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견
늦게까지 안 자고 버티다 맞는 새벽을 좋아했다. 그 마음은, 곧 올 손님을 대문 밖까지 마중 나가 기다리고 선 그것과 비슷하다.
다음 날 아침 스케줄이 없는 여느 날이면 내 본능은 언제고 '늦게 자기'를 택했다. 삶을 통틀어 내가 가장 좋아한 일은 디자인도 음악도 아닌 단지 엄청 늦게 자기인가 싶은 정도였다. 어느 밤 일기에는 ‘난 애초에 인간이 아니라 부엉이 아닐까. 어린 시절 숲에서 습성을 전이하는 좀비 부엉이에게 물렸는데 기억을 못 하는 건지도 몰라. 또한 이런 황당무계한 상상을 하고 굳이 글로 적는 용기는 부엉이만이 가질 수 있는 특권’이라는 둥 나의 정체성에 관한 가설을 적어 놓기도 했다.
그리고 그런 밤에는, 아니 버티고 난 새벽에는 언제나 억지로 잠자리에 들었다. 이 새벽의 에너지를 더 만끽하고 싶은데, 그러나 해가 뜨니 어쩔 수 없이.
아침 일찍 일어나는 쪽에도 그만의 에너지가 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우선 9시부터 18시 사이에 처리할 수 있는 업무가 현저히 많고, 자연광 아래서는 전기 조명의 도움 없이도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으니까. 그 시간은 신속하고 효율적이다. 그러나 나 같은 부엉이는 비로소 해가 진 후에야 ‘내가 원하는’ 생산적인 상태가 됐다. 뭔가 만들어낼 수 있을 것 같은 말랑말랑한, 압박감 없이 몰입할 수 있는 그런 상태 말이다. 밝으면 뭐든 잘 보이지만, 주변이 고요하고 눈이 부시지 않아야 머릿속이 들여다보였다.
새벽 청소 일을 시작하지 않았으면, 계속 그렇게 믿을 작정이었을 뿐 아니라 저녁형 인간의 생산성에 관한 연구 따위와 같은 자료를 수집해서 그걸 근거 삼아 내 믿음에 한층 더 설득력을 부여할 참이었다(실제로 노트 앱에 할 일로서 적어 두었다). 이러한 조사를 나중에 실제로 할지 말지 모르겠으나 근래 들어 우선순위에서 밀려난 것만큼은 명백해 보인다.
새벽에 일어나 다급해 할 필요 없는 이른 외출 준비를 하고, 미처 첫차를 놓쳐도 다음 차를 기다리면 되는 앞선 시간에 집을 나선다. 밖은 아직 까맣게 잠들어 있다. 태양보다 일찍 잠에서 깨 활동을 시작하는 기분이 생각보다 괜찮다.
저녁형 인간 시절에는 늘 해가 지기를 기다렸다. 종일 피곤하다가도 빛이 잦아들면 어두운 하늘에서 하나 둘 자취를 드러내는 별처럼 내 눈도 반짝이기 시작했다. ‘또 이렇다면 나도 어쩔 수 없지’ 하며 그날의 에너지를 쓰기 위해 책상에 앉았다. 자정은 내게 정오나 다름없었고 오늘밤은 더 길었으면 하고 매일 바랐다.
그런데 기다리지 않아도 된다니? 눈을 뜨자마자 내가 그리 사랑해 마지않던 캄캄한 새벽이라니. 그러니까 내가 아침형 인간이 아닌 것은 맞았더라도, 저녁형 인간일 필요도 없다는 사실을 이번에 발견한 기분이다. 차라리 더 일찍 자고 일어나 새벽으로 하루를 시작해 버리는 것도, 부엉이로서 바람직하다고 느끼게 된 것이다.
