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나무의 순은 좋은 먹거리입니다. 죽순이 쑥쑥 자랄 때 마디는 촘촘하고 대 속은 살이 올라 꽉 차게 됩니다. 이때 도끼로 찍고 칼로 다듬어서 솥에 삶아 내거나 풍로에 구워 놓으면 향기가 좋고 맛이 연하여 입에는 기름이 돌고 배는 살이 찝니다. 쇠고기나 양고기보다 맛있고, 노린내나는 산짐승 고기와는 비교도 되지 않습니다. 이른 아침에 먹어도 질리지 않으니, 대의 맛이 이러합니다."
중학생 시절 이인로의 수필 '월등사죽루죽기'에 나오는 구절이다. 무려 천년 전의 음식 맛 묘사가 이렇게 맛깔날 줄이야...ㅎㅎ 그 탓인지 막상 이 글의 진짜 주제는 그닥 기억에 남지 않는다. 다만 당시만 해도 내 머릿속에 있는 죽순의 이미지는 중화요리점에서 종종 맛볼 수 있는 캔 제품이 전부였다. 죽순 산지인 전남 등 남부 지역이 아니라면 철마다 죽순을 구입하고 요리해 먹는 집은 보기 드물다.
오늘날 대한민국에서 죽순은 여러모로 마이너한 식재료인데도 그 맛이 이렇게 칭송받았던 이유는 고려의 불교 문화와 맞닿아 있다. 승려들에게는 육식 자체가 금기였으며, 일반 농민들에게도 농사 밑천인 소를 잡아먹는 일은 여러모로 꺼려지는 일이었다. 귀족과 부유층은 대신 '고급진' 식물성 음식들을 찾아 먹으며 사치를 즐겼다. 쌀과 기름, 꿀이 듬뿍 들어간 유밀과가 발달한 것도 이 시절의 일이다. 죽순 역시 당대의 고급 식재료로 꼽혔음을 우리는 이 짧은 묘사를 통해 알 수 있다.
어린 대나무를 식용하는 문화는 한중일 모두 존재하지만 특히 중식에서의 죽순 활용도는 무궁무진하다. 맛이 담백하고 풍미가 진하지 않은 죽순은 다른 재료와 조화롭게 어울리면서 아작아작한 식감도 더해준다. 기름기 많은 중국음식과의 시너지 효과도 좋다. 게다가 중국 대륙이 워낙 넓다 보니 사시사철 구할 수 있다는 점도 죽순이 대중화되는데 한몫 했을 것이다.
일본의 경우에는 아직까지 불교 문화가 생활 속 깊숙이 뿌리박고 있으며 '쇼진요리'라고 불리는 채식 요리가 발달해왔다. 여기에 봄 한철에만 맛볼 수 있다는 점은 '순(旬)'이라고 불리는, 일본인들이 유달리 제철음식에 집착하는 취향과도 딱 맞아떨어진다. 일본 만화 '맛의 달인'에서는 땅속에 묻힌 여린 죽순을 최대한 신선하게 먹기 위해 대밭에 불을 지른다는 엽기적인 에피도 소개된 바 있다...(이렇게 하면 몇년간은 대나무가 아예 자라지를 못한다고)
한국인들이 유독 죽순을 즐기지 않는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일단 생산지가 남쪽 지역으로 한정됐다는 것. 최근에는 조선업을 대신해 관광 등 다른 분야에서 먹거리를 찾고 있는 거제에서 죽순 채취가 활발해졌다고 한다. 제한된 지역에서 한철만 난다는 점에서는 송이버섯과 비슷하지만, 강렬하고 개성 강한 향을 지닌 송이에 비해 담백한 죽순은 마니아층을 형성하기 어려워 수요도 적다. 한번 먹으려면 엄청나게 손이 간다는 점도 진입장벽으로 꼽힌다.
아는 사람만 찾는 별미이긴 하지만 제철에 캔 죽순은 통조림에서 느낄 수 없는 자연의 풍미와 신선한 식감이 살아 있다. 입안에 남는 살짝 떫은 듯한 느낌도 익숙해지면 오히려 매력이다. 보통 나는 제철 죽순을 사면 잘게 채쳐서 고기요리에 곁들이거나 밥을 짓는데, 올해는 구운 죽순도 도전해볼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