生의 영역에서 : "죽어감"이라는 또 다른 이름의 역설에 대하여
신세를 한탄하는 불치병 환자나 할 법한 섬뜩하고 우울하기 그지없어 보이는 이 말은, 사실 놀랍게도 그리 놀랍지도 새롭지도 않은 흔하고 자연스러운 일이라는 데 큰 역설이 있다. 삶을 숭배하는 생명체인 우리들은 "죽음"이란 단어에서부터 이미 큰 거부반응을 일으키겠지만, 사실 우리가 움직이는 모든 것들의 총칭인 "살아감"의 또 다른 이름은 "죽어감"이나 마찬가지다. 모두가 태어나는 순간부터 죽음을 향해 가는 운명을 함께 부여받았으니깐. 지금까지 이 행성에 존재했던, 존재하는, 존재할 모든 생명체에게 예외는 없다. 숱한 이들이 이 운명을 피해 가려 발버둥 쳤으나, 제대로 검증된 사례는 아직 이제껏 이 행성을 거쳐간 1080억 인구 가운데 단 한 차례도 나오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연과 운명에 대항하는 데 특출 난 소질이 있는 동물인 인간이 이를 순순히 받아들일 리 없다. 오늘날에도 시시각각 찾아드는 죽음의 위협으로부터 삶을 지켜낼 획기적인 방법과 기술이 나날이 발전 중이지 않은가. 하지만 아직까지 유기물로 이루어진 우리들 하드웨어의 근본적이고 구조적인 한계나 유한성이라는 우주의 대원칙까지 거스르기엔 갈 길이 멀어 보인다. 큰 사고나 질병 없이 이대로의 기술 발전 속도가 대체로 계속 이어진다면, 난 아마 지금 시점에서 65-70여 년 정도를 더 살다 사라질 것이다. 예전의 수명에 비해 많이 늘어났다지만 아직 한 세기도 채 되지 않고, 광활한 우주와 역사 속에서 나란 인간이란 찰나에 불과한 먼지보다도 못한 존재일 것이다.
죽어가고 있다. 하지만 아직까지 난, 죽어가기 싫다. 필연적으로 예정된 내 존재의 소멸을 완전히 인식하고 받아들이기엔 난 아직 너무 짧은 시간을 살았고 경험이 부족하다. 내가 가장 두려워하는 '무기력함'의 감정 차원을 훨씬 넘어선, 의식의 원천적 소멸이라는 자아의 파괴가 무섭다. 날 둘러싼 환경과 나의 만족감과는 별개로, 기쁨이든 고통이든 이 자체를 느끼고 생각할 수 있는 의식 그 자체가 인간이라는 생물로서 주어진 너무 큰 특권이라 느끼고 포기하고 싶지 않을 정도로 아직 삶에 대한 욕심이 많다.
그러나, 그럼에도, 죽어가고 있다. 시간은 지금 이 순간에도 언제나 흘러가고, 우리는 언제나 죽음과 함께 있다. 적어도 지금까지의 생명체 시스템에서, 삶과 죽음과 시간은 서로가 서로의 존재에 있어서 필요충분조건인 운명적 트라이앵글이다. 그 어떤 경우에도 예외는 없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죽음이 가져올 엄청난 불가역적 피해와 불합리함을 알면서도, 이토록 잔인하게도 죽음을 강요하는 자연법칙의 지배 하에 굴복해 죽음을 필연으로 받아들인다. 그도 모자라, 마치 삶의 유한성이 오히려 축복인 양 죽음이 선사하는 프로파간다에 중독되어 정신 승리하는 인지적 회피를 택한다. 소크라테스는 죽음과 자아는 양립할 수 없고 죽음에 이르는 고통은 일시적일 뿐이니 우리는 죽음을 두려워하거나 피할 필요가 없다고 했지만, 그조차 죽음으로 인해 소멸해 버릴 자아가 맞는 불합리함에 대해선 애써 다른 세계의 얘기인 양 논외로 두거나 회피하거나 하려 했을 뿐이다. 이쯤 되면 죽음을 실존적으로 어떻게든 받아들이라 말하는 철학자들보다, 신성성이니 사후세계니 영혼이니 하는 가상을 창조해 그나마 위안을 주려 하는 종교적 시도가 더 현실적이거나 효과적이다.
내게 처할 상황 자체로서의 죽음에 대해선 사실 별 생각이 없다. 그러나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삶에서 느껴질 고통과, 죽음으로 인해 삶의 수많은 특권들이 빼앗김이 불가피하다는 것이 참으로 뼈아프고 끔찍하다. 마치 군대와도 같은 것이다. 이왕 온 건 어쩔 수 없지만, 가기 전이라면 어떻게든 피하고 보고 싶은, 그러나 의무라는 이름하에 강제로 올 수밖에 없는 불가피한 불합리함이 개탄스러운.
죽어가고 있다. 그러나 쉽게 죽지만은 않을 생각이다.
P.S.
역사상 이제껏 죽은 사람의 인구가 1080억 명가량에 이른다는 것은 이 영상에 나온 걸 근거로 언급했다.
어쩌면 정확하지 않을 수도 있다.
https://youtu.be/bIAF7kBbGKk?t=100
이럴 때 봐줘야 하는 좋은 영상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