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새벽에 너를 열어보았는데 안이 캄캄해서 너무 놀랐다. 어젯밤에 무슨 일이 있었니?
내가 너를 너무 뜨겁게 대한 것은 아닐까? 걱정되어서 칸칸이 안을 살펴보았는데
매일의 일상과 변함이 없이 너를 대했다. 너의 이상현상이 혹시 다른 원인일 수 있을 것
같아서 너의 에너지원을 뺐다 넣었다 해보았지만 너는 반응이 없었다.
마음이 답답했다. 너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게 분명하기 때문이리라
너와 만난 것이 벌써 20년 전. 2003년에 너를 처음 만났다.
5백만 원으로 시작한 나의 신혼집에서 유일하게 네가 차지하는 비중이 꽤나 높았다.
15평짜리 두 개 방이 있는 투룸에서 너의 풍채와 위상이 매우 드높았다.
그리고 우리 집에 방문하는 사람들마다 너를 보고 한 마디씩 했지
” 집에 비해서 저거 너무 큰 거 아니야? “
” 신혼집에서 해 먹을 게 많나 봐 “
투룸에 너를 들여놓는 것은 나에게 큰 용기를 필요했어. 양문형 스타일의 너의 품에
충분히 내가 무엇인가를 채워줄 수 있을까? 그만한 경제적 여유가 내게 주어질까?
고민도 있었지. 하지만 나는 너의 품격 있는 클래스에 반해서 너를 선택했고,
너에게 다양한 것들을 넣어주기 위해서 노력했지. 내가 너를 만날 때마다
새로운 무엇인가를 만들게 해 주었고 똥손인 나에게 음식이라는 예술의 꽃을 맛보게
해 주었지. 다 네 덕분이었다.
결혼 후 몇 년의 고생 끝에 우리 가족과 너는 32평으로 옮겨지게 되었지. 32평에 네가
들어갈 공간이 미리 만들어져 있어서 우리들은 매우 기뻤지. 너를 어디에 놓아둘까 고민할 필요가 없이
너만의 공간이 있어서 그런지 우리 가족들은 편안하게 너를 이용할 수 있었단다.
딸아이가 생기고 나서부터 너의 수난시대가 도래했던 것 같아. 하루에도 수십 번씩 너를
괴롭게 열고 닫고, 꽝꽝 거리며 발로 차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는 묵묵히 우리 가족들의
수족이 되어주었단다.
차가운 얼음으로, 맛있는 반찬으로, 몸에 좋은 보약도 품어주고 말이야.
5년 전에도 네가 갑자기 소리 없는 외침을 했었을 때 너에 대한 전문가분을 모셨왔지.
다시 너를 살리려고 하니 전문가분이 왠만한면 다른 애로 바꾸라고 한다.
네가 너무 오래되어서 너의 몸에 맞는 부속품이 없을 수도 있다고 했다.
하지만 전국을 뒤져서라도 찾아달라고 했단다. 그래서 5년 전에 꽤나 큰돈을
드려서 너의 몸에 맞는 부속품을 구했서 너와 함께할 수 있었는데..
새벽에 네가 움직이지 않으니 불안했다. 직장에 출근해서도 네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힘들게 전문가분과 연락되어서 직장에서 잠시 나와서 너의 상태를 보게 되었는데 전문가분의
한마디가 나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 수명이 다한 것 같습니다. “
” 어떻게 안될까요? 5년 전에도 필요한 부품으로 갈아 끼웠는데요. “
” 오존유발한다고 필요한 물건을 만들지 않아요. 사모님 “
” 이제는 새 거로 바꾸셔요 “
” 방법이 없을까요?
“ 사모님, 없습니다. ”
20년 나와 우리 가족과 동고동락했고, 우리 가족의 여행 사진을 어깨에 붙이고, 맛집 전화
번호를 등에이고 하루에도 수 차례 문을 여는 딸아이의 짓궂은 행동에도 묵묵히 참아왔던
마이 클라세(klasse)
곤도마리에는 ‘설레지 않으면 버리라 “고 했는데 나는 아직도 너를 만나는 게 설렌다.
오늘은 네가 품고 있는 것들을 가지고 창조적인 무엇인가를 만들 생각에
딱딱하게 얼어붙은 것들을 녹여서 조잡한 음료를 만들어 먹을 생각에
시큼한 김치를 꺼내 돼지고기에 두부를 넣어 우리 가족을 배불리 먹을 생각에
설레는데 이제는 보내야 할 것 같다. 나라는 사람은 한번 정이 들면 쉽게 놓지 못한다.
그게 사람이든, 물건이든 말이다.
20년 썼던 냉장고를 이제는 보내야 한다. 언니가 제발 냉장고 좀 바꾸라고, 제발 김치냉장
좀 사라고 말해도 꿈쩍도 안 했는데
정이 들어도 보내야 할 것은 보내는 연습을 해야 할 나이인 듯싶다. 그게 사람이든,
물건이든 말이다. 내가 왜 이렇게 오랜 된 나의 물건에 집중할까?
심리학적으로 인간은 물건을 소유하고 그 소유된 물건을 자아로 느끼게 되며, 궁극적
으로 인간이 무엇인가를 통제하는 느낌을 가지게 된다고 한다. 고로 나는 클라세를
나의 소유물이며 완전히 통제하는 느낌을 버리고 싶지 않기 때문에 나의 물건들을
쉽게 버리지 못하는 것이리라.
20년 된 나의 냉장고는 나의 자아로 인식되고, 냉장고은 나의 통제하에 있었기 때문에
나 자신이 냉장고의 주인으로 여겨 왔던 것이다.
이제, 나는 마이 클라세와 분리되어야 하고, 나의 통제 하에서 클라세를 놓아주어야 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