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헤벨의 단상: 각자의 사정

- 가끔은 격하게 외로워야 한다.(김정운 저)를 읽고-

   최근에서 유튜브에서 김정운 교수님의 인터뷰 방송을 보게 되었다. 여수의 어느 섬에서 미역 창고를 개조한 전원주택을 짓고 그림과 글을 쓰시고 낚시하시면서 생활하시고 계셨다. 김정운 교수님의 삶을 보면서 외로움과 고독을 즐길 수 있어야 인생 후반전이 행복해질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교수님은 외로움과 고독 훈련을 위해 4년 동안 가족과 떨어져 일본에서 미술 공부를 하였다고 한다. 4년 동안 처절한 고독을 느낀 후에 현재의 미역 창고(美力創考)를 짓고 살수 있게 되었다고 하셨다. 이런 김정운 교수님이 쓰신 ‘가끔은 격하게 이뤄야 한다’라는 글의 내용대로 교수님은 격하게 외로워야 한다는 삶을 실제로 실행하고 계셨다.  

출처: 교보문고(가끔은 격하게 외로워야 한다. 저자: 김정운, 출판: 21세기북스, 2016.1.4.)


      김정운 교수님의 ‘가끔은 격하게 외로워야 한다’를 읽었을 때 나에게 격하게 다가왔던 문장들이다. 


마주 보기는 왜 인간에게만 가능한가? 미숙아로 태어났기 때문이다. 세상의 모든 포유류는 어미의 배속에서 ‘완숙’되어 태어난다. 일단 태어나면 몇 시간 내에 자기 발로 바닥을 딛고 일어선다. 인간만 미숙아로 태어난다. 제 몸 하나 가누는 것도 수개월이 걸리다. 그러나 이 답답하고 고통스러운 기간에 아기는 타인과 눈을 마주치고 정서를 고유하는 능력을 배운다. 태어나면서부터 스스로 자기 몸을 가눌 수 있는 여타 포유류는 다른 존재와 눈을 마주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인간의 아기는 어쩔 수 없이 엄마와 눈을 마주쳐야 한다. 누워 꼼짝할 수 없는 상태에서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오직 그것밖에 없기 때문이다. 인간이 위대한 까닭은 미숙아로 태어났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떤 측면에서는 미숙한 이들을 사랑하고 배려해야 한다. 미숙함이야말로 소통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심리하걱으로 측은지심과 의사소통은 동전의 양면이다. 
좀 부족해 보이는 이들을 볼아 보는 것은 정언적 윤리학의 문제가 아니다. 인간 존재론의 핵심이다. 미숙한 이들을 돌아보지 못하는 사회는 필연적으로 소통 불가능한 사회가 되고 결국은 야만으로 전락하게 된다. 소통 부재의 원인을 매번 아무도 책임지지 않은 사회구조적 문제로만 설명하며 흥분할 일은 절대 아니라는 것이다. - 가끔은 격하게 외로워야 한다.(김정운 저)-

   김정운 교수님의 인간은 미숙아로 태어났기 때문에 미숙한 이들을 사랑하고 배려해야 한다는 말이 헤벨에게 위안이 된다. 요즈음 내 주위에 잘난 인간들이 너무 많아서 피곤했다. 모두들 왜 그렇게 잘난 인간들이 많은지 나만 빼고 모두들 너무 잘났다. (독자들께 일반화는 금물!!. 헤벨도 다른 이들의 눈에 잘난 척하는 인간으로 보일 수도...).  많은 이들이 자신들 말만 옳다고 주장하는 타인들이 종종 보인다.   정말 잘난 사람은 조용하다. 그릇이 꽉 채워져 있으니 흔들리지 않고 소란스럽지 않다. 소위 자기 자신이 잘났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자신들 기준에 조금이라도 뒤처지거나 기준에 맞지 않으면 편협하게도 사정없이 다른 사람들을 무시하기도 하고 불편한 시선을 내비치기도 한다. 

    이러한 무례한 행동이나 배려 없음을 보이는 이들은 그 이유가 무엇일까?  궁금하다. 경쟁에서 뒤쳐지지 않으려고, 아니면 누군가 자신을 알아봐 주기를 바라는 심리가 작용해서 일까? 


