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렉상드르 뒤마의 작품세계와 요리
80년대 미드 ‘맥가이버’에는 주인공이 구사하는 기상천외한 생존기술들이 눈길을 끈다. 오지에서 물을 찾아내고, 악당들과 싸울 무기를 만드는 일을 맥가이버는 주머니칼 하나로 뚝딱 해낸다. 그런데 무려 19세기 초에 맥가이버를 능가하는 히어로가 있었으니, ‘몽테크리스토 백작’의 파리아 신부가 그 주인공이다. 수십년 옥살이를 해온 신부는 헌옷으로 종이를 만들고 생선뼈로 펜을, 고기 지방으로 양초를 만드는 등 엄청난 내공을 선보인다. 신부의 도움을 받아 에드몽 당테스는 감옥을 탈출해 새로운 모험에 나선다. 흥미진진한 디테일과 도파민을 뿜게 하는 스토리텔링은 오늘날의 장르소설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다.
‘재미’라는 요소 하나를 가지고 문학계를 평정한 작가로 몽테크리스토 백작의 저자 알렉상드르 뒤마를 꼽는데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19세기 최고 인기 작가인 뒤마는 그러나, 생애 초반을 불우한 환경에서 지냈고 혼혈 출신이라는 반전 배경을 갖고 있다. 1802년 뒤마는 북프랑스 빌레르 코트레에서 토마 알렉상드르 뒤마와 마리 루이 엘리자베스 라보레 사이에서 태어났다. 후작 가문 자제였던 뒤마의 할아버지는 아프리카 흑인노예 여성과 부친 토마를 낳았다. 백인 사회에서 출세하기 어려웠던 토마는 군인의 길을 택했고, 나폴레옹 휘하에서 전공을 세우며 유색인종으로는 드물게 장교의 지위를 얻게 된다.
하지만 아버지는 뒤마가 4살 때 세상을 떠났으며 나폴레옹파였다는 이유로 일가는 군인연금도 받을 수 없었다. 가난 속에서 뒤마는 제대로 된 교육을 받는 대신 집에서 독서에 탐닉했다. 성경부터 시작해 고대 신화, 아라비안 나이트, 로빈슨 크루소 같은 다양한 작품들을 읽었으며 이는 작가로서 그의 큰 무기인 해박한 지식을 쌓는 바탕이 됐다. 성인이 된 후 파리로 간 뒤마는 오를레앙 공의 사무실에서 서류를 작성하는 필경사로 일하면서 틈틈이 작품을 쓰기 시작했다. 1829년 역사극인 ‘앙리 3세와 그 궁정’이 크게 성공하자 본격적인 극작가로서의 활동을 시작했다.
20여년 동안 뒤마는 빅토르 위고 등과 함께 당대의 인기 작가로 활약했다. 그가 집필한 앙토니, 킹 등의 희곡은 자유로운 상상력에 흥미를 유발하는 스토리텔링으로 관객들을 사로잡았다. 1820년대에는 신문과 잡지의 인기에 편승해 연재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특히 뒤마는 스케일이 큰 역사소설에 주목했고, 1839년에서부터 1841년까지 유럽 역사에서 유명한 범죄 사건들을 집대성한 ‘유명한 범죄자들’이라는 책을 출간했다. 책속에는 체사레 보르자, 베아트리체 첸치 같은 역사적 인사와 당대의 인물들이 함께 수록됐다. 오늘날까지도 영화나 각종 매체의 단골 소재인 ‘삼총사’, ‘몽테 크리스토 백작’ 등이 세상에 나온 것도 이 시기의 일이다.
다만 그의 작품은 오랫동안 문학적 가치 면에서는 폄하받아 왔다. 이른바 ‘양판소’처럼 작품을 찍어내는 공장 시스템, 빈번한 역사왜곡, 표절 등의 논란은 항상 뒤마를 따라다녔다. 인종차별의 굴레 역시 벗어나기 어려운 것이었다. 프랑스 작가협회는 그를 거부했고, 생전에 사인회 한번 개최한 적이 없었다고 한다. 뒤마는 자신의 작품 ‘조르주’를 통해 “내 아버지는 물라토요, 조부는 깜둥이였으며, 증조부는 원숭이였소. 알겠소, 선생? 우리 집안은 당신네가 끝나는 곳에서 시작했단 말이오."라는 신랄한 말을 남기기도 했다.
이런 삶의 무게 때문인지 뒤마는 항상 자극을 추구하는 생활을 했다. 동물기르기와 사냥, 요리와 여행을 특히 좋아했다고 전해진다. 여자관계도 복잡해 결혼 전부터 40명이 넘는 여성과 관계했고 혼외자도 알려진 인물만 최소 4명이다. 그가 자식으로 인정한 혼외자는 ‘춘희’의 작가 알렉상드르 뒤마 피스와 딸 마리 알렉상드리엔 뒤마 두 명이었다. 말년에는 사치스러운 생활 때문에 파산을 하고 빚쟁이에게 시달렸다.
특히 뒤마가 탐닉했던 것은 요리였다. 움베르트 에코의 소설 ‘프라하의 묘지’를 보면 뒤마가 선원들에게 바다거북 요리법을 상세히 설명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는 ‘몽테 크리스토 백작’이 성공을 거두자 ‘몽테 크리스토 성’이라는 별장을 지었는데 이곳에 수많은 예술가들을 초청해 파티를 즐겼고 본인이 직접 만찬을 요리했다. 60대의 나이에도 10접시의 풀코스를 뚝딱 비울 정도로 엄청난 식욕을 지녔다고 한다. 아들 뒤마 피스는 부친에 대해 ”사실 아버지는 밤중에 많이 먹고 소화불량에 걸려 잠이 안오니 밤새 작품을 집필하는 것”이라는 말까지 남겼다.
