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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벨의 단상:공부할 권리를 읽고(후속편)


   지난주에 올렸던 브런치 스토리에 올렸던  ‘공부할 권리’를 읽고에 1편에 대한 후속편이다. 

영화 혹은 책에서 인기 있으면 1편 후에 후속작으로 2편, 3편.. 을 만들어 제작한다. 헤벨 입장에서는 2편, 3편에서 처음 1편만 한 재미와 흥미를 주는 영화를 본 기억이 없다. 그만큼 1편이 우리 인간들에게 재미있고 흥미 있다는 것이 머릿속에 각인되어 있기 때문이리라. 이웃님들께서 '공부할 권리'의 후속편은 재미없을 수도 있음을 미리 말씀드립니다. 

 

출처: 교보문고(공부할권리, 저자: 정여울, 출판사: 민음사, 발매 2016.3.10.)


      -나는 왜 외로움을 느끼는가?-
이방인을 읽을 때마다 뫼르소의 고독이, 뫼르소의 어찌할 바가 없음이 더욱 절절한 슬픔으로 물 둘어옵니다. 안간힘을 써서 이 사회에 일부분으로 살아간다는 것, 이 세상에 속하기 위해 때로는 온갖 상처를 감내하며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를 해가 갈수록 더 깊이 느끼게 되기 때문입니다. 뫼르소는 정상이 참작되어 세상에 다시 나가더라도 그를 기다리고 있는 나날은 그리 행복하지 않을 것임을 그는 어쩌면 아주 오래전부터 서서히 자발적으로 이 세상에서 멀어지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그 처절한 이방인의 감정을 카뮈는 세상에서 가장 외로운 남자 뫼르소에게 투사했던 것이 아닐까요?

   -  공부할 권리(정여울 저)-


   카뮈 역시 철저한 이방이었다고 한다. 아버지는 가난한 노동자였고, 어머니는 남의 집 허드렛일을 해주는 하녀였는데 카뮈의 문학적 재능을 알아본 초등학교 선생님의 덕분으로 카뮈는 장학금을 받고 공부를 할 수 있었다. 카뮈의 마지막 소설 ‘ 최초의 인간’의 첫 페이지에 이런 헌사가 담겨있다고 한다. ' 이 책을 읽을 수 없는 당신께' 아들이 너무도 사랑하지만 아들이 쓴 글을 읽을 수 없는 어머니에게 책을 헌정했다고 한다. 카뮈의 어머니는 선천적 청각장애인이었기에 그의 집에는 항상 가난과 침묵이 감돌았다고 한다. 


    카뮈의 가정배경이 우리들이 보기에는 보잘것없고 안타깝지만 카뮈 집안의 가난과 침묵이 카뮈가 글을 쓸 수 있는 능력을 키워주었을 것이다. 송봉모 신부님이 인간들 각자는 자신의 십자가가 있다고 하였고, 자신의 십자가를 어깨에 짊어지고 가면 그것은 고통이지만 십자가를 어깨가 아닌 가슴에 안고 가면 그것은 포용이자 기쁨이라고 하셨다. 카뮈도 자신의 집안의 어려움과 부모님의 장애가 삶에 십자가 일수 있었을 텐데 어머니를 가슴에 품고 세계적인 작가가 되었을 수도 있었겠구나 싶다. 


  헤벨의  어머니도 글을 읽을 줄 모르셨다. 옛날분이어서 학교를 다니지 못하셔서 그런 것 같지는 않다. 외할아버지(동경 유학까지 다녀오셨다고 하셨음)가 우리 어머니에게 글을 아무리 가르치려고 했는데도 글 해독을 못하셨다고 한다. 나의 어머니는  장애영역을 작금의 장애범주로 나뉘자면 학습장애일 수도 있었을 것 같다. 

    나도 시간 날 때마다 어머니에게 한글을 가르쳐드리려고 하였으나 어머니는 간신히 자신의 이름 석 자만 쓸 수 있으셨다. 나의 어머니가 가지고 있던 글자를 읽지 못하는 장애는 어머니에게 인생의 십자가였을 것이다. 나의 어머니는 어차피 주어진 고통의 십자가라면 버리려고 애쓰지 않으시고 수용하시고,  자신의 십자가를 아기를 껴 안 듯 껴안고 사셨다. 대신 어머니는 글자 해독 대신 다른 분야로 자신의 능력을 키우셨다. 인간관계, 겸손함,  돈 계산 등

    헤벨의 어머니의 십자가를 통해 헤벨은 머리가 썩 좋은 편은 아니지만 한번 공부를 시작하면 끝까지 하려고 노력했고, 새로운 것을 배우려는 용기와 힘을 얻을 수 있었다.  어머니의 십자가가 나에게 주신 인생의 선물이었다. 


- 현대화된 가난 -

  현대화된 가난은 과도한 시장 의존이 어느 한계점을 지나는 순간부터 나타나기 시작한다. 이 가난은 산업 생산성이 가져다준 풍요에 기대어 살면서 삶의 능력이 잘려 나간 사람들이 겪어야 하는 풍요 속의 절망이다. 이 가난에 영향을 받는 사람은 창조적으로 살고 주체적으로 행동하는데 필요한 자유와 능력을 빼앗긴다. 그리고 플러그처럼 시장에 꽂혀 평생을 생존이라는 감옥에 갇혀 살게 된다. 
   돈을 쓰지 않고서는 하루도 살아갈 수 없게 되어버린 도시인의 현실을 가리켜 철학자 이반 일리치는 '현대화된 가난'이라는 용어를 썼다. 소비를 하지 않고 무언가를 한다는 것이 불가능해진 도시인에게 현대화된 가난이란 극빈층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닙니다. 돈을 쓰지 않고서는 아주 사소한 의식주도 해결할 수 없게 된 현대인들 모두는 가난하거나 부자거나 모두 현대화된 가난을 체험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 자신의 '자기다움' 무엇인지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조차 제대로 알 수 없게 만드는 걸림돌입니다. - 중략 – 이반 일리치는 '누가 나를 쓸모없게 만드는가?' 에서 매일 매일 '어떻게 돈을 벌고, 어떻게 돈을 쓸 것인' 를 선택하느라 빼앗겨 버린 우리의 진정한 힘이 무엇인지를 성찰하게 만듭니다. ‘ 우리는 자기 안의 재능을 볼 수 있는 눈을 잃었고, 그 재능을 발휘하도록 환경조건을 조절할 힘을 빼앗겼고, 외부의 도전과 내부의 불안을 이겨낼 자신감을 상실했다. '  - 공부할 권리(정여울 저) 


