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묵에 대한 가슴 시린 추억

전통시장에 가면 종종 직접 어묵을 만들어 파는 가게에 들르곤 한다. 어묵 안에 떡, 게맛살 혹은 소시지가 들어간 어묵뿐만 아니라 고추장이 들어간 매운 어묵, 사각 어묵, 매 사각 어묵, 디스코 어묵, 상보 어묵, 야채 어묵 등 참으로 다양한 어묵들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지금이야 전통시장이나 마트에 가면 손쉽게 구할 수 있는 어묵이 내가 초등학교 5학년이었던 40년 전만 해도 고급스러운 먹거리 반찬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 당시는 엄마가 해주던 빨간 고추장 넣고 참깨를 솔솔 뿌린 어묵볶음 반찬이면 밥 한 공기는 게눈 감추듯 먹어 치우곤 했었고, 어묵이 들어간 떡볶이는 그 당시 나의 최애(最愛) 간식이었다. 입안에서 살살 녹고 감칠맛 나는 어묵의 맛에 매료되곤 했던 나는 어묵에 대한 가슴 시린 추억으로 인해 초등학교 5학년 이후로 어묵이 더는 나를 설레게 하지는 않았다.


화창한 초등학교 5학년 가을 운동회 날이었다. 1980년대 가을 운동회는 온 마을 잔치였고 동네 어르신들이 오셔서 커가는 꿈나무들과 함께하는 시간이었다. 온 마을 사람들이 함께 원색 오재미로 커다란 박도 터트리고, 달리기 계주도 하면서 친목을 다지는 날이었다. 초등학교 4학년 가을 운동회까지는 우리 가족 중에서 큰어머니가 항상 아버지와 함께 오셨었다. 여기서 내가 말하는 큰어머니는 보편적으로 생각하는 큰아버지의 부인이 아닌 우리 아버지의 법적인 조강지처인 첫 번째 부인이다. 나에게는 두 명의 어머니가 계셨다. 큰어머니는 법적인 부인, 나를 낳아주신 우리 엄마는 주민등록등본에 동거인으로 되어 있는 분이셨다. 1916년에 출생하셨던 나의 아버지는 자식을 낳지 못하는 큰어머니 대신에 가문의 대를 이어야 한다는 집안 어르신들의 요청에 의해 한국 6.25 전쟁으로 남편을 잃고 경제적으로 힘든 엄마를 데리고 와서 한집에서 같이 살았다. 엄마가 오기 전까지 무자식이셨던 아버지는 다행스럽게 엄마로부터 여섯 명의 자식을 얻었다.


사춘기가 시작될 5학년 무렵부터 우리 집안의 모순적인 가족 구조와 어머니가 두 명이라는 사실이나도 모르게 고개가 숙여지고 비밀이 많은 아이가 되어갔다. 숨기고 싶었고 창피하게 여겨졌던 나의 가정사(家庭事)가 세상에 알려진 사건이 내가 초등학교 5학년이었던 화창한 하늘을 품은 가을 운동회 날에 생겼다.

매년 학교 행사 날에는 우리 동네 최고 미인으로 소문난 큰어머니가 예쁘게 치장하고 학교에 오셨었다. 그런데 5학년 가을 운동회 날은 나의 엄마가 오셨다. 만국기가 휘날리고 화창한 가을 하늘 아래에 오전 운동회 프로그램인 매스게임이 끝나고 점심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나와 언니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큰어머니를 찾고 있었다. 그런데 멀리서 학교 운동장 뒤편에 있는 미루나무 아래에서 몸뻬 바지를 입고 햇살에 까맣게 그으른 얼굴을 한 엄마가 “ 은영야!, 은주야! ” 언니와 나의 이름을 부르며 보자기로 싼 찬 압통을 열고 계시는 거였다. 나는 엄마를 보자마자 속으로 ' 몸뻬 바지가 뭐야, 한복이라도 입고 오지 ' 생각하며 언니 손을 잡고 엄마와 동네 아주머니가 맡아놓은 자리 쪽으로 가서 앉았다.

엄마가 흥분해서 " 내 딸들이 좋아하는 반찬 만들었으니 우리 막내 많이 먹고 달리기 1등 해라" 하시면서 점심 반찬들을 차례대로 늘어놓으셨다. 엄마가 계단식으로 된 찬압통을 열 때마다 ' 아! 이게 뭐람' 하는 말이 속으로 나왔다.

엄마가 가져온 음식들은 그때까지만 해도 내가 제일 좋아하는 어묵으로 만든 요리들뿐이었다. 어묵탕, 어묵 무침, 어묵 전, 어묵 잡채, 어묵 튀김 등 어묵으로 우리 엄마가 만들 수 있는 요리들이 총동원되었다. 심지어 김밥 속 재료도 어묵이 반을 차지했던 기억이 난다. 우리 반 민석이 어머니께서는 " 어묵 가게의 어묵을 통째로 사 왔어!" 하며 웃으셨고 엄마는 함박웃음을 지으시면서 " 우리 딸들 운동회 때 꼭 한번 와보고 싶었는데 오늘에서야 소원을 이루었어요. 우리 막내가 가장 좋아하는 반찬이 어묵이에요." 하셨다. 자신의 친자식들이 운동장에서 뛰는 모습을 얼마나 보고 싶으셨으면 새벽부터 일어나서 설레는 마음으로 음식을 준비하였을까 하는 생각이 지금에서야 들었지만, 그 시절의 어린 나에게 엄마가 만들어 온 다양한 어묵 요리들보다는 옆에 앉은 같은 반 친구 어머니가 준비해 온 옛날 통닭에 더 눈길이 갔다. 더욱이, 나는 엄마의 따뜻한 마음을 헤아려보기보다는 몸뻬 바지를 입고 새까만 얼굴을 하고 온 엄마를 보는 친구들의 시선이 불편하게 느껴졌고 혹시나 우리 집의 숨기고 싶은 가정사(家庭事)를 들키지 않을까 하는 속마음이 내재되어 있었다.


