잼과 함께 자유롭게 산책할 수 있는 한국을 만들고 싶은 사람
감사합니다. '캔디드'
뭔가 속에 있던 답답함이 나간 느낌에 더 후련하고 정확하게 저를 알게 된 시간 같습니다.
저는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제가 중요하게 여기는 마음가짐의 우선순위 세 박자는 시간, 배려, 효율입니다.
어렸을 때 아버지는 원하는 대답이 정해져 있었습니다.
동생이 잘못하면 첫째인 제 잘못이었고, 집 안에 누군가 둔 쓰레기가 집 안에 보여도 제 잘못이었습니다.
게다가 "그건 제가 한 게 아니에요", "제 잘못 아니에요" 같은 말은 하면 안 되는 말이었습니다.
그때마다 변명한다며 맞았던 기억이 나요.
처음엔 그게 너무 하기 싫었는데, 어느 순간 깨달았어요.
아버지가 원하는 것에 맞추면 마음이 편하다는 걸.
그래서 저만의 가이드가 되었습니다. 남이 되어 생각하면 어떤 선택이 맞는지 보이고, 내가 싫더라도 효율적이고 모두의 시간을 위한 것이라면 더 좋은 결과로 이어진다고 믿었습니다. 단점은 참아야 한다는 것이지만요.
가정폭력이 지속되던 날, 저는 어머니께 떠나도 된다고 말해야 했습니다. 저와 동생 때문에 떠나고 싶어도 못 떠나고 있다는 걸 알았거든요. 너무 슬펐지만, 그게 맞는 선택이라 생각했습니다. 제 가이드라인에 따라서요.
아버지는 "노력할게요."라는 말은 회피라고 생각하셔서 싫어하셨습니다. 노력을 했다면 눈으로 보이는 결과가 있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어요. 그 말이 제 가이드에 맞닿았습니다. 생각하고 보니, "다른 사람도 겉에 보이는 것으로 판단하겠구나." 그래서 저는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는 결과.'에 집중하기 위해 제 선에서 최선을 다했습니다.
눈에 보이는 자격증을 따면 되겠다. 영어를 못해도 발음이 잡히면 "What?"이라는 말은 덜 듣겠다.
어떻게 보면 단순해 보여도 어려운 것이었지만, 자격증을 따게 해 주고 용기를 준 것이기도 합니다.
내가 후회하게 되는 수동적인 삶은 이제 능동적으로!
제 인생의 실패는 수동적이고 지시받는 삶이 길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15년을 살고 나니, 사회를 처음 접했을 때 저를 포기한 것 같은 사람이 된 것 같았습니다. 뭘 해도 되는지, 안 되는지 구분이 되지 않았어요.
다행히 저는 6살 때부터 책을 좋아해서 도서부장을 매년 했었을 만큼 항상 옆에 끼고 다녔습니다. 독서가 사회생활의 일부를 가르친 셈이죠.
그러나 책이 선생님은 되더라도 부모님은 될 수 없었습니다.
게다가 집이 워낙 가난해서 학원 다니는 친구들이 부러웠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성적과 집안으로 대우가 달라지는 걸 느꼈어요. 그래서 나도 사교육을 받아볼 수 없을까?'방법을 고민을 하다가 생각했습니다. "내가 장학금을 따서 그 돈으로 학원에 다닐래."
첫 번째 목표로 이룬 것은 삼성꿈장학금이었습니다. 고등학생 시절 담임선생님은 하지 말라고 너는 안 될 거라고 하셨지만, 저는 강행했습니다. 하지 말라는 말은 이미 두려운 말이지만, "안 되면 말고, 하고 후회하는 게 안 하고 후회하는 것보다 낫겠다."라는 마음이었고 유일한 기회이지 않을까 망설이면 안 된다고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우리 학교 전교생 중에서 저 혼자 장학금을 받게 되었다는 말에 뿌듯했던 기억이 납니다. 처음으로 스스로 원해서 하는 공부라 100등씩도 오르고 2등급도 받아보며 내가 혼자라도 뭔가 할 수 있다는 믿음이 확고해졌습니다. 또 처음 제 의지로 하지 말라는 말을 거부하고 이룩한 느낌이라 설렜습니다.
그러나 어머니도 집을 떠나셨고, 대학 비용을 제가 부담해야 했기에 최대한 비용이 적은 대학으로 진학했습니다. 다시 벽에 막힌 기분이었습니다.
