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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EINA Sep 05. 2021

맨발 투혼을하려고 한건 아니었지만...

'허리케인 아이다' 앞에서 만난 나다운 강함

아침에 일어나니 해가 막 떠오르는 시간이다. 모든 게 가능한 것만 같은 그런 생각이 들게 만드는 찰나 하루 중 내가 제일 좋아하는 순간이다. 운동복으로 갈아 입고, 커피를 마시러 키친으로 내려간다. 따뜻한 커피가 푸근하게 느껴지는 선선한 아침이 와버렸다. 여름이 지나가버리는 게 아쉽다는 내 마음을 알지도 못하면서 무시 무시한 허리케인 아이다와 같이 시작하게 된 9월의 첫 주말이다.


오늘은 달려내야 하는 거리도 속도도 없이 달리기를 시작한다. 

목적도, 생각도 없이 그냥 1시간만 천천히, 오래 달려보자. 


가을의 냄새라고 하긴 기분 나쁜 물 비린내에 찡그려지는 미간과 함께 허리케인 아이다가 빠져나간 자리를 만났다. 얼마큼이나 물이 찼었는지, 어떤 비바람을 견뎌 내야 했을지 알 수 없었다. 뿌리채로 뽑혀 떠내려가던 나무들을 만났다. 땅과 끊어져 나가 뿌리가 훤히 보이고 가지는 다른 나무를 떠내려가지 않게 꼭 잡고 있는 것처럼 보이던 나무그루들... 쌓여 있던 나무 잔재들을 보고 내 발밑 그리고 저 높은 곳 까지도 물이 차 있었겠다는 생각에 두발로 서있는 지금 이 순간이 경이롭기만 하다.  자연 앞에 정말 아무것도 할 수 없는 호모 사이피언스들... 제대로 살지 않으면 정말 안 되겠다는 생각에 머리가 띵 하다. 


건장한 남자들 10 명이 달라붙어 들어도 움직이지 않을 것 같은 나무는 항상 있던 그 자리에서 벋어나 길을 막고 있었고, 아직 물이 빠져나가고 있던 곳에서 멈춰 섰다. 발목 넘어 종아리 중간까지 차오른 물을 바라보며, 돌아가야 하나?라는 생각을 하던 중, 지렁이가 움직이는 밑바닥이 훤히 들여다 보이는 맑아 보이는 물은 괜찮을 거야 하시며 양말을 벗고 운동화를 들고 오는 할아버지를 만났다. 할아버지 파상풍 주사는 맞으셨나요?라는 질문은 입에 담아두고,  '지렁이가 있으면 깨끗한 물인가? 집에 가서 찾아봐야지... 알지 모르는 이상한 생물이 살고 있는 건 아닐까? 아마도 내가 모르는 게 있는 것은 확실할 거야... '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나도 모르게 무엇에 홀린 것처럼 주섬 주섬 양말을 벋고, 운동화를 안고, 차가운 물을 건너가기 시작한다.


그렇게 건너온 물 앞에서 만난 건 떠내려가 버리고 자리만 남은 나의 벤치. 달릴 때마다 눈인사를 하고 지나가던 벤치였다. 올해 봄에는 가족 들과 산책을 나와 가족사진도 찍었던 그곳, 누군가를 기억하려고 만들어 놓은 그 벤치가 떠내려가 버리고 없었다.  1974년 에는 작은 creek이었다는 이곳이 이렇게 범람하는 게 속상하신 할아버지는 며칠 전 물이 공원 입구까지 가득 차 있던 사진을 보여 주신다. 그곳에 나는 없었지만, 무서워서 안타는 롤러코스터에서 무참히 떨어지는 만큼 가슴이 덜컹하는 순간이다. 아, 그리고 짧고 굵은 탄식... 


물이 얼마나 들었다가 빠졌을지를 보여주는 흙탕물이 젖어들어있는 나무와 풀의 높이에 다시 한번 놀랐다. 

매주 달려지나 가는 다리 위도 물이 범남했던게 분명하다. 아직 선명하게 남아있는 진흙 자국들... 

다리에 잠시 멈춰 선다. 야속하리 만큼 아름답고 고요한 아침. 폭풍이 휩쓸고 간 다음날도 오늘도 좋은 날씨에 감사하는 아침이지만, 보기엔 너무 아무렇지 않은 것 같은 하늘에  폭풍의 피해를 정통으로 맞았을 사람들 생각에 마음 한편이 아리다. 


때론 우리가 감당해야 하는 무게의 깊이와 넓이는 너무나도 다양하기에 '이 또한 지나가리라'라는 말이 너무나도 위협적인 말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제일 힘든 시간을 지나가고 있을 사람들 지나가겠지만, 이 또한 지나가겠지만, 힘이 들고 아픈지 않은 것이 아닌 것을 알기에, 잠시 숨이 멎는 것 같다. 


마음을 잡고, 정신을 가다듬고, 몸을 움직여 다시 달리기 시작한다. 무리를 지어 달려오는 고등학생 아이들, 반려 동물과 산책하며  걷는 사람들, 철인 삼종경기를 앞두고 트레이닝을 하는 사람, 지팡이를 의지하며 걷는 할머니와 할아버지들, 비로 만들어진 웅덩이, 진흙탕, 폭풍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를 각자의 방식으로 건너가고 있었다. 


그렇게 나도 내 몸과 마음이 가는 데로 달렸다. 그렇게 비워내고 오니 한결 가벼워진 아침이다.  맨발 투혼을 하며 비장하려고 시작한 모닝런은 아니었지만, 나다운 '강함'은 언제든지 나올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강함'에 대한 새로운 생각이 드는 아침이다. 단순히 얼마나 견뎌낼 수 있는가? 얼마나 버텨낼 수 있는가? 가 아닌 견디고 버티다 넘어져도 다시 추슬러서 지나갈 수 있는가? 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10.04km 1:01:01 6'04" 


@seinapl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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