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대전 전쟁영웅의 식성은?
“대영제국은 전 세계에 여러 가지 먹을거리를 공급하고 있습니다. 단 ‘조리 전’으로 말이죠.”
자국 음식을 이처럼 대놓고 ‘디스’한 이는 바로 2차 대전 승리를 이끈 영웅, 윈스턴 처칠 전 총리다. 영국 특유의 자조 개그를 제대로 써먹을 줄 알았던 그는 알고 보면 재미있는 뒷이야기가 많은 인물이기도 하다.
처칠은 영국에서 손꼽히는 명문가 출신 금수저로 태어났다. 아버지 랜돌프 처칠은 정계 유력인사로 재무장관을 지냈다. 그는 뉴욕의 백만장자 상속녀인 제니 제롬과 결혼했는데, 이처럼 미국 출신 부잣집 딸을 신부로 맞는 일이 영국 귀족들에게는 꽤 흔했다. 신랑은 거액의 지참금을, 신부는 ‘레이디’ 칭호가 붙은 귀부인의 지위를 얻는 일종의 거래였던 셈이다. 다만 두사람은 실제로도 뜨거운 사랑에 빠졌던 듯, 결혼 후 불과 7개월 만에 장남 윈스턴이 태어났다. 속도위반이 분명해 보이지만 당시 사회의 분위기 탓에 조산으로 둘러댔다고 한다.
최고의 환경에서 태어난 처칠의 유년기는 뜻밖에 불우했다. 부친 랜돌프는 젊은 시절 방탕한 생활을 해온 탓에 매독을 앓았다. 나중에는 통제가 어려울 정도의 광증으로 가족들을 괴롭게 했으며, 아들이 21살이 되던 해 세상을 떠난다. 어머니 제니 제롬은 파티와 사교 모임으로 바빠 처칠과 그 동생을 제대로 돌보지 못했다. 어린 시절의 고독 때문인지 처칠은 거의 평생 동안을 우울증에 시달렸다.
학업에도 흥미를 느끼지 못해 소년 처칠은 명문학교인 해로우 스쿨에서 열등생으로 낙인찍혔다. 특히 라틴어를 진저리 칠 정도로 싫어했지만 독서를 좋아한 덕분에 문학, 역사 등의 성적은 우수했다고 한다. 다행히 라틴어 공부를 하지 않아도 되는 브라이튼 학교 진학 후에는 무사히 학업을 마칠 수 있었고, 삼수 끝에 샌드허스트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했다. 단체생활을 통해 리더십과 자제력을 배우며 부족했던 사회성도 기를 수 있었다.
처칠이라는 인물이 갑자기 유명세를 타게 된 계기는 보어전쟁 참전이다. 종군기자 겸 장교로 전쟁터에 나갔던 그는 게릴라 부대에 잡혔다가 탈출했다. 무작정 도와 달라고 어느 집 문을 두드렸는데, 그곳은 마침 그 일대의 유일한 영국인 이민자가 살고 있었다. 그야말로 기적에 가까운 행운이었다. 집주인인 존 하워드의 도움을 받아 현지인으로 변장한 처칠은 480km를 걸어 무사히 탈출했다. 그의 생환 과정이 영국 땅까지 알려지면서 청년 윈스턴은 영웅과 같은 존재가 됐다.
이후 그는 종군기자와 군인으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고, 부친의 뒤를 이어 본격적으로 정계에 입문했다. 해군 장관으로 임명된 처칠은 1차 세계대전을 앞두고 국방개혁에 나섰으나 독일의 잠수함 개발로 인해 실패하고 만다. 갈리폴리 전투 파병 작전까지 큰 손실을 남기며 실패로 끝나자 그는 자리에서 물러나 잠시 야인 생활을 했다. 우여곡절 끝에 총리에 임명된 것은 2차대전이 막 발발한 1940년의 일이다.
당시 그의 정치적 라이벌이라고 할 수 있는 네빌 체임벌린을 비롯해 영국 정계에서는 독일의 야욕을 과소평가했다. 앞서 처칠은 이때 나치 독일의 침공을 대비해 공군을 강화하기를 주장했다. 결국 독일이 중립국인 벨기에를 침략하면서 체임벌린은 사임하고, 처칠은 본격적으로 전시 영국을 이끌어가게 된다.