그래도 한번 용기가 나니, 비록 지방의 대학교를 갔지만 다음 도전도 쉬워졌습니다. 연합동아리도 들고 리더십인재양성 프로그램이나 창업 캠프 등으로 많은 사람과 만나보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주변에서 어떤 생각과 선택을 하며 꿈이 무엇인지 이야기도 들을 수 있었습니다.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좋은 직장, 좋은 사람, 결혼, 가족과의 행복한 삶을 바라고 있었습니다.
마치 인생의 템플릿처럼 느껴졌습니다. 내 과거의 굴레 같다는 생각에 "어디선가 내 꿈을 찾을 수 없을까?"고민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다 워킹홀리데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고등학생 때는 유학을 이미 다녀왔거나 곧 떠나는 친구들이 반을 넘어서 부러웠는데 새로운 경험이라도 해보고 나서 꿈을 고민해 보자며 캐나다로 갈 준비를 했습니다.
"너 같은 게 외국에 가면 일주일도 버틸 수 있을 것 같아? 감히 집안의 가장이 어디를 가!"라는 아버지의 말에도 한번 용기를 얻었던 저라서 다음 스텝을 나아갔습니다.
막상 가보니 더 편안한 곳이었습니다. 이게 숨을 쉰다는 거구나 싶어 너무 행복했습니다.
내가 생각하고 선택하고 그것에 책임을 지는 삶이 무엇인지 배웠습니다.
이제 능동적으로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저를 사랑할 수 있게 됐습니다.
장점을 더 강력하게!
캐나다 사람들은 저보다 더 기다릴 줄 알았고, 마음에 여유가 있었어요. '사람들마다 누가 맞다 틀리다가 아니고 여러 가지로 생각하는 것을 하나하나 고려하는구나.'반성이 됐습니다.
그 시기를 거치며 저만의 질문법이 생겼습니다.
"맞아? 아니야? 이렇게 한다면? 반대라면?"
이 질문이 어떤 행동 전에도 다시 생각하게 만듭니다. 그리고 배운 것이 있다면 -- 말이 '아'다르고 '어'다르다. 는 것입니다.
같은 내용도 어떻게 전달하느냐에 따라 결과가 달라진다는 걸 몸으로 익혔고, 이것이 저의 강점이 됐습니다.
서비스 마케팅 시간에 배운 것도 맞닿아 있습니다. 내가 불편함을 느낀 부분에서 서비스가 나온다는 것. 그래서 저는 이렇게 살기로 했습니다.
"나를 위해 살되, 동시에 남을 위한 방향이 되도록!"
고등학생 때 가치관은 '어제보다 나은 사람이 되자'였습니다. 하나씩 더 나아지려 노력하다 보니 작은 것도 조금씩 눈에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공든 탑은 무너지지 않는다'는 말처럼, 저는 그렇게 식품공학을 전공하던 중에 경영학을 복수 전공하기로 결심했습니다. 언젠가 꼭 창업을 해야겠다는 생각에 자금이 흐르는 것과 영업, 마케팅, 금융과 인사에 대한 지식을 갖추려 노력했습니다.
회계와 관련된 자격증 5개를 따기는 했지만, 저와 잘 맞는지 미지수인 학문이었습니다. 그래도 배웠기 때문에 다른 친구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기도 합니다.
지금은 원래 계획과 다르게, 전혀 몰랐던 코딩을 배웠습니다. AI를 API로 직접 연동해 보면서 시야는 더 넓어졌습니다.
- 불편함에서 서비스가 나온다고 배웠는데, 제가 불편하게 느낀 것은 수술 후에 있었습니다.
제 반려견 잼은 잘 훈련된 개입니다. 짖지 않고, 목줄을 놓치면 그 자리에 멈춰 기다립니다. 하지만 훈련을 시키지 않았거나 비반려인을 신경 쓰지 않는 몇 견주들과 무섭다는 인식에 어디를 가도 거부당하기 일쑤입니다. "배운 것을 활용해 보자!"그렇게 기획을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크롤링으로 견종별 성격과 기질 외에도 털은 어떤지 등 자료를 이미 취합한 만큼 '도전은 무조건 해보자.' 라는 마음이 확실합니다.
엄청나게 많은 것이 달라지지 않을까?
저는 6번의 교통사고, 7번의 수술을 겪었습니다. 정말 힘든 시간이었습니다.
캐나다에서 한국으로 오게 된 계기이기도 합니다.
"""
어떤 개가 달려와 얼굴을 물어뜯어가면서 갑작스럽게 수술을 해야 했습니다. 저는 그 개의 주인을 용서하기 어려웠습니다. 시바견은 야생성이 강한 견종입니다. 그런 특성상 어떤 돌발 상황을 만들지도 모르는데 귀여워 보인다는 이유로 입양했다면 교육을 확실히 시켜야 합니다. 그 주인은 그런 것을 하지 않고, '사람도 아니고 개가 그런 건데 어쩌냐. 미안하지 못해서 미안해.'라는 말에 수술을 해야했던 것보다도 그 인식에 충격을 받았습니다.
