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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ejin Jeung Nov 07. 2024

스타일에 영감을 준 달다구리

코코 샤넬이 사랑한 디저트

코코 샤넬

소녀시절, 많은 여성들은 공주 드레스와 화려한 레이스 장식을 동경한 적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막상 이런 의상을 풀 장착하고 살았던 옛 귀부인이나 공주들은 엄청난 불편을 감수해야 했다. 허리를 끊어지기 직전까지 조이고, 거추장스러운 장식을 주렁주렁 달았으니 말이다.  근대 이전까지 여성들의 옷을 만들 때 실용성은 거의 고려의 대상이 되지 못했다. 이렇듯 아름답지만 불편한 복식문화에 정면으로 반기를 들고,  여성의 신체를 해방시킨 인물이 바로 프랑스의 디자이너 코코 샤넬이다.     

 

샤넬은 1883년 프랑스 소뮈르에서 태어났다. 타고난 난봉꾼이었던 아버지는 가정을 전혀 돌보지 않았으며, 어머니는 힘겹게 아이들을 부양하다 젊은 나이에 사망한다. 샤넬과 형제들은 뿔뿔이 흩어졌고, 그녀는 고아원에서 자라게 됐다. 성장한 후 바느질로 생계를 이으며 경제적 자립을 꿈꾸던 샤넬은 캬바레(오늘날의 클럽 같은 곳)에서 부업으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코코’라는 이름은 당시의 예명이었다.


빼어난 미모를 지닌 그녀는 손님들에게 인기를 끌었고, 이때 만난 청년 장교 에티엔 발잔과 연인이 됐다. 부유한 집 아들인 에티엔의 지원으로 샤넬은 파리 캉봉 거리에 모자 가게를 열 수 있었고, 상류층 인사들의 문화를 흡수해 나갔다. 하지만 에티엔은 샤넬이 본격적인 사업에 뛰어들기를 원하자 이를 못마땅하게 여긴다. 결국 그녀는 에티엔의 친구이면서 자신의 재능을 알아봐 준 아서 카펠과 사귀게 됐다.      

샤넬이 머물던 파리 리츠 호텔


불과 5년만에 샤넬은 카펠이 투자한 자금을 회수하고도 남을 만큼 사업에서 성공을 거뒀다. 성공의 요인은 상류층 여성들의 불편한 복장을 활동하기 편하도록 바꾼 데 있었다. 에티엔과 승마를 할 때 그녀는 불편한 치마 대신 바지를 승마복으로 입었다.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발상이었다. 이어 코르셋과 지나친 장식을 배제한 옷들을 만들면서 패션계의 이목을 끌게 된다.      


샤넬은 남성 속옷을 만드는 데 쓰인 저지 소재를 여성복에 도입했다. 마침 1차 세계대전이 터졌고, 군수사업 등에 투입된 여성들은 구김 걱정 없고 실용적인 저지를 선호하게 됐다. 스포츠용 스웨터를 여성용으로 개조하거나, 단정하면서도 활동적인 수트를 만들어 내놓았다. 장례식에서나 입는 것으로 여겨지던 검은색으로 정장 드레스를 만들기도 했다. ‘미니 블랙 드레스’는 오늘날에도 많은 셀럽과 멋쟁이들이 반드시 갖춰야 할 패션 아이템으로 꼽힌다.       


또 다른 시그니처 패션으로는 트위드 수트가 있다. 스코틀랜드, 아일랜드 전통의상 재료였던 양모를 촘촘하게 짠 것인데 여성복으로는 거의 쓰이지 않았다. 거칠고 질긴데다 보풀이 일기 쉬운 소재였지만 그녀는 스코틀랜드 목초지대의 자연에서 영감을 얻어 우아한 색감과 디자인을 갖춘 옷을 만들어냈다. 이후 수석 디자이너 칼 라거펠트에 의해 트위드 수트의 스타일은 업그레이드됐으며, 이른바 ‘올드머니룩’의 아이콘으로 지금까지 사랑받고 있다.     