   오늘 마트에 가서 저녁 반찬을 사고 지갑에서 항상 쓰는 빨간 카드를 점원에게 건네주었다.  그런데 점원이 ’ 유효기간이 지난 카드‘라고 뜬다고 하면서 다른 카드를 달라고 한다.  ’이상하다. 내가 항상 쓰는 카드인데..‘ 직불카드를 급하게 저녁 반찬거리를 계산하고 나와서 점원한테 건네받은 카드를 보니 내가 항상 쓰는 빨간 카드였지만  2022년도 유효기간이 지난 카드였다.  헤벨은  예전 카드를 버리지 않고 지갑에 넣고 다닌다.  현재 사용하는 카드와 혼동한 줄 알고 지갑을 뒤졌는데 ' 아뿔싸, 현재 내가 사용하는 빨간 카드가 없었다. ‘' 머리가 하얗게 되었다. ’도대체 카드를 어디에다 두었을까? ‘ 곰곰이 생각해도 도통 생각이 나지  않는다.  우선 카드 정지를 시켰다. 그리고 핸드폰에 찍힌 카드 사용내역을 보았는데 3일 전에 카드 사용한 기록이 마지막이었다. 

   3일 동안 카드를 사용하지 않은 것이었다. 그러니 분실된 것도 몰랐다. 가방을 뒤지고, 차 안도 뒤지고, 가방도 뒤지고,  내 영역의 바운더리에 있는 모든 것을 다 뒤져보았는데... 없다.  아마도 3일 전에 무인 아이스크림 가게에서 카드를 꽂아놓고 그냥 온 것 같다. 

   다행히 누군가 나의 카드를 사용하지 않은 것 같았다. 누군가 카드를 썼다면 큰일이었는데 어떤 이유에서든 3일 동안 카드 사용내역이 없었으니 말이다.   9센티 X 3센티 플라스틱 조각으로 인해 반나절 이상 안절부절못하고 마음이 무거웠다. 3일 동안 직불카드만을 사용해서 카드가 분실된 것도 몰랐던 것이다. 플라스틱 조각으로 헤벨의 마음, 일상이 흔들릴 정도니 이반 일리치의 말대로 나는 '현대화된 가난'  혹은 자본주의의 노예가 되어버렸다. 


    현대화된 가난으로 인해 풍요 속에서 행복을 빼앗겨버렸다. 이것이 나  자신의 ’자기다움‘이 무엇인지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조차 제대로 알 수 없게 만들어버린 것이다. 

    이반 일리치의 말대로 자본으로 인간은 풍요롭게 되었으나, 우리의 일상을 가난하게 만든다는 말이 오늘은 실감이 난다. ’ 가난한 부‘야말로 사람들이 자유를 향유하며 행복을 누릴 수 없게 만드는 희소한 부이며, 우리 사회의 가장 힘없는 사람들에게 자유와 해방을 빼앗는 ’파괴적인 부‘임을 이반 일리치는 고발하고 있다. 플라스틱 한 조각으로 인해 나는 오늘 자유, 마음의 평안과 행복을 빼앗겼다. 

   그래도 어쩌랴... 이제는 이러한 ’가난한 부‘ 속에 살 수밖에 없는 존재이니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비를 하지 않고 단 하루도 살수 없게 되어버린 헤벨은 어떻게 돈을 벌고, 어떻게 가치롭게 돈을 쓸 것인가를 선택하는 법을 배우면서 진정한 부의 힘이 무엇인지를 성찰해가면서 살아보련다. 


이반 일리치의 유언에서 그는 우정이란 '나와 너 사이의 친밀성'이 아니라 ' 나와 네가 제3의 낯선 사람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의 문제라고 말합니다. 우정은 ’네가 나를 얼마나 좋아할까?‘를 계산하는 것이 아니라 ’나와 내가 힘을 합쳐 낯선 사람을 얼마나 따스하게 환대하는가?‘에 따라 결정된다는 것입니다. 
   - 공부할 권리(정여울 저)-


   이반 일리치의 ’우정‘의 개념이 헤벨을 놀라게 만들었다.  지금까지 우정이라고 생각하면 나와 친한 친구 사이의 인간관계, 서로 아픔을 나누고 함께하면 즐거운 관계로만 생각했는데 우정이 곧 사랑임을 주장한 이반 일리치의 우정이라는 개념은 참으로 참신하다. 

이반 일리치의 우정은 이제는 개인적인 관계의 선택에서 제한되지 않고 사회와 공동체 일원들의 최상의 관계로 누군가를 따스하게 환대하고 감싸 줄 수 있는 더 큰 범위의 사랑을 실천할 수 있는 것이다. 


  헤벨은 나의 삶의 어떤 선택을 할 때에 그것은 반드시 인간답고 나다운 삶을 살기 위한 것임을 잊지 않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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