타인을 이해한다는 것은 그 사람의 문화적, 사회적, 심리적 맥락에 관한 이해를 동반한다. 타인의 전혀 예상치 못했던 모습에 옳고 그름을 따지면 단죄부터 하려고 달려들지 말자는 거다 타인의 분열적 자아가 속해 있는 해석학적 맥락에 대한 이해가 소통의 시작이다. 아울러 이런 방식의 소통이야말로 자신의 분열적 자아에 대한 성찰적 근거가 된다. 어떤 경우든 해석학적 여지를 남겨놓아야만 살만한 사회가 된다. - 가끔은 격하게 외로워야 한다.(김정운 저)-


   헤벨도 타인에게 이해받고 싶다. 헤벨 안에는 수많은 다층의 자아가 있으며, 가정환경, 삶의 치열함, 외모에 대한 자격지심, 사랑받지 못한 유년 시절의 기억 등으로 헤벨이라는 인간 자체에는 다양한 삶의 환경의 맥락 안에서 키워온 삶의 흔적으로 다양한 결이 있다는 것을 직장 상사 혹은 직장 후배들이 알아주었으면 한다.  이러한 면에서 헤벨이 타인에게 이해받고 싶듯이 나도 타인을 문화적, 사회적, 환경적 맥락에서 이해해야 한다.  한때 내가  편견을 가졌던 타인에 대해 ‘각자의 사정’ 이 있을 거다. 소통을 해보면 알 수 있는 각자의 사정에 대한 근원적인 뿌리가 있을 것이다. 


낯선 사람이 다가오면 자신도 모르게 몸을 뒤로 빼게 된다. 자신의 영역을 침범당했다는 본능적인 느낌 때문이다. 남자 화장실에서 소변기 사이의 거리가 가까우면 사람들은 불편함을 느낀다. 소변을 볼 때, 옆 사람이 ‘내 것’을 훔쳐보는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그래서 고급 호텔 남자 화장실의 소변기 사이 거리는 고속도로 화장실보다 멀다. 칸막이도 있다. 개인 공간을 확보해 주기 위해서다. 화장실만 그런 것이 아니다. 권력이 높아질수록 공간은 넓어진다. 단순히 사무실 공간만 넓어지는 것이 아니다. 사람들 사이의 거리도 멀어진다. 높은 사람 곁에 가까이 갈 수 있는 사람은 제한되어 있다. 아무나 곁에 오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이렇게 돈과 권력은 공간으로 확인된다. 모든 상호작용에는 지켜야 하는 물리적 거리가 있다. 권력이나 친밀도에 따라 달라지는 공간의 양상을 인류학자 에드워드 홀은 근접한이라는 학문으로 정리했다. 홀에 따르면 인간이 공간을 분류하는 양상은 다음 네 가지로 나뉜다. 친밀한 거리, 개인적 거리, 사회적 거리, 공간적 거리. 각 거리는 문화마다 다르다. 서양인들은 상대방의 사적 공간을 침범하면 쏘리, 익스큐즈 미를 연발한다. 모든 인간은 자신의 프라이버시를 보장받을 수 있는 사적 공간이 필요하다. 
- 가끔은 격하게 외로워야 한다.(김정운 저)-


   지난번에 헤벨은 ‘1평짜리의 삶’이라는 글을 남긴 적이 있다. 나의 직장 공간이 1평인 줄 알았는데  0.5평도 안된다고 직장동료가 이야기해 주었다. 

   하지만 며칠 전에 쪽방촌에 사시는 분들에 관한 다큐를 접하게 되었다.  0.5평도 안되는 쪽방에서 잠자고, 먹고, 일상을 사시는 모습을 보면서 헤벨은 감사할 줄 모르는 나 자신을 반성하고 또 반성했다. 

   돈과 권력은 공간으로 확인되며, 확실히 권력을 가지게 되면 주위에 사람들이 몰리지 않고 외로워진다는 말에 120% 공감한다. 작년에 최고 윗상사로부터 헤벨이 자신에게 잘 찾아오지도 않고 보고도 안한다고 핀잔을 받은 적이 있다.  최고 윗상사에게 보고할 때는 긴급한 사안 발생이나 윗상사분이 지시한 일들을 보고할 경우에 찾아뵙는다. 헤벨이 윗상사를 찾아뵙지 않는다는 것은 특별하고나 긴급한 사안이 발생되지 않기 때문이니 좋은 일이다. 

   확실히 윗분들은 특별한 일이 없어도 자신을 찾아뵙고 인정해주고 이야기해주기를 원하는 것을 알게 되었고 권력을 가진 분들이 외로울수도 있다는 것을 경험했다. 

    더욱이 자주 보고하고, 얼굴 도장 찍는 부하직원은 능력있는 것으로 오해하시는 분들도 계시다.  헤벨도 그러한 분들의 분위기에 편승해볼까 잠깐 고민했지만  결과적으로 존경하는 상사라면 언제든지 찾아뵙겠으나 그렇지 않으면 그냥 편하게 살기로 결심했다. 

                                          헤벨의 단상: 1평짜리 공간의 삶







작가의 이전글 헤벨의 영화:1986년 그 여름, 그리고 고등어 통조림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