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KoreaSeJin 코리아세진 Nov 09. 2018

대한민국 최전방에서 움튼 고전새싹

2013년 3월 31일 @강원도 속초

공자 왈, 맹자 왈. 소크라테스 왈.

  나는 고전이라 하면 고지식하고, 재미없고, 고리타분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바쁜 일상을 핑계 삼고, 고전독서를 실천할 생각도 하지 않았던 2011년 가을, 나는 경기도 연천 지역 최전방 G.O.P소초장 임무를 수행 중이었다.

 소대장 생활은 생도 때에 생각했던 것과는 참 많이 달랐고, 소대원들에게 상처를 주고 또 받기도 했다. 갖은 애환을 토로할 수 있는 동기들과의 연락도 쉽지 않았다. 갖은 고뇌는 꼬리에 꼬리를 물며 이어졌고, 깊은 공허감이 밀려오기도 했다. 


 반복되는 경계 작전과 불규칙한 수면리듬 속의 일상들. GOP에서의 1년은 도저히 흘러갈 기미도 뵈지 않았다. DMZ 너머 북한군 측의 어두컴컴한 하늘과 우리나라 쪽 밝은 주황하늘의 극단적 대비, 그리고 빛나는 달빛별빛이 주는 이상한 서러움까지, 그나마 소대원들과의 일상에서 느껴지는 소소한 즐거움만으로 하루하루를 겨우 견뎌내고 있었다. 


  매서운 칼바람 몰아치던 어느 겨울날, 평소 존경해오던 홍정욱 선생께서 비영리 재단인 ‘올재’를 설립하여 단 2,900원에 양질의 고전을 발행한다는 소식을 접했다.(올재는 “Share the wisdom, Change the world”라는 기치아래 매 분기 4~5권의 고전을 각각 5,000부씩 발행해 4,000부는 판매하고, 1,000부씩은 사회 곳곳에 기부한다. 현재까지 66권이 나왔다.) 그리고 소초에 있는 병영서적 중에 인문고전독서에 대한 내용을 담은 이지성 작가의 『리딩으로 리드하라』라는 책을 접하게 되었다. 두 가지를 동시에 접한 것은 절묘한 타이밍이었다. 


 3시간여씩 2번 끊어서 자야 하는 GOP소초 생활이었다. 안 그래도 짧은 수면시간을 쪼개어 30분 ~ 1시간씩 고전독서를 시작했다. 어느 누구도 강요하지 않은, 스스로 시작하는 공부이자 도전, 약속이었다. 

  그 처음은 플라톤의 『국가』였다. 본문 첫 페이지를 보자 숨이 턱 막히며 가슴이 답답하고, 머리는 혼란스러웠다.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당최 알 수 없었다. 첫 페이지조차 이해 못하는 내가 한없이 부끄러웠다. 첫 페이지만 수차례 읽다 답답함에 울분이 차서 코끝도 찡해졌다. 


 3일 동안 처음 10페이지를 반복해서 읽었다. 그래도 쉽지 않아 한 글자씩 따라 써보았다. 그러자, 놀랍게도 조금씩 소크라테스의 말들이 서서히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1페이지 넘기는 것도 힘들었지만, 읽는 양이 조금씩 늘어나기 시작했다. 

 애초에 쪼개진 수면시간을 다시 쪼개어 더 피곤해질 법도 했다. 그런데 가슴 속에서 무언가가 꿈틀거리며 뜨거워졌고, 희한하게도 몸은 더 가볍게 느껴졌다. 


 4주가 조금 더 걸려 일독한 플라톤의 『국가』는 국가방위자로서 지녀야 할 철학적 사고능력과 자질, 그리고 역할 등등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일개 소대장에 불과했지만, 최전방 철책을 직접 지키는 우리나라 ‘방위자’로서의 사명감도 느낄 수 있었다. 몇몇 구절을 필사하여 옮기며 마지막 페이지를 덮으니, 성취감이 가득했다. 