한편 카펠이 교통사고로 사망한 후, 샤넬은 영국 웨스터민스터 공작의 연인이 됐다. 그는 보석 수집을 즐기는 취미를 갖고 있었다. 샤넬은 과한 보석과 장신구를 “목에 거는 수표”라고 부르며 싫어했으나, 그의 취향은 새로운 패션세계를 개척하는 영감을 줬다. 값비싼 진품 대신 모조품을 과감히 사용한 것이다. 여성들은 이제 부모나 남편이 선물한 ‘과하고 무거운’ 보석 대신 스스로 선택한 인조 보석으로 멋을 냈다.      

샤넬을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제품이 바로 향수다. 러시아 출신의 연하 남친으로부터 조향사를 소개받은 그녀는, 화학물질인 알데히드를 사용해 만든 향수에 시적인 문구 대신 ‘No.5’라는 이름을 붙였다. 샤넬 자신이 5를 행운의 숫자라고 생각했다고. 병 모양은 프랑스 궁전의 각진 모습을 본뜬 것이다. 샤넬은 단골손님들에게 “당신에게만 특별히 주는 것”이라며 향수를 선물해 입소문이 나게 했다. 전쟁의 겪던 여성들에게 5만원 가량의 향수는 ‘스몰 럭셔리’ 욕구를 충족시키며 인기를 끌었다. 


전 세계 여성들의 스타일을 바꾼 샤넬의 사생활은 어땠을까. 그녀는 남성에게 도움받는 것을 ‘매춘’이라고 할 정도로 자존심이 강했다. 하지만 막상 걸어온 길을 보면 연인들의 도움에 지속적으로 의존해 왔음을 알 수 있다. 만났던 남성 대부분은 유부남이었고, 사실상 ‘스폰’관계나 다름없었다. 여성 인권을 주장하면서 약자인 노동자들을 가혹하게 해고한 것, 혈육을 구해기 위해서라고 하지만 나치에 협력했던 것 등도 치명적 오점이다. 결국 샤넬은 프랑스 국민들의 용서를 받지 못한 채 스위스에서 눈을 감았다.     


디자이너로서 이름을 날렸을 때 샤넬의 삶은 화려함 그 자체였을 것이다. 극작가 장 콕토, 화가 피카소 등 명사들과 어울렸고 방돔 광장의 리츠 호텔 스위트룸에서 34년간을 살았다. 설립자인 세자르 리치가 1898년 오픈한 리츠 호텔은 프렌치 퀴진의 제왕으로 불리는 오귀스트 에스코피에가 레스토랑을 맡았고 헤밍웨이, 엘튼 존, 다이애나 왕세자비 등이 묵어간 곳이다.     


코코 샤넬이 머물렀던 스위트룸은 생전에 그녀가 살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메인 레스토랑 레스파동은 헤밍웨이가 직접 이름을 지었는데 ‘노인과 바다’ 속 청새치에서 따왔다고 한다. 애프터눈 티를 즐길 수 있는 프루스트 룸도 있다. 샤넬은 캐비어와 생굴, 그리고 샴페인이 젊음을 지켜준다고 믿어 아침식사에 항상 곁들였다. 지인들과 자주 찾은 레스토랑은 ‘Le Grand Vefour’라는 곳으로 가격도 가격이지만 예약이 어려운 것으로도 유명하다. 세월이 흐르면서 메뉴 구성은 달라졌지만 오늘날까지 명성을 잇고 있다.     

샤넬이 특별히 식탐이 많거나 미식가였던 것 같지는 않으나 달콤한 디저트를 즐겼다는 이야기는 나름 유명하다. 샤넬의 단골 카페 ‘안젤리나’는 쇼콜라 쇼, 즉 핫초코가 유명한 가게로 100년이 넘는 역사를 갖고 있다. 19세기 무렵 스위스에서 고체 초콜릿이 만들어지기까지 초콜릿은 음료로 마시는 게 보편적이었다. 신대륙에서 넘어온 쓰디쓴 초콜릿에 유럽인들은 우유와 설탕을 넣어 마셨다. 그 달콤한 맛은 여성들의 마음을 사로잡았고, 카사노바 같은 이는 ‘작업’용으로 초콜릿을 대접하기도 했다.      