그는 “위기 상황에서 절대로 도망치지 말라. 물러서면 위험이 두 배로 늘어난다. 그러나 결연하게 맞서 싸우면 위험은 절반으로 준다. 어떤 일이 닥쳐도 절대로 물러서면 안 된다. 절대로!”라는 말로 자국민들을 독려했다. 영국인들은 전쟁이 한창이던 때도 최대한 평소처럼 일상생활을 유지했다고 한다. 두려움 없이 전쟁에 맞서도록 한 처칠의 리더십은 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끄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적국 지도자인 독일의 아돌프 히틀러는 채식을 하며 술, 담배를 멀리하는 금욕적인 인물로 알려져 있다. 이와 대조적으로 처칠은 고칼로리 음식을 매끼마다 폭식한데다 독한 위스키와 시거를 달고 살았다. 무절제한 생활이 칭찬받을 일은 아니지만, 이런 식성 차이는 두 사람의 성향을 말해주는 것 같기도 하다. 히틀러가 극도로 절제되고 교묘한 전략으로 독일 국민들을 선동한 반면, 처칠은 계산된 행동 대신 스스로에게 솔직한 성격이었고 이는 국민들을 대하는 태도에도 반영됐다.
그의 식습관에는 평생을 따라다닌 ‘검은 개’의 영향도 컸다. 우울증을 앓고 있었던 처칠은 자신의 병을 ‘블랙독’이라고 불렀다. 정계에서 물러난 후에는 “내가 많은 것을 이루었는데, 지금 보면 이룬 게 없다”고 탄식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우울증에 지는 대신 열정적인 삶으로 이를 극복했다. 장관직을 사임한 후에는 처제의 권유로 수채화를 그렸는데, 파블로 피카소가 보고 “전업 화가를 해도 되겠다”고 평할 정도였다.
처칠은 엄청난 대식가이자 미식가인 것으로도 유명하다. 귀족 집안 금수저로 자란 만큼 고급스러운 프랑스 요리를 즐겼다고 한다. 그가 좋아한 음식으로는 밤을 사료로 해서 기른 쇠고기, 블루치즈의 일종인 스틸턴 치즈, 햄, 정어리, 비프 파이 등이 있다. 전쟁에 나가 있을 때 아내에게 끊임없이 편지를 보내 음식을 보내 달라고 조르기도 했다. 이 중 스틸턴 치즈는 쿰쿰하고 진한 맛이 특징으로 최상품의 경우 1kg당 약 100만원까지도 호가하는 고급품이다. 알코올 도수가 높고 달콤한 포트 와인이나 과일에 곁들여 먹는다.
가족들과 기념일을 보낼 때는 사보이 호텔을 자주 찾았는데 송아지고기 크림스튜인 블랑켓 드보, 가자미를 넣은 훈제 연어롤, 바닷가재, 푸아그라에 사슴고기와 송로버섯 소스를 뿌린 것, 생굴, 야생 조류 알, 닭고기 스튜, 치킨 파이, 초콜릿 수플레, 콩소메 수프 등을 즐겼다. 특히 콩소메를 좋아했던 그는 호텔 리츠 파리에서 190프랑을 주고 특별한 레시피의 수프를 주문했다. 양고기와 쇠고기로 만든 아이리쉬 스튜도 좋아했으며 단음식은 즐기지 않았다.
콩소메는 다진 쇠고기에 각종 향미야채, 허브를 꽃다발처럼 묶은 부케가르니 등을 넣고 장시간 푹 끓인다. 달걀 흰자로 불순물을 건져낸 후 맑은 육수만 그릇에 담아낸다. 얼핏 보면 그냥 고기육수 같지만 재료의 맛이 응축된 사치스런 수프로 알려졌다. 서양요리 조리사를 준비하는 이들에게는 자격증 실습종목 중 난이도 최강 요리이기도 하다. 수프 그릇 아래 신문지를 깔고 신문을 읽을 수 있을만큼 맑아야 한다고.