 처음 한권을 독파하기가 가장 어렵다고 했던 『리딩으로 리드하라』의 글귀를 떠올리며 곧바로  다음 도전을 시작했다. 그것은 여느 필독서 목록의 첫 번째에 언급되는 『논어』였다. 사실, 논어를 읽는다는 건 먼 나라, 남의 이야기일 뿐이었다. 그래도 삼성·현대그룹 창시자(이병철, 정주영 회장)들의 머리맡에 항상 『논어』가 놓여있었다는 사실을 곱씹으며 일독했다. 확실히 처음보단 빨리 읽을 수 있었다. 논어는 인격 수양, 이상사회와 정치, 인간본성통찰 등의 내용으로 가득했다. 가슴에 와 닿는 글귀가 많았는데, 특히 ‘제10편 향당’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었다. 〈마구간이 탔다. 공자는 조정에서 물러나와 말하기를 “사람이 상했느냐?” 묻고 망아지는 묻지 않았다.〉 (廐焚 子退朝曰 傷人乎 不問馬 / 구분 자퇴조왈 상인호 불문마) 


 사실, 나는 소대원들의 잘못과 실수를 그냥 넘기지 못하고, 따끔히 질책하고 심지어 얼차려까지 주는 등 마음의 여유와 아량도 많이 부족했었다. 그로 인해 마찰도 겪고 홍역을 치르기도 했다. 2012년 1월의 어느 날, 다 같이 전반야 근무에 투입하던 길에서 한 소대원이 들고 가던 전기밥솥을 떨어뜨렸다. 춥고 배고픈 새벽에 모두가 먹을 주먹밥이 든 전기밥솥이었다. 몇몇은 한숨을 쉬고, 몇몇은 잔뜩 긴장해서 내 눈치를 보았다. 순간적으로 공자의 말씀(傷人乎 不問馬)이 떠올랐다. 그에게 다치지 않았느냐 묻고, 밥솥은 나중에 고치면 된다고만 말하고 더 이상 얘기 하지 않았다. 


 물론 의식적으로 나온 말이었고 당시 소대원들은 기억 못할 수도 있지만, 그것은 고전독서에서 비롯된 큰 변화의 작은 첫걸음이었다. 하루하루, 고전을 읽고 생각하며 말과 행동을 바꾸려고 노력했다. 점점 마음 속 비었던 공간에는 지혜가 담긴 글귀가 채워져 갔다. 그리고 소대원들과 즐거운 추억을 쌓으며, 5월이 되어 무사히 철수할 수 있었다.(철수 직후 곧바로 다른 격오지에 투입되긴 했다.^^;)


 처음에 10년을 바라보고 고전독서를 시작했다. 2015년 12월, 이제 4년이 흘렀다. 그동안 짬짬이, 300권 정도의 책을 읽었다. (물론 고전만 읽은 것은 아니다.) 처음에는 책에 길이 있을 줄로 알았는데, 이제는 삶의 길은 바로 내 안에 조용히 숨어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많은 분야의 책들이 어쩌면 하나로 엮어지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저자들의 사상과 생각을 온전히 받아들이고, 논하고, 발전시키기에는 한참이나 부족하다. 


 스스로와의 약속은 이제 5년차로 접어들었고, 다가올 2016년에는 많은 변화도 있을 거다. 참 멀고도 먼 길이겠다. 하지만 늘 그래왔듯이, 뚜벅뚜벅 걸어가고자 한다. 최전방에서 움튼 고전의 새싹이 건실한 나무로 자라 꽃망울을 터트려 향기를 퍼트리고, 열매를 맺어, 더 나은 세상이 되는데 조금이나마 기여할 수 있기를 소망하며...


 ps> 개인적으로, 고전에 대한 편견을 깨고 함께 나눌 수 있는 분이 많아지면 좋겠다. 궁극적으로는 우리사회가 ‘역사를 잊어 길을 잃고, 철학을 몰라 가치를 잃은’ 사회가 되지 않는 또 다른 방법일 수도 있겠다. 

매거진의 이전글 또복이의 탄생과 아빠의 입원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