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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4일 베르사유 궁전
숙소에서 약 20km 거리에 있는 베르사유 궁전으로 가는 날이다. 교통편을 알아보니, 지하철을 갈아타고 버스도 타야 한다. 길 찾는데 에너지를 쓰는 것이 싫어서 우버를 불렀다. 네 명이 이동하니 우버를 부르는 것이 여러모로 이익인 것 같다. 넓은 베르사유 궁전과 정원을 돌아볼 생각을 하니 출발 전부터 좀 지치는 기분이다. 20대에 한번 가본 곳이라서, 만약 나 혼자 하는 여행이라면 베르사유 궁전은 방문하지 않았을 것이다. 끝없이 이어지는 왕실의 화려한 물건과 내부 장식의 인상이 워낙 강렬해서 단 한 번의 방문으로도 잊히지 않는 곳이기도 하지만, 분명 그곳은 관광객으로 가득할 것이기 때문이다.
아직 입장 시간이 되기 전인데 입구 광장은 벌써부터 기다리는 사람들로 붐빈다. 극성수기라 그런지 어제 에펠 타워도 그랬고 베르사유 궁전에도 입장하려는 사람들로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 인파가 몰려왔다. 게다가 아침부터 폭염이다. 정문 앞 생수를 파는 노점상들한테서 한 병에 1유로씩 하는 생수를 샀다. 한 푼이라도 벌기 위해 땡볕에 서서 물장사를 하는 사람들을 보니 맘이 안 좋다. 얼마나 더웠던지 궁전 측에서 살수차를 가져와서 줄 선 사람들을 향해 물을 뿌려준다. 머리와 옷이 다 젖어도 아이들은 신나 한다.
루이 14세 때는 일요일 아침에 왕이 아침을 먹는 모습을 일반인들도 와서 볼 수 있었고, 심지어 왕비의 출산 장면도 공개되었다고 한다. 궁전 안의 수많은 방들은 전국의 영주들도 와서 머무르며 왕과 친해질 기회를 갖기 위해 사용되었다고 한다.
관광객이 넘쳐난다. 사람들에 거의 밀려서 이동하는 수준이다. 그러다 보니 특히 소지품을 신경 써야 한다. 친구가 기념품을 사려고 핸드백을 열려고 보니 지퍼가 열려있고 지갑이 반쯤 빠져나온 상태로 있었다. 누군가 훔치려고 시도하다가 실패한 모양이다. 핸드백을 앞쪽으로 매고 있었는데도 과감하게 지퍼까지 열었다니 대단한 전문가가 틀림없다. 그나 그녀에게는 이곳이 직장이겠지? 그들은 직장에 들어오기 위해 아침마다 입장권을 구매하고 작업 대상을 물색할 것이다. 그들의 직업윤리는 뭐 들키지만 말자 정도일까?
오늘은 사람이 너무 많아서이기도 하지만 나는 궁전 내부보다는 넓은 정원을 좋아한다. 특히 물에서 올라오는 생동감이 넘치는 말들의 조각상이 있는 연못은 오랫동안 기억에 남아 있었다. 20대 여행 당시 숙소에서 만난 또래의 남자와 함께 서로 사진도 찍어주고, 구경했던 기억이 났다. 아직도 그때 그가 찍어준 말 조각상 앞에서 밝게 웃고 있는 사진이 있다. 청춘일 때 와보았던 장소에 아이들을 데리고 오니 또 감회가 남다르다. 아이들을 연못 앞에 세워두고 사진을 찍었다. 친구가 있으니 아이들과 셋이서 사진을 찍을 수 있어서 좋다.
근처 매점에서 맥주 두 캔과 아이들 먹을 음료수와 아이스크림을 사서 호수 옆 나무 그늘에 앉았다. 멋진 풍경을 바라보며 친구와 속 깊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항상 자기 몫의 세배 이상의 책임감을 가지고 가족을 돌보는 친구의 이야기, 아직도 주체적으로 살지 못하고 있는 나의 핸디캡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그의 문제를 내가 해결해 줄 수 없고 그 반대도 마찬가지이다. 우리의 고민은 한국을 떠나와도 끈질기게 우리를 따라왔다. 그래도 위안이 되는 것은 이 특별한 풍광 아래에서 케케묵은 똑같은 고민을 나눈 경험은 그나마 새로운 것이라는 점이다.
숙소 근처 센강이 보이는 식당에서 저녁을 먹었다. 해지는 파리의 모습을 눈에 열심히 담아본다. 한낮의 열기가 사라지고, 적당하게 시원한 바람이 분다. 오늘이 파리에서 보내는 마지막 날이다. 또 아이들과 나에게는 100일 여행 중 절반을 보낸 프랑스에서의 마지막 밤이기도 하다. 친구가 파리에서 며칠밖에 머물지 못해서 아쉽다. 아이들과 나 역시 9일간 파리에 있었는데 못 가본 곳이 많아서 아쉽다.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파리에서 1년 정도 머물고 싶다. 파리의 모든 골목을 다 두 발로 걸어보고 싶고, 작은 갤러리까지 모두 들어가 보고 싶다. 관광객이 모르는 숨은 장소들의 지도를 만들고 싶다. 그런 날이 꼭 왔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