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살아있는 텍스트, 타자의 얼굴들 -
< 살아있는 텍스트, 타자의 얼굴들 >
내가 가르치는 모든 과목에서 반드시 넣은 과제 중의 하나가 ’2분 스피치‘ 이다. 인간은 특히 지도자로서의 역할을 하려는 이들은 두 가지 방법, 즉 말과 글로 명확하게 설득력 있게, 그리고 효과적으로 자신의 생각을 타인들에게 전달할 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이러한 글쓰기와 말하기로 지적 훈련을 하는 것이 이 과제의 목표라는 설명을 반드시 학기 초에 해준다. 자신이 하는 일을 누군가가 시켜서가 아니라 왜 하는지 아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목소리만 듣는 것이 아니라 얼굴을 보아야 한다는 것, 이것을 레비나스의 얼굴의 철학과 더불어 과목 첫 시간에 설명해 주곤 한다. ’얼굴의 철학‘과 더불어 과목 첫 시간에 설명해 주곤 한다. 얼굴이란 한 인간이 타자의 존재를 비로소 인식하는 참으로 중요한 자리라는 레비스의 철학과 함께 나는 이 얼굴 반드시 보기를 이론으로 접하는 것만이 아니라 수업 시간에서부터 실천해야 한다고 설명해 준다.
" 여러분들은 나에게 살아있는 텍스트"이다.
이 말은 과장을 하는 것도 또한 낭만화하는 것도 아니다. 이런저런 이론을 차용하거나 종교적 교리를 근거로 성별, 성적 성향, 인종, 국적 등에 따른 다양한 종류의 타자를 차별하고 배제하는 일이 이 현실 세계에서 매일 벌어지고 있다. 이러한 차별행위들을 정당화하는 이들이 그 타자들의 얼굴을 진정으로 가만히 들여다보는 법을 배운다면 자신들이 행하는 차별이 사실상 살이 있는 그 얼굴들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임을 조금이라도 깨닫게 되지 않을까 그러한 얼굴 보기를 배우지 못하는 것, 그 얼굴 보기를 가르치는 교육을 하지 않거나 못하고 있다는 것, 현대교육이 지닌 심각한 위기 중의 하나라고 나는 본다.
출처: 배움에 관하여(강남순 저)
오늘 헤벨은 살아있는 텍스트, 타자의 얼굴에 대해 상고해 보고자 한다.
생리학적으로 젊은 동료들과 함께 일하다 보니 나에게 보고할 일이 있는 경우도 메시지나 문자를 보내는 경우가 많다. 직접 얼굴을 보고 대면으로 소통하려고 하면 힘들어하는 모습도 종종 보인다. 그들에게는 직장 상사와 얼굴을 맞대고 이야기 나누는 것이 익숙하지도 않고, 직접 대면하는 것이 부담스러워 보인다. 그 심정은 충분히 이해한다. 하지만 얼굴을 보지 않고 문자와 메시지로 의사를 전달하다 보니 문맥상에 오해를 부를 수도 있으며, 개인의 기분이나 감정이 배제된 상태의 감정 없는 문자와 메시지는 서로 간의 소통의 벽을 만들기도 한다.
생리학적으로 젊은 직장동료들에게 들은 이야기이다. 친구들을 만나는 경우에도 서로 얼굴을 보지 않고 문자 혹은 메시지로 이야기를 나눌 때가 편할 경우가 있다고 우스개 소리를 한다.
그러한 현상의 연장선일까? 직장 안의 사무실에서 구글폼을 만들어서 서로의 업무를 조율하고 대화를 나누고 일의 효율성을 추구하는 일하는 방식은 스마트하고 신선하다. 그런데 디지털화된 업무방식으로 인한 소통의 부재는 ‘함께 하는 일’ 혹은 서로 간 협의하고 소통하여 의견이 도출되어야 하는 경우에도 혼자서 일하는 것에 익숙한 나머지 의도하지 않는 실수가 발생하는 경우도 있다.
그래서 강남순 교수님의 ‘배움에 관하여’에 나오는 “ 여러분들은 나에게 살아있는 텍스트’라는 말을 직장의 생리학적으로 젊은 동료들에게 말하고 싶다. "문자와 메시지보다는 직접 얼굴을 보고 이야기하고 싶고, 소통하고 싶다고. 당신은 나에게 살아있는 텍스트"라고 말이다.
레비스의 철학이 얼굴이란 한 인간이 타자의 존재를 비로소 인식하는 참으로 중요한 자리이며, 눈 마주침으로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는 순간의 중요성이 목소리로 나는 소리 없는 소리만 난무하는 현대사회에서 사람의 얼굴을 보고 함께 앉아있는 시간들이 소중해짐을 느낀다.
우리 집의 케이스를 말하고 싶다. 서로를 보면서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 외식하러 나가는 경우에도 남편과 딸아이는 핸드폰만 보고 있어, 나 혼자 듣지도 않는 투명 인간들에게 한탄의 소리를 지르고 있기도 하며, 힘들게 저녁 식사 자리를 마련한 경우에도 남편은 야구 경기를, 딸아이는 핸드폰 보면서 밥이 코에 들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는지도 모르게 밥을 먹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마음이 무겁다.
눈 부처라는 말이 있다. 상대방의 바라볼 때 나의 눈동자에 타인의 모습의 형상이 그대로 나타나는 것을 눈 부처라고 한다. 상대방이 나의 눈에 들어와 눈부처가 되기 위해서는 상대방의 얼굴을 바라보고, 진심 어리게 존중하면서 마주해야 한다.
나의 눈동자에 상대방을 부처로 만들기 위해서는 타자의 얼굴을 진정으로 가만히 들여다보는 법을 배운다면 서로 간의 인간의 존엄성을 인정해 주는 첫 단계가 될 수 있다고 헤벨은 생각한다.
급변하게 디지털화 되어가는 세상에서 나의 딸아이를 눈 부처로 만들고 싶고, 직장 동료와 부하 직원들을 직접 대면하면서 그들의 인생의 텍스트를 마주하고자 한다. 이를 위해서 오늘도 나 자신이 더 낮아져야 함을 느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