"""
한국에 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팔꿈치 관절이 부서졌습니다. 수술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발목 골절과 신경손상으로 다리를 쓰기도 어려워졌습니다. 캐나다에서 요리로 3년을 버텨왔는데, 연달아 터진 사고에 속수무책이었습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이제는 없다.'는 생각이 머리에 가득 찼습니다.
당장 먹고살 수가 없었습니다. 혼자였습니다. 의료비와 생활비를 감당하지 못해 빚이 쌓였고, 의료수급자 1종이 되었습니다.
분쇄골절이었던 팔꿈치 깁스를 풀자마자 바로 다리 수술 후에 깁스를 하니 정말 조금만 움직여도 저릿저릿했습니다. 움직이면 안 된다는 의사의 말에 저는 누워서 많은 고민이 들 수밖에 없었습니다.
저는 그 절망이라는 당시에도 제 반려견은 양치기견이기에 잼을 위해 3층부터 팔이 다시 부서질 것 같았지만, 목발로 내려와 하루에 3번 이상은 꼭 산책을 시켰습니다. 짧은 시간밖에 가능하지 않았지만 책임을 다해야 한다는 생각이었습니다.
가끔 "왜 입양했냐는 말이 있고 그건 짐이지 않냐, 파양 해라."
그러나 잼은 제 거의 유일한 가족이라 저는 생각도 할 수 없었습니다.
집에만 있는 제 생활에 대한 희망이 크게 느껴지지 않더라도 하나씩 뭐라도 할 수 있을 거란 생각에 반려견 운동지도사 1급 자격증을 취득했습니다. 반복해서 무료 강의를 듣고 작은 원룸에서 잼을 위해 근육의 밸런스와 최대한 동물적 감각이나 생각이 무엇일까 고민했습니다. 그리고 움직일 공간이 없어 힘들 제 반려견을 위해 배운 것을 작은 방에서 앉아 최소한의 운동을 시켰습니다.
그 당시, 움직임에 제한이 있던 저는 잼을 위해 새벽 2~3시에 사람이 없을 어린이 공원에 가서 가끔 불법이지만 목줄을 풀어주고는 했습니다. 해외에서는 입양 전에 자격이 되어야 하며, 교육이 확실해야 해서 추후에 하이킹을 가더라도 목줄을 풀 수 있는 공간이 있지만 우리나라에서는 그게 불가능했기 때문입니다.
저는 입양하자마자부터 바로 잼이 조용할 때마다 칭찬을 해주고 놀아줬습니다. 셀티 특성상 잘 짖는 개이기 때문에 우리나라에서 힘들 수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내가 조용할 때마다 관심을 주고 있다는 인식을 주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11시간 비행기 안에서도 짖지 않았습니다.
원룸에서는 소음이 있다면 쫓겨나지만, 저는 자신이 있었기에 애완동물이 안된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어떤 시험에 걸쳐 입주허락을 받았습니다.
그러다 의문이 생겼던 것은 "훈련된 개를 증명할 수 있는 시스템이 있다면 어떨까?" 지금은 내가 혼자 마치 도박을 하듯 제의하고 받아낸 허락이지만, 내가 취득한 민간 자격증처럼 "개도 그게 있다면 조금은 바뀔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이었습니다.
저는 '개는 자율적으로 살 수 있는 주체지만, 공존에서라면 인정받아야 살 수 있으니 안타깝게도 살기 위해서라도 바뀌어야만 한다.'라는 생각이 많이 들었습니다.
알아보니 정부도 같은 방향을 보고 있었습니다. 입양 전 교육 의무화라는 희소식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견종별 특성 자료를 찾는 중에 반가운 소식이었기에 더 구체화를 위한 고민을 했습니다.
"착한 개 인증 + 입양 전 매칭 + AI 훈련"
지금도 옆집은 빌라 대문을 열어두고 개를 풀어놓습니다. 물려고 하는 제스처도 볼 수 있었습니다. 인식개선이 호기심과 펫휴머나이제이션이 온 지금 꼭 빠르게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마침 저는 LLM활용과 서비스 기획에 관련된 훈련을 2회 참여하고, AWS에서 추가 일부 교육을 받았고 창업을 하고 싶다는 생각에 경영학 복수전공을 하며 대학생때 품은 꿈에 동아줄을 쥐어보려 합니다.
그래서 이 도전을 해보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