다. 금전적 이유라든가 내 학업성적을 걱정한 부모의 결정에 의해서가 아닌, 진심으로 핸드폰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 내 의지 때문이었다. 아들내미가 학교 끝나고 매번 공중전화 콜렉트콜로 전화를 거는 통에 일일이 통화 수락을 하기가 번거로웠던 어머니가 참다 못해 핸드폰을 사다 주면서핸드폰이 생겼다. 그 때까지도 나는 비로소 내게도 핸드폰이 생겼다는 기쁨보다는, 혹여나 몇 되지도 않는 내 용돈으로 내 전화 통신비를 직접 부담하면 남는 것이 없을 것이란 생각에 두려움과 근심이 더 앞섰다. 내 최초의 핸드폰은 은색 몸체에 뒤에 멜론 로고가 적혀있던 조그만 애니콜 슬라이드폰이었다. 뒷면에 있던 그 멜론 로고의 의미가, 지금까지도 꽤나 쏠쏠하게 이용할 수 있는 멜론 스트리밍 프로모션 혜택이었다는 것을 나는 먼 훗날 유튜브 프리미엄 구독자가 되고 나서야 알았다.
내게도 핸드폰 욕심이 생기기 시작한 것은 두 번째 핸드폰으로 바꿀 중학생 무렵이었다. 계기는 참으로 단순했다. 그냥, 문득 견학인지 현장학습 나간 자리에서 우연히 본 친구 핸드폰이 예뻐 보여서였다. 새까만 조약돌 같은 몸체에 키패드는 화이트초콜릿 같은 흰색, 투톤의 미니멀한 폴더폰이었다. 내가 갖게 된 것은 같은 모델이되 겉은 흰색 안은 까만색인 색반전이었다. 굳이 친구 것과 똑같은 것으로 하지 않은 이유는 잘 모르겠으나, 아마 그저 특색 없이 똑같은 걸 하기가 싫었거나, 안 쪽 검은색이 좀 더 매력적이었거나, 자주 만지는 키패드 쪽이 검은색인 게 때를 덜 탈 것 같다는 그런 이유에서였을 테다. 공교롭게도 생애 두 번째 폰도 애니콜이었던 나머지, 나는 지금껏 천지인 배열이 아닌 다른 배열의 피처폰 키패드를 써보고 익숙해질 기회를 갖질 못했다. 지금 생각하면 그 조막만한 폰에 손 많이 가는 손톱만한 자판으로 참 열심히도 썼다 싶다. 하루종일 친구와 문자하다가 문자 사용 한도를 초과해버린 일도 가끔이지만 있었다.
세 번째 폰부터는 스마트폰이었다. 이미 두 번째 폰으로 바꾸던 즈음 옴니아2 같은 물건이 나오고 있었으니 여기서 나는 또 늦은 것이었다. SNS도, 카카오톡도 다 이 즈음 쓰기 시작했다. 그마저도 SNS는 다들 페이스북으로 갈아타는 가운데 꿋꿋이 카카오스토리를 쓰고, 카카오톡은 여전히 피처폰을 쓰고 있으면서 가상 머신 안드로이드로 집 컴퓨터에서만 사용하는 요상한 편법을 써서 처음 사용했다. 세 번째 폰이자 첫 번째 스마트폰은 고1 시절 같은 반 친구가 쓰다 내게 9만원에 중고로 판 HTC사의 디자이어 HD였다. 삼성의 갤럭시와 애플의 아이폰, LG의 옵티머스만 알고 있던 나에게 그 폰은 생경하고 신기한 호기심의 대상이었다. 루팅에 커스텀 롬까지 설치해가면서 정말 다채롭게 이용했었던 폰이었다.
그러나 지나치게 무겁고 배터리 지속시간이 딸린다는 것이 흠이었던지라, 머지않아 다른 폰으로 또 바꾸었다. 그리하여 바꾼 네 번째 폰, 두 번째 스마트폰이 베가 아이언 1이었다. 당시 한창 인기를 구가하던 갤럭시 S4를 제쳐놓고 굳이 평이 좋지 않던 베가를 고른 이유는 또다시 단순했다. 예쁘니까. 제조사가 망해가던 와중에도 예쁘다는 이유 하나로 차기작인 베가 아이언2까지 썼다. 동시대에 나온 경쟁작 갤럭시 S5의 못생김이 그 결정에 한몫하기도 했다. 아쉽게도 아이언2를 끝으로 해당 시리즈는 단종되어버렸고, 꾸준히 못생겼던 삼성의 갤럭시는 S6부터 갑자기 대변신하여 디자인적 호평을 듣기 시작했다.
