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를 감정으로 걷다》
③ 샌프란편 – 부정맥의 도시

“숨 쉬는 법은 배웠지만, 감정은 아직 목적지를 몰랐다”

by seikoon

[이 시리즈에 대하여]


이 글은 도시를 소개하지 않습니다.

여행을 권하지도, 정보를 정리하지도 않습니다.


나는 지도를 따라 걷지 않습니다.

그 대신, 감정이 지나간 길을 다시 걸어봅니다.


도시는 내 감정을 붙잡았던 배경일 뿐입니다.

그 장소들은 내 안의 기억과 감정을 부드럽게 끌어올렸고,

나는 그 감정의 결을 따라 글을 남깁니다.


그러니 이 시리즈는, 도시를 읽는 방식이 아니라

감정을 다시 살아보는 방식에 가깝습니다.


그날의 공기, 그 거리의 정적, 그 사람의 눈빛.

당신도 당신만의 도시를 떠올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샌프란시스코는 금빛 꽃가루처럼

감정을 날리는 도시였다.


향기는 분명 있었지만,

그 향기 때문에

나는 자주 숨을 멈춰야 했다.


감정은 늘 아름답게 흩날렸고,

그만큼 자극적이었다.

나는 이곳에서

살아가는 법을 조금씩 배웠다.

숨을 고르고, 속도를 늦추고,

멈춰도 괜찮다는 것을.


하지만 이상하게도,

감정의 리듬은 여전히 일정하지 않았다.

샌프란시스코는

나에게 부정맥 같은 도시였다.

20250423_1751_고호스타일 다리 풍경_remix_01jsgxd5wef43s0fneegy07mr6.png

아름다움이 흐르고 있었지만,

그 아름다움 속에서

리듬은 계속 어긋나 있었다.

감정은 흐르다 멈추고,

고요하다가 갑자기 흔들렸다.


나는 이 도시의 리듬을 따르려 애썼지만,

그 리듬은 언제나

내 심장보다 반 박자 빠르거나 늦었다.

감정은 때로 멈췄다가 뛰고,

조용하다 갑자기 요동쳤다.


그토록 아름다운 도시가

지금은 여러 과도기 사이에서

숨을 헐떡이며 자신과 싸우고 있었다.


젠더, 인종, 빈부, 기술, 정체성—


모든 변화의 최전선에서

이 도시는 숨을 헐떡이며

감정을 토해내고 있었다.


물결이 부드럽게 밀려드는 것처럼,

이 도시도 처음에는 조용히 나를 감쌌다.


바람은 서늘했지만 날카롭지 않았고,

햇살은 따뜻했지만 강요하지 않았다.

그저 "괜찮다"고 말해주는 듯한 공기였다.


그러나 도시가 주는 감정은

늘 예측을 벗어났다.


길모퉁이 하나를 돌 때마다,

같은 길을 걷는 중에도

감정의 고저가 일정하지 않아

나는 종종 내 안의 리듬을 잃었다.


어느 날은 눈물이 날 것처럼 아득했고,

또 어떤 날은 이유 없이 가벼웠다.

그것이 샌프란시스코의 방식이었다.


감정은 흐름이 아니라 충돌로,

고요가 아니라 파동으로 찾아왔다.

20250423_1752_유화 스타일 도시경관_remix_01jsgxg9xmen79w91dhwzz4fjh.png

한 번은 트윈픽스 정상에 오른 적이 있다.

도시를 내려다보는 그곳은 풍경이라기보다

감정의 고저가 겹쳐진 파노라마였다.


내가 사랑했던 도시와

지금 서 있는 도시가

동시에 존재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건 마치 이 도시가

나를 '두 개의 감정'으로 나눠놓고,

그 사이에 조용히 서 있으라고 말하는 듯했다.


나는 자주 금문교를 바라보았다.

언덕을 오르거나,

밑에서 올려보거나,

베이브릿지를 건너거나,

소살리토 쪽에서 돌아올 때도 마찬가지였다.


이 다리는 이상하리만치,

시시각각 계절마다

늘 다른 얼굴을 하고 있었다.


가까이서 보면 압도적이었고,

멀리서 보면 하나의 선처럼 얇고 고요했다.


구조는 완벽했고,

균형은 정교했으며,

그 거대한 붉은 철골은

태평양의 바람을 뚫고 서 있었다.


20250423_1753_1900년대 풍경화_remix_01jsgxjqgjefctecnja8dpgjxs.png

하지만 어쩐지,

그 다리는 나를 위해 서 있는 것 같았다.


누군가를 향해 가는 길이라기보다는,

내 감정이 잠시 머물다 가는 형상처럼 느껴졌다.


움직임을 위한 다리가 아니라,

흐르지 못한 정서를 걸어두는 무언가처럼.


● 기억의 교차점


나는 종종 아버지의 오래된 사진을 들여다본다.

지금의 나보다도 더 젊은 얼굴.


양복 차림에 검은 구두,

깡말랐지만 다부진 입을 가진

서울에서 건너온 유학생 청년이

1960년대 후반,

샌프란시스코의 햇빛 아래 서 있다.


전 세계의 젊은이들이

반전과 평화를 외치던 시대.