처칠은 특히 배만 타면 식욕이 샘솟는다면서 아침식사부터 시리얼과 수프, 달걀 4개, 베이컨 5조각, 구운 고기 2조각, 토스트 4개, 치즈와 홍차를 먹었다. 오롯이 식사를 즐기기 위해 ‘혼밥’을 선호했고 아내와 함께 아침을 먹은 적은 거의 없었다고 한다. 애주가였기 때문에 아침부터 위스키나 샴페인, 하이볼 등을 마셨다. 루즈벨트 대통령을 방문했을 때 금주법 시행 중이던 미국에서 의사 처방을 부탁해 술을 얻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샴페인 애호가인 처칠은 “승자는 샴페인을 마실 자격이 있고, 패자는 샴페인을 마실 필요가 있다”는 말을 남겼다. 그의 이름을 딴 샴페인도 있는데 평생 즐겼던 폴 로저 샴페인 제조사 오너는 그가 특히 피노 누아 품종을 선호했다는 일화를 전했다. 그가 사망한 후 1975년 제조한 매그넘 사이즈 샴페인은 ‘퀴베 서 윈스턴 처칠’이라는 이름을 가졌다. 10년 이상 숙성이 필요한 고급 빈티지 샴페인이다.
총리로서 마지막 방미길에 올랐던 1954년 그는 기내식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메뉴판을 직접 수정했다. 두 개의 쟁반 중 첫번째는 “으깬 계란과 토스트, 잼, 버터, 커피, 시원한 우유, 차 닭요리와 고기”, 두번째는 “포도, 설탕, 오렌지 슬러시, 위스키 소다, 물수건과 담배”를 주문한다. 시거와 위스키가 식사의 마무리였던 셈. 이런 식생활에도 90세까지 장수했지만, 아마도 체질을 건강하게 타고나지 않았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음식을 외교에 활용한 일화도 있다. 1945년 7월 열린 포츠담 회담 때의 이야기다. 미국의 해리 트루먼, 소련의 이오시프 스탈린, 그리고 윈스터 처칠은 전후의 국경 조정에 대해 논의했다. 다만 이 자리는 처칠에게 상당히 골치 아픈 것이었는데, 전쟁 승리는 미국과 소련의 개입 없이는 어려웠기 때문이다. 기여 지분이 적은 영국으로서는 요구사항을 마음 놓고 주장할 수 없었다. 더구나 트루먼, 스탈린이 승전을 축하하는 화려한 메뉴를 준비한 반면, 자국에서 총선 낙방 소식까지 접한 처칠의 기분은 참담했을 것이다.
하지만 마지막까지 지도자의 의무를 다하기 위해 그는 직접 만찬 메뉴를 정했는데 1937년 할가르테너 리슬링 와인과 ‘도버 솔’로 불리는 가자미 튀김, 그리고 닭고기였다. 단출해 보이는 구성이지만 나름의 전략이 반영돼 있었다. 영국의 대표 메뉴라 할 수 있는 피시 앤 칩스는 대구나 명태로 만드는 게 정석이다. 하지만 전쟁 기간 동안 독일 잠수함 U보트의 공격으로 이들 생선은 조업이 막혀 가격이 폭등했다. 대신 영국인들은 해안에서 잡히는 가자미를 먹었고, 특히 도버 해협은 노르망디 상륙 작전이 진행된 장소로 의미가 있다. 자국민의 고난을 음식으로 보여준 처칠의 전략은 성공이었다. 영국은 거액의 전후 보상금을 챙겼고, 식민지에 대한 권리와 향후 국제외교에서의 유리한 입지를 점하게 된 것이다.
서구 열강의 식민지 정복은 오늘날 많은 비난을 받고 있다. 2차대전 직후 전쟁에 협력한 대가로 ‘대영제국’은 식민지들을 하나씩 독립시켜 주기 시작했고, 제국의 시대가 저물면서 영국의 국력도 크게 기울었다. 우리나라 입장에서는 영국이 침략자 일본을 몰아내 준 존재이기는 하지만, 제국주의자 처칠이 아시아를 딱히 존중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뛰어나 전략으로 독일의 야욕을 막아낸 그의 리더십만큼은 폄훼할 수 없을 것이다. 또한 우울증, 열등생, 불우한 가정사 같은 일들을 겪으면서도 삶에 대한 열정으로 많은 것을 이룬 그는 한 인간으로서도 귀감을 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