뒤마의 남다른 식탐은 1843년 저술한 나폴리 여행기에서 잘 드러난다. 그는 나폴리 빈민층인 ‘라짜로니’들의 생활상과 그들의 주식인 피자를 상세하게 소개, 오늘날까지 귀중한 자료로 남았다. 라짜로니에 대해 뒤마는 “동전 두닢이면 온 가족이 먹을 수 있는 피자를 살 수 있기에 살아갈 수 있다”고 언급했다. 나폴리 피자는 “겉보기에는 단순한 음식처럼 보이지만, 자세히 보면 많은 재료가 들어가는 음식”이라는 게 그가 받은 첫 인상이다. 기록을 통해 당시 나폴리 피자에는 베이컨, 라드, 토마토, 앤초비 등이 쓰였음을 알 수 있다.
뒤마가 탐닉한 또 다른 음식으로는 멜론이 있다. 그는 자신의 저서 500권을 프랑스 남동부 ‘카바이용’ 도서관에 기증하는 조건으로 1년에 12개의 멜론을 요구했다. 지금도 이 지역의 멜론은 특상품으로 인기가 있다고 한다. 그는 죽음 직전까지 7년간 이 멜론 맛에 빠져들었다. 뒤마의 기록에 따르면 “멜론은 덥고 마른 땅에서 자라지만 과육의 90%가 수분으로, 중국과 이집트에서 전파됐다. 아비뇽 유수 시절의 교황들도 멜론 맛에 매료됐다. 그 씨앗은 6년 후에 심어도 싹이 나고 먹다가 뱉은 것도 잘 자라는 다산성을 지니며 어느 토양과도 어울려 뿌리를 내린다”고 한다. 수십 종류로 진화한 멜론을, 뒤마는 혼혈이면서 다양한 문화를 흡수해 작품으로 써내는 본인에 비유한 듯 하다.
뒤마가 활동한 시기는 오늘날 ‘미식대국’이라고 불리는 프랑스의 음식문화가 본격적으로 꽃필 때였다. 귀족들 밑에서 요리하던 셰프들은 혁명 이후 레스토랑을 차리고 호화스러운 요리를 일반 대중에게까지 전파했다. 프랑스 요리계의 전설로 불리는 앙투안 카렘이 활약을 시작한 것도 이 무렵이다. 나폴레옹 시대에는 외국의 정상들을 초대해 만찬을 대접하는 일이 많았는데, 프랑스식 식문화와 테이블 매너는 이때부터 전 유럽의 표준으로 자리잡았다.
알렉상드르 뒤마의 마지막 작품은 각종 식재료와 레시피를 집대성한 ‘요리 대사전’이다. 무려 60만 단어에 1,001개의 레시피가 실린 방대한 분량으로 뒤마 사후인 1873년 발간됐다. 한국에도 ‘뒤마 요리사전’이라는 제목으로 출판됐는데 요리와 조리용어, 제과제빵, 향신료, 식재료, 레시피, 음식문화와 역사 등 총 370가지 항목에 300개 레시피가 소개된다. 백과사전식으로 제빵용 밀가루 반죽 ‘아베스’부터 감귤류 껍질 ‘제스트’까지 그야말로 19세기 프랑스 음식문화의 모든 것을 볼 수 있다. 참고로, 동물학대 논란이 있는 오르톨랑(멧새를 브랜디에 빠뜨려 죽이는 잔인한 조리법으로 알려졌다)이나 프와그라에 문제제기를 한 점도 눈에 띈다.
앙투안 카렘의 수제자이면서 뒤마의 친구 비유모가 감수를 맡았는데, 뒤마는 원고를 출판업자에게 넘기면서 “500권의 책을 썼는데 한 권쯤은 요리에 대한 책으로 마무리해야지”라고 말했다. 오늘날까지 프랑스 요리 일부에는 ‘뒤마 식 바닷가재’처럼 그의 이름이 남아 있다. ‘몽테 크리스토’라는 이름의 케이크와 그의 이름을 딴 하바나 시가 브랜드까지 있을 정도다. 뒤마는 전통적인 유럽 식재료 뿐 아니라 중남미와 아프리카 같은 곳의 낯선 음식들도 본인의 저서를 통해 폭넓게 소개한다.
한동안 저평가받았던 뒤마의 작품들은 통속 소설을 넘어서 프랑스 문학사의 한 자리를 당당하게 차지하며 그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또한 그 정도가 다소 과하기는 하지만 인생의 쾌락과 자연스러운 본성을 긍정하는 뒤마의 삶의 태도 역시 현대인에게 많은 것들을 시사한다. 뒤마는 마지막 저서 ‘요리 대사전’에서 “요리가 없다면, 예술도 지성도 사라질 것이다.”라는 본인의 예술관을 피력하기도 했다. 그의 작품들은 각종 장르문학과 영화, 대중예술에 적지 않은 영향을 남겼으며 뒤마의 상상력이 선사하는 무한한 즐거움은 오늘날 사람들에게도 유효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