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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공 Nov 11. 2015

첫 해부의 순간

나에게 허락해 주신 것들

당연한 이야기지만 정상적인 의과대학 교육과정을 밟은 의대생이라면 모두가 해부학 실습을 하게 된다.

우리가 실습 때 사용하는 시신을 카데바cadevar라고 부르는데 이 카데바는 시신기증을 통해 우리와 만나게 되고 '사망했기 때문에 산 사람과 연을 맺는', 설명하기 묘한 관계가 된다. 

집도식*이 끝나고 처음 보게 된 우리 조의 카데바는 70대 여성이었다. 해부, 시신, 이런 단어를 생각할 때 일반적으로 상상하는 공포스러운 이미지들은 실제 카데바 앞에 서있는 우리에게 아무 효력이 없게 된다. 빈 집이기 때문이다. 뭔가 철학적인 생각을 해보겠다고 내가 한 2주 정도 고민해본 끝에 나온 비유가 이거다. 


카데바는 빈 집이다. 


사람이 살던 빈 집. 빈 집에 들어가면 무서울 수 있지만 그렇다고 모든 빈집이 무서운 건 아닌 것처럼, 오히려 실제 살아있는 사람을 수술하는 것이 더 무서울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살아있는 사람은 죽을 수 있으니까. 

사람이 살아온 흔적이 집에 남듯 몸에도 모든 흔적이 남게 된다. 그래서인지 원래 알려진 사망원인**과는 다른 내용들이 해부를 통해서 드러나기도 한다. 정말 혼이 떠나간 빈 집이다.

그런데 이 카데바도 얼굴해부***를 할 때 보니 왠지 눈을 뜰 거 같고... 내가 해부를 잘 못해서 죄송하고... 그런 마음이 항상 있었다. 공부를 제대로 안 해와서 봐야 할 구조물을 다 못 보고 넘어가는 때도 있고 체력이 달려서 그냥 앉아만 있을 때도 있었다. 드라마나 영화에 나오는, 카데바를 보자마자 거품 물고 쓰러지는 학생은 백 명중 한 명 될까 말까. 뭐 시험기간 직전 실습에는 누가 카데바인지 분간이 안될 정도로 산 송장인 동기들도 있긴 하다.


해부학 실습은 꽃샘추위와 함께 시작해서 장마가 거의 다 되어 마치기 때문에 끝나고 나면 드디어 이 방부제냄새와 뒤섞인 묘한 냄새를 벗어날 수 있다는 감격이 몰려든다. 참고로 이 냄새는 샤워하기 전에는 죽어도 안 빠진다.


실습이 끝나고 모든 시신을 잘 수습한 후 합동추도식을 한다. 우리과 총대는 준비한 추도문에서 '우리가 학과 공부에 지쳐 게으르고  나태해질 때 시신을 기증해 주신 분들을 생각하면 그렇게 살 수 없음'을 이야기했다. 

맞아, 내가 의대생이라는 이유만으로 해부를 할 수 있는, 나의 삶과 전혀 맞닿아 있지 않은 남의 몸을 만지고 가르고 쪼개 볼 수 있는 그 권리는 내가 아닌 바로 그분들이 주신 거라는 생각을 해본다.


한 명의 의사를 만드는 데에는 수많은 죽음과 생명이 필요하다.

살리기 위해 아이러니하게도 죽은 사람을 먼저 대면하게 되는 의대의 첫 실습은 앞으로의 우리의 일이 삶과 죽음의 경계선에 항상 놓여있을 것을 말해주는 것 같기도 하다. 본과생활만을 돌아봐도 한계에 부딪혀서 힘들었던 순간들이 참 많았다. 하지만 그것을 겪는 것 또한 내게 허락된 일임을, 국시를 얼마 남겨두지 않은 이 시점에 돌이켜본다.




*집도식 : '칼을 든다'라는 의미로 해부실습을 하기 위해 수술용 칼을 잡게 된 것을 기념하는 것과 본격적인 본과생활이 시작되었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보통 집도식 때 간략한 정보- 성함, 나이, 사망원인을 알려준다.

***해부를 할 때 다 드러내 놓고 하는 것이 아니라 그날 할 부분만 들춰서 진행하기 때문에 얼굴을 볼 날은 정말 얼굴 해부하는 날 단 하루였고 그날 유난히 죄책감이 많이 들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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