엄마는 우리 담임선생님이 어디 계시냐면서 나에게 물으셨고 담임선생님의 손을 잡고 우리가 앉아있는 곳으로 식사를 같이하자고 선생님을 끌고 오시는 거였다. 선생님은 어묵 요리들을 보시고 약간 놀라시면서 " 와! 저도 어묵 좋아합니다. 그런데 학기 초에 뵈었던 은주 어머님이 오지 않으셨네요?" 하시는 거였다. 당연히 모든 학교의 행사에 오셨던 분은 큰어머니였으니 그날 처음으로 5학년 담임선생님은 우리 엄마를 뵌 것이었다.

엄마는 쑥스럽게 "선생님, 제가 진짜 은주 엄마예요!" 하시는 거였다. 엄마가 내뱉은 말에 나는 너무 창피해서 어묵 속에라도 숨고 싶었다. 그 순간 내가 먹은 어묵은 달콤하고 입안에서 살살 녹았던 그 맛이 아니라 아무 맛도 나지 않은 돌덩이를 씹는 것 같았고 담임선생님은 엄마의 말에 겸연쩍게 몇 가락 어묵 잡채를 예의상 드시고 자리를 뜨셨다.


선생님이 자리를 뜨자마자 나는 엄마에게 소리 지르기 시작했다. " 왜 엄마가 진짜 엄마라고 선생님께 말한 거야, 그리고 어묵 반찬만 해오면 어떻게 해. 창피하게, 다른 아이 엄마 좀 봐봐! 화장도 하고, 통닭도 사서 왔잖아. 나 밥 안 먹어. 엄마 집에 빨리 가버려!!!" 소리치며 자리를 박차고 학교 건물 뒤로 몸을 숨기고 앉아서 울기 시작했다.


‘ 왜 우리 엄마는 다른 친구 엄마처럼 세련되지도 못할까?, 나는 왜 엄마가 두 명이나 될까?, 이제 창피해서 선생님과 친구들 얼굴을 어떻게 보나’ 하고 생각하니 서러웠다. 배에서는 꼬르륵 소리가 나면서도 눈에서는 눈물이 하염없이 나왔다. 한참 울고 나니 점심시간이 끝나고 오후 운동회 프로그램을 시작한다는 학교방송이 들렸다. 나는 일어나서 엄마와 언니가 있는 쪽을 보니, 엄마는 고개를 숙이고 주섬주섬 찬압통과 돗자리를 챙기셨고, 옆집 아주머니가 오후 운동회 프로그램도 구경하자는 권유의 손을 조용히 놓으시면서 등을 돌리시고 마을 어르신들 사이를 비집고 교문을 향해서 터벅터벅 걸어가고 계셨다. 양손에 찬 압통을 싼 보자기를 들고 가시는 어머니의 어깨가 축 처져있었던 것 같다. 엄마의 뒷모습을 보면서 나는 엄마에게 미안한 감이 들었지만 그렇다고 내가 크게 잘못했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었던 것 같다. 그날 저녁에 엄마에게 혼날 줄 알았는데 엄마는 그날 있었던 일에 대해 단 한마디도 말하지 않으셨다. 가을 운동회 사건 이후로 우리 집 밥상에서 어묵 반찬은 자주 올라오지 않았으며, 나도 어묵 반찬을 더 이상 찾지 않았다.


코로나-19 감염병이 기승을 부리던 2020년 4월에 나의 엄마는 하늘로 가셨다. 시간이 벌써 오래 지났지만 엄마의 모습, 체취 및 구수하고 정겨운 말들이 날이 갈수록 그리워지고 생각이 난다. 이상하게도 엄마를 더 이상 볼 수 없다는 생각이 나의 삶을 덮칠 때마다 어묵이 미친 듯이 먹고 싶어 져서 시장이나 마트에서 어묵 꼬치를 한 봉지 가득 사 온다. 그리고 TV 보면서 넋 놓고 어묵 꼬치를 하염없이 먹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하곤 한다. 초등학교 5학년 때는 초라한 어머니의 모습이 창피했지만 지금 돌이켜보니 황금에는 도금할 필요가 없듯이 엄마는 화장을 안 해도 그 자체로 빛이 나는 분이셨다. 자신이 배 아파 낳은 자식들을 진짜 내 자식이라고 말도 못 하고, 우리 집에서도 그림자처럼 여겨지셨지만, 자신의 자리를 묵묵히 지키면서 육 남매를 키워주셨던 나의 엄마가 너무 그립다.


'" 은주야! 네가 좋아하는 어묵이다!"라는 엄마의 목소리가 너무나도 듣고 싶고 하얀 쌀밥에 빨간 고추장 넣고 어머니가 만들어준 어묵볶음을 우걱우걱 먹으면서 나는 엄마에게 " 엄마가 해준 어묵볶음이 세상에서 제일 맛있어요!"라고 목청껏 소리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