출근길 온 거리에 충실히 가라앉은 어둠과 그 사이를 비추는 적지만 충분한 빛으로 몸과 마음을 충전하며 걷는다. 온몸을 써서 구석구석 먼지를 닦는다. 그러는 동안 어제의 시름도 알게 모르게 닦여 나간다. 일이 끝나면 대다수의 사람들이 하루를 시작하는 오전을 맞는다. 새벽에 충전한 배터리로 나는 오늘의 태양과 소음을 견딘다. 그러고도 에너지는 바닥나지 않는다. 해가 지면 잠들기 못내 아쉽지만, 새벽은 또 온다. 생각보다 빨리.
처음에는 일찍 자는 게 일찍 일어나는 것보다 어려웠다. 어릴 때부터 성인이 돼서까지 늦게 자는 게 습관이었다. ‘오늘 분의 딴짓 다 한 거 맞아?’ 하는 더블체크 시간을 기어이 가졌다. 밤 열두 시가 넘어도 침대로 향하는 길은 요원하기만 했다.
종달새 체험 3주 차를 보내고 있는 지금은 어느 정도 시차(?) 적응을 했다. 초반에는 일찍이 잠들어도 열두 시에서 두 시 사이 이유 없이 깨서는 지나치게 말똥말똥해서 다시 잠드는 데 갖은 노력을 기울여야 했는데, 이제는 그 시기도 지난 것 같다.
일에도 많이 적응했다. 청소는 혼자 한다는 점이 무엇보다 좋다. 맡은 구역에 익숙해지고 있어서 일하며 팟캐스트를 듣기도 한다. 몸은 비록 힘들지만, 약간의 돈과 그에 비하면 막대한 시간을 버는 선택이었다는 생각에 만족스럽다(짧은 파트타임 알바고, 건물 전체 미화에 긴밀히 관여하는 포지션이 아니므로 가능한 일).
이번 참에 늦게 자는 습관과 더불어 버리고 싶은 게 또 하나 있다면 바로 미루는 습관. 하고 싶은 일도 밤이 오면 하려고 미루던 부엉이가 하기 싫거나 어려운 일은 오죽했을까. 달력 앱에는 몇 개월째 다음 주로 미루던 태스크가 하나씩 모여 이제는 하나로 합쳐진 거대한 To-do list가 있는데, 이걸 다시 잘게 쪼개 하루 하나씩 제거해 버리겠다는 크고도 작은 새해 소망이 있다.
어제는 이런저런 이유로 얼룩이 생긴 채 방치했던 냉장고 채소칸 서랍을 꺼내 씻었다. 얼룩은 세제 풀은 물을 잠시 부어 뒀다가 수세미로 문질러 헹구니 쉽게 지워졌다. 별 것 아닌 일도 바로 처리하지 않고 미루면 실제보다 훨씬 번거로운 일처럼 보이게 마련이다.
어쩌면 적당한 때, 완벽한 순간 같은 것은 처음부터 없나 보다. 뜬눈으로 새벽을 마중하던 시간은 설렜지만 그 기다림은 때로 지루했고, 하루의 초입에 만나는 새벽은 반갑지만 자야만 하는 밤은 여전히 아깝다. 내가 컨트롤해야 하는 건 어쩌면 이것. 저녁 밤 새벽 아침 낮과 같은 특정한 때가 아니라 그냥 덜컥 와 있는 시간. 눈 떴을 때 펼쳐지는 여느 어둠과 밝음. 언제고 시작해 언제고 끝날 이 24시간. 그것뿐이다.
이 정도까지 시간에 대해 융통성이 생긴 부엉이라니. 최초에 나를 문 좀비 부엉이도 이 소식을 들으면 대견해하지 않을까, 하는 일기를 오늘은 써 본다. 이번에는 종달새 측에서도 스카우트 제의가 들어올는지도.
Seine
<지금부터 쓰지 뭐>는 2023 브런치북 『지금부터 하지 뭐』에 이어지는 '쓰기'에 관한 그림에세이입니다.
https://brunch.co.kr/brunchbook/never-or-now