쇼콜라 쇼는 지금도 파리 곳곳에서 흔히 맛볼 수 있는 음료인데 일반적인 초코우유나 코코아와는 다소 다른 느낌이다. 훨씬 진하고 걸죽한 느낌에 카카오 콩의 풍미인 듯한 견과류 향이 난다. 원산지인 남미에서는 칠리 고춧가루를 넣기도 하는데 열을 내는 효과가 있어 자양강장제로도 쓰인다고 한다. 실제로 추운 날 쇼콜라 쇼 한 잔을 마시면 왠지 후끈한 기운을 느끼게 된다.     


안젤리나는 다양한 디저트로도 유명하다. 밀피유와 마카롱 외에 샤넬이 특히 좋아한 과자는 바로 몽블랑이다. 알프스 최고봉의 이름을 딴 이 케이크는 15세기 경 이탈리아 요리사가 처음 만들었다고 한다. 흰자와 설탕을 섞어 구운 머랭에 산처럼 뾰족한 형태로 새하얀 생크림을 얹어 눈 덮인 몽블랑의 모습을 연출한다. 1620년 프랑스 샤모니의 한 제빵사가 프랑스식으로 ‘몽블랑’이라는 이름을 붙였고 레시피도 조금 달라졌다.      


초창기에는 거품 낸 생크림인 크렘 샹티이가 주 재료였으나, 프랑스인들은 크림 대신 밤을 이용하는 레시피를 새롭게 만들어냈다. 오늘날까지도 몽블랑 하면 마롱 크림이 기본처럼 여겨지고 있다. 밤 크림으로 대체되면서 색깔이 갈색으로 달라진 대신, 맨 꼭대기에 올린 파우더슈거가 흰 눈을 표현한다. 마롱 크림을 마치 국수처럼 짜내고 마무리로는 시럽에 조린 밤 한 조각을 올린다. 몽블랑은 일본으로 건너가 특히 인기를 얻는데, 익숙한 재료인 밤을 사용한데다 식감이나 단맛이 차와 어울리기 때문이다.      

밤나무가 많이 자라는 이탈리아 북부와 프랑스 남부 지역에서는 밤을 이용한 디저트가 명물로 불린다. 앙젤리나에서도 진하고 부드러운 밤잼을 판매하고 있으며, 밤 하나를 통째로 설탕에 조린 마롱 글라세라는 과자도 인기 제품이다. 파리의 제과점에서 자주 볼 수 있는 마롱 글라세는 만들기가 꽤 까다롭다 보니 값비싼 고급 과자에 속한다. 일단 밤 종류가 조금 다른데 밤송이 하나에 딱 하나씩만 들어있다고 한다.      


밤의 겉껍데기와 속껍질을 벗긴 후 물에 1~2시간 가량 삶는다. 얇은 모슬린 천으로 밤을 하나하나 감싸고 바닐라향, 럼주 등을 첨가한 설탕시럽에 7일 동안 절인다. 7일 내내 60도 온도를 유지해 줘야 하므로 보통 손이 가는 작업이 아니다. 밤을 건져낸 후에는 시럽과 슈거파우더를 표면에 씌운다. 마롱 글라세는 보통 그것 하나만 차와 함께 먹거나 케이크 위에 장식으로 곁들인다. 섬세하고, 까다롭고, 손이 많이 간다는 면에서 예술적 자존심이 하늘을 찌른다는 프랑스인과 왠지 어울리는 과자다. 


아름다움을 창조하는 데 일생을 바친 샤넬이 달콤한 디저트를 좋아했다는 점은 여러모로 의미심장하다. 여성들이 탄수화물이나 단 음식을 찾는 이유는 호르몬 변화와 관련이 깊다고 한다. 다만 적절한 당분 섭취가 머리를 많이 써야 하는 이들에게 좋은 것만은 사실이다. 조선시대 왕세자들은 수업을 받기 전 엿이나 곶감 같은 단음식을 먹었다. 수능을 치르는 수험생에게 초콜릿 등을 선물하는 것도 비슷한 맥락에서다. 새로운 분야를 개척해야 했던 샤넬에게 달콤한 맛은 일종의 자양분이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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