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랙'을 흑인이라 번역할 수 없는 이유

영화 《6888 중앙우편대대》를 추천하며

by 박하재홍

1969년의 『뉴욕 할렘 컬쳐 페스티벌』을 기록한 다큐멘터리 영화 《축제의 여름》에는 이런 한글 자막이 나온다.


"니그로(Negro)가 사라지고 흑인(Black)이 태어난 해였죠. 1960년대 초만해도 누군가를 흑인(Black)으로 부르면 시비를 거는 거나 다름없었어요."


설명이 이상하다. 니그로와 블랙 둘 다 미국에서 흑인, 즉 '아프리카계 미국인'(African American)을 지칭하는 말 아닌가? 미국의 언론인 '샬레인 헌터 골트'는 자신이 뉴욕타임스에서 처음으로 아프리카계 미국인을 '블랙'으로 지칭하는 기사를 냈다고 회고한다. 당시 편집장이 '블랙'을 '니그로'로 다시 바꾸는 바람에 한바탕 설전을 벌여야 했다면서. 때는 1970년이었다. 블랙이 아프리카계 미국인의 자긍심을 나타내기에 더 적합하다는 사회운동의 정서가 기사에 반영된 것이었다. 대중음악에서 블랙뮤직을 즐겨 듣는 사람이라면 이런 구호에 익숙하다. "블랙은 아름답다!"(Black is beautiful!) 이 구호는 1960년대 블랙 자긍심 운동(Black Pride Movement)에서 널리 사용했는데, 거슬러 올라가면 1920년대 할렘 르네상스 시기부터 아프리카계 사람들의 정체성을 고취하기 위해 블랙을 은유적으로 사용한 시들이 있었다. 블랙은 무엇을 상징하는가? 지금 내 머릿속에 떠오르는 대로 적어 본다.


블랙은 위대한 아프리카 대륙이다. 블랙은 아프리카 대륙의 화려한 색채의 총 집합이다. 블랙은 아프리카 대륙의 다양성을 검은 피부라 뭉뚱그려 무시한 백인 우월주의에 대한 뚜렷한 저항이다. 블랙은 유색인종이라 불려야 했던 이들의 선두에서 난폭한 차별에 항거한 전 세계 아프리카인들의 짙은 역사다. 블랙은 이 모든 걸 품고 있는 다채로운 색이다.


2019년 5월 27일, 미국의 참전용사 퍼레이드에서 90대 고령의 할머니 세 명이 사람들의 환호를 받으며 나타났다. 이들은 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의 우편대대에서 활약한 대원들이었다. 855명 모두 니그로 여성으로 구성된 이 부대는 누구도 엄두를 내지 못해 2년 넘게 방치된 수백만통의 우편물을 훌륭히 분류하고 참전병들에게 전달했다. 생존한 병사들이 비로소 손에 쥔 편지는 무엇에 비할 수 없는 희망처럼 그들의 사기를 복돋웠다. 하지만, 이 놀라운 부대는 해단식도 없이 쓸쓸히 역사에서 지워지고 있었다. 다행히도 무려 76년만에 갈채를 받게 되었고, 이제는 영화 《6888 중앙우편대대》를 통해 이들의 이야기를 생생하게 감상할 수 있다. 시대적 배경은 1940년대이니 '니그로'가 보편적인 통칭이지만, 영화 대사에서 딱 한번 '블랙'이 등장한다. 부대원들이 기차 안에서 나누는 대화에서다.


"메리 매클라우드 베순을 몰라? 전국 흑인 여성 협회(National Council of Negro Women) 회장이고, 대통령의 흑인 내각에서(Black cabinet)에서 일하고 있는 분이야."


군생활 중 이들을 함부로 무시하는 백인 군인의 입에서는 니그로 대신 '니거'(Nigger)와 '쿤즈'(Coons)가 튀어나오기도 한다. 영화의 끝 무렵, 한 무리의 백인 병사들이 6888 부대원을 향해 진심의 거수 경례를 보낼 때는 나도 화면을 응시하며 덩달아 경례할 수 밖에 없었다. 이제부터 나에게 블랙이란 이 영화가 통째로 들어간 단어다. 블랙은 결코 피부색 또는 인종을 뜻하는 게 아니다. 실재하지 않는 인종이란 개념 때문에 겪어야 했던 무수한 이들의 고초와 사연이 켜켜이 압축된 은유의 표현이다. 사람을 일컫는 블랙은... 우리나라의 '정'과 '한'처럼 외국어로 적절하게 번역되기 어려운 그런 짙은 단어다. 참고로 실존 인물들을 소개하는 마지막 부분에선 아프리카계 미국인이라는 공식 명칭이 쓰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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