스마트폰을 쓰기 시작하면서 애니콜에서 일탈했던 나의 핸드폰 일대기는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사양과 배터리까지 대폭 늘어나고 방수까지 되어 나의 이목을 끌던 갤럭시 S7 엣지가 나의 여섯 번째 폰, 네 번째 스마트폰이 됐다. 이제껏 기간으로 따지자면 아마 이 S7이 가장 오래 쓴 물건일 것이다. 실질적으로 쓸 수 있었던 시간은 실상 그리 길지 않았으나, 20개월 남짓 되는 내 군생활 전부를 함께 한 물건이었기 때문이다. 군생활 도중 바꾸고 싶은 유혹도 많았지만 전역 때까지 '최신폰은 일찍 지르면 손해'라는 마음가짐으로 참고 버텼다. 그러고 보니 이제는 일상과 하나가 되어버린 삼성페이도 이 무렵부터 쓰기 시작했다. 삼성페이를 쓰기 시작한 지가 여언 7년째다.
첫 스마트폰인 디자이어 HD를 쓸 때부터 군생활을 할 무렵까지의 나는 기술적 측면에서의 스마트폰에 대해서는 꽤 잘 아는 편이었지만, 스마트폰 구입과 유통 측면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전무했다. 대란이라든가 성지라든가 하는 말의 의미를 알지 못했다. 새 핸드폰은 어딘가에서 중고로 구해 오거나 통신사 대리점에서 약정 걸고 사오거나의 둘 중 한 방식으로만 써올 뿐이었다. 군생활 시절 생활관 동기가 휴가 나간 사이 당시 한창 최신 기종이었던 갤럭시 노트 9을 단돈 10만원도 안 되는 가격에 사왔다는 믿기지 않는 얘기를 하면서부터, 단통법이라든가 성지라든가 페이백이라든가 하는 휴대폰의 음지 유통 구조에 대해 비로소 찾아보고 어렴풋이나마 알게 됐다. 전역한 이후부터는 이렇게 알게 된 정보를 십분 활용해, 비로소 처음으로 부모 없이, 통신사 대리점을 통하지 않은 방식으로 새 핸드폰을 샀다. 그렇게 얻은 일곱 번째 폰, 다섯 번째 스마트폰이 갤럭시 S10 5G였다. 당시 출고가 150만원에 육박했던 512GB 모델을, 5G 초기 가입 대란이라며 어마어마한 페이백을 주는 법망 바깥의 판매자를 통해 단돈 20만원에 사들였다. 온라인으로 주문해 받은 폰이 도착했을 때의 그 기쁨을 아직도 기억한다. 대단한 것도 아니지만 스스로 합리적인 소비를 해냈다는 성취감에 도취되어 우쭐했었다. 다만 그 성취에 비례할 만큼 오래 쓰진 못했다. 훨씬 더 저렴하다 못해 도리어 돈을 받고 개통하는 수준인 비슷한 사양의 다른 모델 특가가 1년 반 무렵만에 나와서였다. 그 때 다시 바꾼 폰이, 지금 쓰고 있는 나의 여덟 번째 폰이자 여섯 번째 스마트폰인 갤럭시 A90이다. 20만원에 사들인 S10 5G는 27만원을 받고 당근마켓에 팔았다. 나 대신 판매해준 친구에게 수고비로 7만원을 주고도 본전이었다.
우연히 꺼낸 핸드폰 얘기가 여기까지 왔다. 요즘도 새 핸드폰은 꾸준한 내 관심거리이지만, 예전만큼 획기적이거나 합리적인 무언가의 매력이 없어 다시 핸드폰을 바꿀 생각은 쉽사리 하지 못하고 있다. 지금의 핸드폰은 사용하기에는 아무 부족함이 없지만, 19년도에 출시된 모델에 실제로 쓴 지는 2년 4개월 가까이 되어가 제조사 지원 소프트웨어 업데이트가 끊겼다. 한 버전까지만 더 지원했더라면 1년은 더 쓸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갈수록 갤럭시와 아이폰이 수렴진화하고, 신규 모델이 나와도 스펙이 종전과 대동소이하고, 수많은 핸드폰 제조사들이 스마트폰 경쟁 속에 도태되어 문을 닫는 바람에 갤럭시와 아이폰 말고는 현실적인 선택지가 없어져버린 것 역시 아주 아쉽다. 장차 애플페이가 국민카드를 지원하고 티머니 교통카드까지 지원하는 날이 오면, 그 때쯤 생애 처음으로 아이폰을 써보는 모험을 감행하는 것도 괜찮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