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친'과 ' 도그맨 '영화를 보고 -
책보다는 영화와 드라마가 쉽게 나에게 들어온다. 눈이 아픈 이후로 책을 집중해서 읽기가 쉽지 않다. 눈의 소중함을 다시 한번 깨닫는 이유중의 하나이다. 읽고 싶은 책도 하고 싶은 것들도 건강이 허락되지 않으니 쉽지 않다.
주말 동안에 내가 선택한 영화는 ‘독친’과 ‘도그맨’이었다. 독친은 한국영화, 도그맨은 뤽베송 감독의 프랑스 영화였다. 전혀 공통점이 없어보이는 영화였는데 보고 난 후에
‘ 한 존재를 만들거나 키우는 자로서 최소한의 책임은 그 존재가 사회에 속하고 본성대로 살아갈 권리와 능력을 키워 주어야 한다’는 나만의 결론을 내린 영화들이었다.
‘독친’ 영화는 잘못된 모성애로 인해 고 3자녀가 엄마로부터의 해방의 방법으로 자살모임에서 자살을 선택한다. 자살이라도 믿고 싶지 않은 엄마는 경찰관들이 조사하면서 드러나게 되는 딸의 아픔과 고통을 알게 된다. 자녀에게 알레르기가 있는 줄도 모르고 공부를 잘하도록 머리좋아지는 등푸른생선을 먹이는 엄마, 유일하게 사귄 친구가 아이돌 연습생이라는 이유로 만나지 못하게 하며, 딸의 핸드폰까지 도청하는 엄마의 행동들은 ‘독이되는 부모’로부터 자살이라는 수단을 선택한 딸에 관한 이야기였다.
‘ 도그맨’ 은 뤽베송 감독의 영화였다. 영화 보는 내내 그냥 마음이 아팠다. 투기견을 키우는 아버지를 둔 주인공, 투기견들을 배고프게 해야 싸움에서 이길 수 있게 만들기 위해 개들을 굶기는 아버지의 말을 듣지 않고 개들에게 먹이를 주었다는 이유 하나로 개들과 철장에서 생활하게 된 도그맨. 어머니는 통조림 몇통만을 철장 안으로 던져주고 떠나버린다. 자신의 통조림을 먹이면서 키운 개들 사이에서 만들어진 강아이지를 보호하려다 아버지가 쏜 통에 맞아 손가락이 잘리고 척추에 파편이 튀어 걷지 못하게 된 도그맨.
도그맨은 세상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갈구하고 그들과 함께 하기를 원하였지만 상처와 버림으로 점철되는 삶을 살아가게 된다. 자신의 모습이 맘에 들지 않아 화장과 변신을 통해 자신의 모습을 바꾸고자 하지만 변신 후에 씻어내는 도그맨의 표정에 공허함이 묻어나온다.
‘불행이 있는 곳마다 신은 개를 보낸다’는 영화의 문구처럼 도그맨은 불행할 때마다 개들로부터 위로와 삶의 희망을 찾아간다. 수십마리의 개들 속에서 자신의 삶을 마무리 하는 도그맨의 모습에서 아버지로부터 받은 학대, 사랑했던 사람으로부터의 버림, 인간들과 섞이지 못하는 신체적 한계 등의 아픔이 고스란히 비쳐졌다. 도그맨에서 인간이 불행해질 때마다 신은 도그를 보낸다는 말에 God를 거꾸로 하면 Dog 가 된다. 도그맨에게 개들은 신과의 만남의 통로였을 수도 있었을 듯 싶다.
'독친'과 '도그맨' 영화에서 주고 싶었던 영화의 의미를 굳이 찾자면
인간이든, 물질이든 그것이 무엇이 간에 존재를 만들었거나 키우거나 함께하는 인간으로서의 최소한의 책임은 무엇인지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영화였다.
생명이든 물질이건 내가 만들었거나 키우는 존재에 대한 최소한의 책임은 타인마다 모두 다를 것이다. 헤벨인 나는 ‘ 그 존재들을 사회에 속하고 본성대로 살아갈 권리와 능력을 주어야겠다’로 나의 사고를 귀결시켰다.
나라는 인간은 책임져야하는 것들로부터 마음이 무거워 자유롭지 않을 때도 있다. 버거우기까지 할때도 있다. 그렇다고 나의 삶에 책임져야하는 것이 가볍거나 없어진다고 해서 나의 삶이 풍요로워지거나 행복해진다는 보장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