샌프란시스코는 그 한복판에 있었다.


히피 청년들은 장발에 청바지를 입고,

여성은 머리에 꽃을 꽂고,

기타를 치며 노래했다.


거리엔 담배와 대마초 냄새가

섞여 떠다녔을 것이다.


20250423_1806_60년대 히피 빈티지_remix_01jsgya6p4f6w97197yrkk0bfm.png

나는 자주 상상한다.

그 거리에서 그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지금은 세상에 없는 아버지.

그의 조용한 걸음과 그 도시의 햇살은

이제 사진 속에만 남아 있다.


그때는 몰랐다.

아버지가 걸었던 그 길을 내가 다시 걷게 될 줄은.


하지만 내가 다시 마주한 샌프란시스코는

그가 보았던 이상과는 너무도 달랐다.


나는 자주 생각한다.

우리는 함께 이 거리를 걸을 수 없다는 사실을.


이 도시를 두고 나눌 수 있는 대화가,

이제는 내 안에서만 반복된다는 것을.


그 낙심은 도시의 표정과 겹쳐졌고,

그리움은 안개처럼 오래 머물렀다.


● 도시의 신화와 균열


샌프란시스코는 감정으로만 채워진 도시는 아니었다.

그 도시는 언제나 이야기를 만들었고,

사람들은 그 이야기를 신화처럼 믿었다.


Warriors, Giants, 49ers—


싸우고, 압도하고, 금을 찾으려 했던 그 이름들이

이 도시의 영광을 대변했다.


그러나 이제 신화는 흔들리고 있었다.

진보의 상징이었던 도시는 중심을 잃고 있었다.


아름답던 것들은 낡았고,

공존하던 것들은 서로를 의심하기 시작했다.


진보가 진보를 잃어가고,

거리엔 누군가가 늘 누워 있었으며,

건물들은 비어 있었다.


밤이 되면 골목에 어둠보다 깊은 체념이 깔렸고,

아침이면 다시 무관심이 그 위를 덮었다.

20250423_1754_수묵화 도시 풍경_remix_01jsgxke9kf2dte6xfcsz1thd5.png

어느 날 문득 깨달았다.

진보란 무너지는 과정을 통해

스스로의 존재를 증명하는지도 모르겠다고.


그래서 나는 사라지는 것들에

자꾸 시선이 머물렀다.


닫힌 가게, 낡은 간판,

철거 예정인 창문 안에서

아직 바래지 않은 커튼 한 장.


애착은 결국

남는 것을 지키는 능력이 아니라,

떠나는 것을

끝까지 기억하는 마음인지도 모른다.


● 감정의 섬

20250423_1753_고호스타일 알카트라즈_remix_01jsgxh5w5eyw9hhxe5z7eferh.png

샌프란시스코 바다 저편에 떠 있는 알카트라즈는,

내 안에 갇힌 감정 하나를 닮아 있었다.


떠나고 싶지만 떠날 수 없고,

누구도 가까이 가지 않지만 잊히지도 않는 곳.


감정은 때로 섬이었고,

그 섬은 감정의 모양을 하고 있었다.


바람은 그 위를 지나갔지만,

정작 감정은 어디로도 가지 못한 채

조용히 그 자리에 머물러 있었다.


사람들은 그것을

유령이 머무는 곳이라 부르지만,

나는 오히려 그곳을

‘기억이 돌아가지 못한 자리’라 느꼈다.


창살은 녹슬었고, 벽은 낡았지만,

그 안엔 여전히

누군가의 침묵과 기다림이 머물러 있는 듯했다.


감정이란 그런 것인지도 모른다.


한때는 나를 가두었지만,

지나고 나면 그조차 품고 있게 되는 것.


누구나 마음속에 하나쯤은 알카트라즈가 있다.


그리고 나는,

그 섬을 외면하지 않고 바라보는 법을

이 도시에서 배웠다.


● 지워지지 않는 감정

20250423_1754_고호 스타일 도시 풍경_remix_01jsgxk3rkf2y89wr7w0t72mnw.png

샌프란시스코는 이제,

내가 처음 마주했던 그 도시가 아니다.


하지만 그래서 더 애틋하다.


낯설게 바뀌어가는 풍경 속에서,

나는 여전히

처음 들었던 바람의 방향을 떠올린다.


낮과 밤이 교차하던 공기,

사슴이 풀을 뜯던 잔디밭의 고요,

언덕 위에서 바라보던

금문교의 붉은 선 하나.


하늘이 너무 맑아서,

꽃은 너무 예쁜 색으로 변해가던 그곳.


그 모든 감각은 사라졌지만,

그 감정만은 아직 지워지지 않는다.


당신에게도 그런 도시가 있는가?


풍경보다 감정이 먼저 도착하고,

기억보다 오래 감정이 머무는 곳.


나는 한때 샌프란시스코에서,

지워지는 도시와

지워지지 않는 감정 사이를

조용히 걷고 있었다.


한때 누군가의 시간이 흐르던 그 거리 위를,

이제는 나의 감정이 조용히 지나가고 있다.


어쩌면 나는 그때,

나의 마음 한 조각을

그 도시에 두고 온 것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